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가 왔어요.
지글. 지글.
연기가 자욱한 고깃집에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마사토가 있었다. 마사토가 칼국수 다음으로 좋아하는 돼지갈비를 먹으러 온 참이었다.
“마사토, 한잔 받지.”
“좋지.”
아버지가 마사토에게 소주를 따라주었다. 잔을 받은 마사토가 소주병을 받아 강우에게 내밀었다.
“우리 강우도 한잔 받아라.”
“네.”
마사토가 강우의 잔을 따라주었고, 강우는 아버지의 잔을 따라주었다. 마사토가 상추를 들더니 고기를 넣고 마늘까지 넣었다. 마지막으로 쌈장을 듬뿍 퍼서는 상추에 올려놓고 꽁꽁 쌌다. 그 모습을 보던 강우가 씩 웃었다. 쌈을 싸 먹는 모습이 영락없는 한국인 같았다.
“어디 먹어볼까.”
마사토가 입을 크게 벌려서 쌈을 단숨에 넣었다. 양 볼 가득 오물거리던 마사토가 소주까지 벌컥 마셨다.
“크으…….”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가는 먹방에 강우의 손이 바빠졌다. 큼지막한 쌈을 싸서는 한 번에 삼켰다. 한동안 세 남자의 정신없는 먹방이 이어졌다.
“한국은 이런 분위기가 참 좋아. 예전에는 정신없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오히려 조용한 술집은 상상이 안 간다고.”
마사토가 왁자지껄한 가게를 둘러보며 말했다. 한국에 오던 초반에는 이런 분위기가 영 낯설고 어지럽던 마사토였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며 좋아했다.
“그래서 오늘 계약한 집은 마음에 들어?”
“그럼, 우리 강우가 얼마나 열심히 골라줬는데. 아마 우리 아내랑 미나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마사토가 강우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강우가 씩 웃으며 고기를 싸 먹었다. 아버지가 마사토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미나는 이제 18이었던가?”
“그렇지 한국 나이로는 19살이고.”
“갑작스럽게 한국에 오게 돼서 학업도 그렇고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아버지가 조금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는 비어있는 마사토의 잔을 채워주었다.
“우리 딸은 걱정 없지. 지난번에 자네 가족이 다녀간 이후부터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어. 사실 미나가 그때 이후로 한국으로 유학 오고 싶어 했어.”
“그랬군요. 미나한테 한국 오면 걱정하지 말라고 해주세요. 든든한 오빠가 있으니까요.”
강우의 말에 마사토가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 가득 만족스러움을 드러냈다.
“그래그래, 우리 강우만 있으면 한국 생활은 문제없겠지.”
“그럼, 우리 강우만 믿으라고.”
아버지가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했다. 아버지와 마사토의 모습에 강우가 씩 웃었다. 그렇게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때쯤이었다. 마사토가 강우를 힐끗 보며 눈빛을 보냈다. 아마 아까 나누었던 일을 아버지에게 말하자는 신호 같았다.
“저…. 아버지.”
“응?”
아버지가 기분이 좋은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마사토를 바라보았다. 마사토가 고개를 끄덕했다. 강우가 다시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일본에서 편지가 왔어요.”
“편지?”
강우가 하루오에게서 온 편지 내용을 말해주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점점 놀라움으로 물들어갔다.
“마사토, 이게 무슨 말이야? 하루오 어르신이 왜 유산을….”
“그게 말이야. 나한테도 말을 해주지 않으셔.”
강우와 아버지가 동시에 침음성을 흘렸다. 하루오의 재산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의 유명한 가문이었으니 무시할 만한 액수는 아닐 것이다. 물론 가문의 모든 것을 넘긴다는 말은 아니었다. 하루오 자신이 평생을 살며 쌓아온 재산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무시 못 할 수준이겠지.’
강우가 상념에서 벗어났다.
“일단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려보는 게 좋겠어요. 무언가 이유를 알고 계시겠죠.”
