잘 지내셨어요?
회의실 안에는 마사토가 있었다. 강우의 환한 표정에 마사토도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강우야, 오랜만이다.”
마사토는 아버지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를 나누는 아버지와 마사토는 참 친근해 보였다.
“마사토, 오느라 고생했어.”
“뭘…. 바로 옆 나라잖아.”
강우와 아버지가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직원 한 명이 시원한 음료를 가지고 들어왔다.
“고마워요.”
강우가 마사토를 보며 물었다.
“한국에는 어떻게 오신 거예요?”
“얼마 전에 도쿄에 있는 집을 매매했거든. 한국에서 지낼 집을 좀 알아보고 왔지. 업무 처리할 것도 있고.”
“정말요? 아직 이민 절차 안 끝나시지 않았어요? 다들 어디서 지내세요?”
마사토가 씩 웃었다.
“이민 절차는 절차고 일단 한국에 살면서 적응을 좀 해야 하지 않겠니? 그리고 지금은 잠깐 호텔 생활하고 있다.”
“아…. 그럼 빨리 한국으로 와야겠네요.”
간단한 근황 이야기가 끝나자 아버지가 업무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제2 김치공장 건설 건은 잘 진행되고 있는 거야?”
“그럼, 걱정하지 마. 요즘 일본도 취업난이라서 말이야. 공장을 건설한다고 하니까 지자체에서 유치경쟁까지 있었다니까? 그만큼 우리 김치 브랜드가 유명해진 거지.”
마사토의 말에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양 무역은 일본 김치 시장을 장악해 나가는 중이었다. 이제 다른 식품 사업에까지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장이 지어지면 생산량을 더 늘려야겠어요. 김치 시장을 완벽히 장악하는 걸 내년 목표로 하죠.”
“그래,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야.”
마사토가 눈을 빛냈다. 강우가 조금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마사토 아저씨가 한국으로 오시면 일본 김치 사업은 누가 담당해야 하죠?”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아주 유능한 인재를 하나 찾았거든.”
마사토의 말에 아버지가 설명을 보탰다.
“하루오 어르신의 친척 중 한 명인데 이번에 동경대를 졸업하고 우리 회사에 입사했어.”
“그래요?”
강우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하루오의 먼 친척이라니 궁금했다.
“그래, 일본 오면 만날 수 있을 거야.”
“네, 방학 끝나기 전에 한번 가든지 할게요.”
강우의 말에 마사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슬쩍 물었다.
“김 시장 조사는 끝나신 거예요?”
“그래, 일본은 내수 시장이 커. 이미 일본 국내에 김을 공급하는 많은 업체가 존재해. 이번에는 진입이 쉽지는 않을 거야.”
2000년대 전까지의 김 시장은 일본이 최종 수출 목적지였다. 한국과 중국에서 생산되는 김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소비됐다. 특히 한·중·일 삼국의 김 문화는 약간씩 차별화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은 마른김과 조미김을 중심으로 내수와 수출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은 마른김과 조미김을 중심으로 내수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 한일 양국의 조미김을 만드는 스타일이 다르다.’
한국은 참기름 혹은 들기름과 소금을 이용한 조미김을 만들었고, 일본은 간장과 설탕이 중심을 이루는 조미김이었다. 중국은 단김과 방사무늬김을 주로 생산했는데 단김은 내수용 방사무늬김은 일본 수출용이었다.
‘지금의 김 시장은 각국에서 점점 생산량을 늘리고 시장을 키워가는 시기이다. 2000년대가 넘으면 김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해 세계화가 시작되지.’
강우는 그 전에 김 시장에서 승기를 잡을 생각이었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시장이 커지기 전에 국내의 생산지를 선점하고 김 스낵이라는 시장을 개척해서 세계화에 대비하는 거지.’
그리고 중국의 생산지도 선점해 중국 내수 시장까지 노릴 생각이었다. 물론 중국에서 쏟아지는 막대한 생산량으로 수출시장도 노릴 것이다.