“그래, 그게 좋겠네. 마사토 내일 아침 일찍 집으로 오라고.”
아버지의 말에 마사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아버지가 비어있는 소주병을 들어 흔들며 소리쳤다.
“여기 소주 한 병이요.”
“네! 손님.”
가게 주인이 알겠다고 답했다. 순간, 심각한 대화를 나누던 세 사람이 순간 주변의 시선을 느꼈다. 사람들이 묘한 시선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가게 주인이 소주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세 분이 다 다른 언어로 말하니 손님들이 신기하신가 봅니다.”
그제야 강우와 아버지가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강우는 아버지에게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쓰고 있었다. 그리고 강우와 마사토는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쓰고 있었다.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일본어가 뒤섞이는 기묘한 대화에 사람들이 신기할 만도 했다.
“아…. 그런가요.”
아버지가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는 주변을 보며 씩 웃었다. 아버지가 반응을 보이자 손님들이 앞다투어 물었다.
“박강우 학생이죠? 아버지시고요?”
아버지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네, 맞습니다. 여기가 제 아들 박강우입니다. 그리고 저는 강우 아비입니다.”
아버지의 말에 손님들의 시선이 더욱 뜨거워졌다. 그리고는 조금씩 강우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실물로 보니까 신기해요. 더 잘생겼어요.”
“강우 학생 사인 좀 해주세요.”
갑자기 쏟아지는 주변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에 강우가 그대로 멍해졌다. 그러자 아버지가 강우의 팔을 툭 하고 쳤다.
“강우야.”
“아…. 네.”
강우가 정신을 차리고는 사인을 해주었다. 마사토는 그런 강우를 보며 실소를 흘리고 있었다.
“이봐 정식, 강우가 언제 연예인 데뷔를 했지?”
“그러게 말이야. 이거 연예인 저리 가라야.”
강우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한참 있었다. 모두 강우를 칭찬하고 응원하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강우의 얼굴이 점점 민망함으로 물들어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저 대견하고 흐뭇할 뿐이었다.
“사장님, 오늘 여기 제가 쏩니다.”
결국, 기분이 최고조에 달한 아버지가 골든벨을 울렸다. 가게 안의 사람들이 괜찮다며 이걸 원한 게 아니라며 말렸다.
“여러분이 우리 가족에게 주시는 과분한 관심과 성원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계산하는 건 그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아버지의 말에 사람들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강우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고, 마사토는 무슨 말을 했냐며 강우에게 물었다. 강우가 아버지의 말을 통역해주자 마사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친구도 대단해.”
그렇게 고깃집 안이 아버지의 골든벨로 대동단결이 되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서로의 통성명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마치 하나의 회식처럼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한국은 참 신기해.”
일본인인 마사토에게는 문화충격이었다. 술집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 금세 일행인 것처럼 어울리니 말이다. 강우가 마사토를 보며 씩 웃었다.
“그게 바로 한국인의 매력이죠.”
“그런 거 같아. 이제 나도 그 매력에 빠져볼까?”
마사토가 벌떡 일어나더니 사람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언제 공부했는지 어눌한 한국어로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강우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 * *
그날 밤, 강우가 집으로 돌아왔다.
덜컥.
문이 열리고 강우가 아버지를 부축해 나타났다. 아버지는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기분이 최고였다.
“하하! 우리 아들 힘도 세네! 아빠를 그냥 막 들고 와!”
“아버지, 다 자요.”
강우가 아버지의 입을 간신히 틀어막았다. 그러자 안방 문이 벌컥 열리고 어머니가 나타났다.
“어머~ 우리 여보 술 많이 먹었나 봐요?”
어머니의 상냥한 표정을 아버지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돌연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보님, 저 안 취했습니다.”
“그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취했다는 증거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다가와 등을 팡팡 때렸다. 아버지가 움찔하며 몸을 웅크렸다.
“이제 슬슬 아들한테 업혀 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아니 오늘 말이야. 고깃집을 갔는데….”