“아버지, 대진 그룹에서 넘겨받은 가공 공장들은 전부 점검됐죠?”
“그래, 강우 네가 말한 김 스낵을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보는 중이다. 그리고 김 스낵에 대한 특허권도 신청해 놓을 생각이야.”
마사토가 김 스낵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김 스낵이라는 것이 이 시기에는 매우 생소한 제품이었다. 강우가 조사한 것에 의하면 미래의 김 스낵 최대 생산국인 태국조차 아직 김 스낵 생산을 하지 않고 있었다.
“김 스낵이라니 이런 제품은 생각해보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잠시만요.”
강우가 수화기를 들어 회의실 밖과 연결했다.
“네, 회의실로 김 스낵 사업 진행서 하나만 가져다주세요. 영문판으로요.”
이윽고 직원 한 명이 작은 책자를 가지고 왔다. 동양 무역에서 여러 번의 회의와 검토로 탄생한 사업 진행서였다. 강우가 마사토에게 작은 책자를 내밀었다.
“오? 이거구나.”
마사토가 신중한 표정으로 사업 진행서를 읽어내려갔다. 그 안에는 강우가 구상한 김 스낵 사업의 전반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마사토가 감탄성을 터트렸다.
“대단하네. 역시 강우야. 몇십 년 후까지 내다본 사업계획인데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구나.”
“감사합니다. 김 스낵은 동남아 시장이 주요 대상국입니다. 시장이 활성화되고 나면 세계로 수출도 노려봐야죠.”
강우가 씩 웃으며 답했다. 아버지가 입꼬리를 올리며 의기양양했다.
“어때? 우리 아들 사업 감각이?”
“이봐 정식, 그만 좀 자랑하라고 나도 부러워 죽겠으니까.”
아버지와 마사토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마사토는 한참 동안 회의를 했다. 폭발적인 성장세로 엄청난 영업이익을 남기고 있는 동양 무역이었다. 세 사람은 넘쳐나기 시작하는 유동자금의 사용처를 신중히 논의했다. 그리고 자금의 사용처는 대부분 강우가 결정했다.
“일단 대진 그룹의 지분을 더 가지고 오고요. 남는 돈은 제가 국내 업체 중에 몇 군데에 더 투자할게요.”
강우의 말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강우 너에게 다 맡길게.”
“네, 고마워요. 아버지.”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마사토, 칼국수 어때?”
“좋지.”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마사토는 자주 가던 칼국숫집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인 칼국숫집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세 사람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째 손님이 더 늘어난 거 같아?”
마사토가 주변을 보며 말했다. 마사토의 말처럼 처음 왔을 때보다 손님이 늘어 있었다.
“외국인 손님도 제법 오고, 맛집으로 소문나서 그러지.”
“그렇군. 한국은 인터넷이 점점 발달해서 그런 소문이 금세 퍼진다고 하던데?”
아버지와 마사토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강우가 주문했다. 이윽고 칼국수가 나오자 마사토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내가 이걸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아나? 한국에 오면 매일 먹으러 와야지.”
“그래, 그럼 자네 점심은 아예 여기로 고정하지.”
마사토가 씩 웃더니 칼국수를 후루룩 먹었다. 그리고는 겉절이를 집어 단숨에 삼켰다.
“크……. 이 맛이지.”
마사토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마사토의 먹는 모습에 강우와 아버지도 식욕이 돌았다.
후루룩. 후루룩.
세 사람의 칼국수 넘어가는 소리가 경쟁하듯 울려 퍼졌다.
“진짜 맛있었다.”
마사토가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국물까지 싹 다 비운 마사토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강우가 슬쩍 물었다.
“밥 먹고 어디 가실 거예요?”
“집 구하러 가야지. 강우 너랑 같이.”
마사토의 말에 강우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마사토는 일본인이었다. 보통 일본인들은 남에게 잘 부탁을 하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폐를 끼치기 싫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마사토는 강우와 아버지에게는 늘 이러했다. 그리고 강우는 마사토의 이런 모습이 참 좋았다.
“그래요. 그럼 회사 들어갔다가 직원들이랑 인사하고 바로 출발해요.”
“그래.”
점심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회사로 돌아왔다.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 마사토는 강우와 함께 다시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가서 승합차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당연히 너희 집 근처지.”
마사토의 말에 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사실 마사토가 한국으로 오고자 하는 것도 강우 가족 때문이 아니던가. 강우가 승합차를 몰아 강남으로 향했다.
* * *
딸랑.
부동산 문이 열리고 강우와 마사토가 밖으로 나왔다. 부동산 안에서 공인중개사가 뛰어나왔다.
“아이고~ 사장님, 그럼 잔금 날 뵙겠습니다.”
“네, 안녕히 계세요.”
마사토는 정말 화끈했다. 강우에게 집을 고르는 것을 전부 맡겼다. 강우는 집 근처의 같은 매물로 사전계약을 했다.
“아파트에 사는 건 처음 아니세요?”
“그렇긴 한데. 집이 넓어서 상관은 없을 거 같구나.”
마사토는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받은 단독주택에서만 살았었다. 하지만 강우가 보여준 아파트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무엇보다 강우가 사는 동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좋다고 했다.
“강우야, 시간이 조금 남는데 우리 어디 가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마사토의 말에 강우가 힐끗 시간을 확인했다. 마사토의 말처럼 아버지의 퇴근 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오늘 아버지가 퇴근하면 세 사람은 오랜만에 회포를 풀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네, 그럼 회사 아래에 있는 카페로 가요.”
“좋지.”
강우와 마사토가 다시 차에 올라탔다. 승합차가 출발하자 마사토가 창문을 내렸다. 후덥지근한 여름 바람이 차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안 더우세요?”
“덥긴 한데. 한국의 더위는 기분 좋은 더위라고나 할까?”
마사토의 말에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마사토가 말을 이어갔다.
“일본은 뭐라고 할까. 조금 습한 기운이 강하지 그래서 매일 음습한 기분이 든다고 할까?”
“음…. 그랬던가요?”
강우가 일본에 갔을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사토는 한국 날씨를 만끽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강우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럼 가족들은 언제 한국 들어오는 거예요?”
“준비가 끝나는 대로 바로 한국으로 올 거야.”
“한국에 오는 거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강우의 말에 마사토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다? 미나 같은 경우는 한국에 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 안사람도 마찬가지고. 다들 한국 생활에 기대감이 크다.”
“다행이네요. 한국 오면 우리가 한동안 신경 많이 쓸게요.”
강우의 말에 마사토가 흐뭇하게 웃었다. 강우는 참 배려심이 넘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고맙다.”
이윽고 승합차는 회사 건물로 돌아왔다. 강우와 마사토는 일 층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사장이 강우를 반겼다.
“아저씨, 뭐 드실래요?”
“음…. 나는 시원한 녹차.”
강우가 마사토가 마실 녹차와 아이스 커피를 시켰다. 음료가 나오고 두 사람이 한쪽에 앉았다.
“하실 말씀이 뭐예요?”
마사토가 녹차를 쭉 들이켰다. 그리고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강우가 테이블로 시선을 내렸다.
“편지에요?”
“그래.”
마사토가 편지를 강우 쪽으로 쭉 밀었다. 강우가 편지를 펼쳤다. 일본어로 적힌 편지였다.
“어?”
편지를 쓴 주인공을 확인한 강우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편지는 하루오가 보낸 편지였다. 강우가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편지의 내용을 모두 읽은 강우가 마사토에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이 편지의 내용이?”
“그래, 하루오 어르신은 꼭 편지의 내용대로 됐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강우가 편지를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하루오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단법인 광복에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눠봐야겠어요. 일단 제 대답은 조금 미룰게요.”
“그래, 알겠다.”
강우가 다시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