아버지의 입에서 조금 전의 일이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잔뜩 흥분해서는 손짓과 발짓을 하며 마구 설명을 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어머니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못 말려.”
어머니가 웃자 아버지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슬쩍 집으로 들어섰다. 강우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조용히 집으로 들어섰다.
“강우야.”
“네, 엄마.”
강우가 군기가 바짝 들어 답했다. 아버지도 덩달아 멈칫했다. 어머니가 강우의 뒤를 슬쩍 보더니 물었다.
“마사토 씨는?”
아버지가 강우를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 아버지가 보내드린 거 아니었어요?”
“아닌데?”
강우와 아버지가 동시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나가 된 고깃집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그 와중에 강우와 아버지는 밖에서 만났고, 마사토를 서로 챙긴 줄 알았다.
“잠시만요. 호텔에 전화해볼게요.”
강우가 핸드폰으로 마사토가 머무는 호텔에 전화했다. 역시 강우 가족의 전용 호텔과 같은 강남의 호텔이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가고 프런트와 연결이 됐다.
“안녕하세요. 박강우입니다. 혹시 1302호 마사토씨 들어오셨나요?”
-박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프런트 담당 직원이 강우의 이름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이윽고 다시 전화가 연결됐다.
-아…. 지금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정말이요? 다행이네요. 방으로 연결 부탁드립니다.”
-네, 잠시만요.-
프런트 직원이 마사토의 방으로 내선을 연결해 주었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가 계속 가더니 덜컥 통화가 연결됐다. 마사토의 살짝 혀 구부러진 일본어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저예요 강우.”
마사토의 목소리 톤이 대번에 높아졌다.
-오~ 우리 강우구나. 나 버리고 간 강우.-
“아….”
강우가 말문이 턱 막혔다. 하지만 재빨리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저는 아버지가 보내드린 줄 알았어요. 호텔은 어떻게 가셨어요?”
-죄송하기는 내가 애도 아니고 혼자 택시 타고 왔어. 걱정하지 말고 내일 보자.-
“네.”
강우가 핸드폰을 끊자 아버지가 강우를 향해 물었다. 술기운이 확 달아났는지 또렷한 얼굴이었다.
“마사토는?”
“안 들어오셨다는데요?”
“맙소사.”
아버지가 문을 박차고 나가려고 했다. 강우가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농담이에요 농담.”
“어?”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도 씩 웃었다.
“호텔 잘 들어가셨대요.”
“아…. 그래?”
아버지가 멋쩍게 웃더니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 * *
딩동.
다음 날 아침 일찍 강우네 집의 벨이 울렸다. 아침부터 일어나 있던 강우가 인터폰을 확인하고는 문을 열었다.
“좋은 아침.”
열린 현관으로 마사토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양손에는 먹을 것을 가득 들고 있었다.
“마사토 아저씨!!”
강우 방문이 벌컥 열리고 강용이가 뛰쳐나왔다. 마사토가 환하게 웃으며 양손에 든 먹을 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강용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강용아!”
강용이를 내려놓은 마사토가 먹을 것을 내밀었다. 모두 강용이가 좋아하는 것을 사 온 것이다.
“마사토 아저씨 최고예요!”
강용이가 일본어를 구사하며 말했다. 마사토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오? 우리 강용이 일본어가 더 늘었네?”
“공부 열심히 했죠. 아저씨 가족 한국 오면 제가 책임질게요.”
강용이의 위풍당당한 표정에 마사토가 크게 웃었다. 그때였다.
“마사토 왔나?”
열린 방문 틈으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사토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마사토는 할아버지를 만날 때면 늘 이렇게 긴장하고는 했다.
“네, 어르신.”
“들어오거라.”
마사토가 집에 들어섰다. 할아버지의 방문 앞에는 아버지가 서 있었다. 강우가 마사토의 뒤를 따라 할아버지의 방문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의 앞에는 하루오가 보낸 편지가 놓여있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할아버지의 말과 함께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