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들을래요.
방 안에 깊은 정적이 흘렀다. 할아버지가 깊은숨을 내뱉었다.
“하루오의 이런 결정에는 친형과 관련이 있지.”
할아버지의 입에서 숨겨졌던 과거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강우의 눈앞이 흐려졌다. 이윽고 강우의 시야가 회복되었다.
‘여…. 여기는….’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변에 많은 사람이 앉아있었다. 고개를 앞으로 돌리니 검은색 법의를 입은 판사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 옷의 형식이 현대의 것과는 달랐다. 마치 영화에서 보던 과거의 양식과 같았다.
‘재판장?’
강우가 있는 곳은 먼 과거의 재판장이었다. 그때, 재판장에서 일본어가 들려왔다.
“피고인 박춘봉은 지난 21일 조선인들을 선동해 불법 폭력 시위를 주동했습니다…….”
강우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검사복을 입은 일본인 검사가 피고인의 죄명을 나열하고 있었다. 강우의 눈빛에서 불똥이 튀었다. 몸이 움찔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재봉, 참아야 해.”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강우의 몸을 붙잡았다. 강우가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내 몸을 만진다고?’
분명 자신은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 들어와 있었다. 기억 속 누군가가 자신을 만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
강우가 말없이 일으키려던 몸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을 붙잡은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강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익숙한 얼굴의 젊은 청년이 앉아있었다.
‘하루오 어르신?’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루오의 젊었을 적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머리가 지끈 아파져 오며 눈앞의 청년이 하루오임이 확실해졌다.
“맙소사….”
강우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주변의 시선이 대번에 쏟아졌다. 청년 하루오가 황급히 강우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재봉, 여기서 조선어를 쓰면 위험할 수 있다고.”
“아…. 알겠어.”
강우가 빠르게 일본어로 답했다. 그리고 다시 재판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피고인의 변호사가 재판장의 중앙에 나가 있었다. 강우가 멍한 표정으로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휙 고개를 돌려 청년 하루오를 바라보았다.
“어때? 우리 형님 참 대단하시지?”
하루오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하루오에게 형제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저 사람은 꼭 무죄가 될 거야.”
“그래, 알겠어.
강우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 대한 기억이 밀려 들어왔다. 눈앞의 피고인은 항일운동가였다. 이윽고 변호사의 말이 시작됐고, 하루오의 고개가 전면을 향했다.
“피고인 박춘봉은 지난 21일 같은 조선인 친구들과 함께 일본 내 조선인들이 받는 불평등한 대우를 항의하기 위한….”
변호사의 입에서 강한 어조의 변호가 쏟아져 나왔다. 박춘봉은 일본에 있는 조선인들의 핍박과 부당대우를 항변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한 운동까지 한 사람이었다. 강우가 감탄하며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변호하다니…. 그것도 항일운동을 한 사람을….’
재판은 격렬했다. 변호사와 피고인은 외로운 싸움을 이어갔다. 재판장의 모두가 변호사와 피고인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이어진 재판이 끝났다.
탕. 탕.
“다음 재판은 이틀 후 재개한다.”
판사의 선언과 함께 피고인이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지만, 오늘도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그런 피고인 박춘봉을 변호사가 위로해주었다. 이윽고 피고인이 일본 순사들에게 끌려갔다. 변호사가 한참 그 모습을 보더니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집단 광기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아. 군국주의에 물든 법은 본래 기능을 상실했다고.”
하루오가 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가 빠르게 하루오의 뒤를 따라 나갔다.
“형님!”
“하루오, 오늘도 재판장에 왔어? 내가 위험하니까….”
법원에서 나오는 변호사를 하루오가 반겼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배신자들!”
어디서인가 묵직한 돌이 날아와 하루오와 변호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강우가 빠르게 몸을 날려 날아오는 돌을 쳐냈다. 그리고 무심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에 돌을 던진 사람이 후다닥 도망갔다.
“거기 서라!”
하루오가 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뒤를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변호사가 하루오를 막았다.
“하루오, 됐다.”
“하지만 형님!”
변호사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강우를 바라보았다.
“역시 네 운동신경은 알아줘야 해. 날아오는 돌을 쳐내다니. 덕분에 무사했다.”
변호사가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하루오는 축 처진 어깨로 변호사를 따라갔다. 그와 동시에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
“하루오의 형님은 동경대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 중의 수재였지. 하지만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고 변호사의 길을 택했어. 그때까지만 해도 하루오 가문의 어른들은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비록 판관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 당시에 변호사도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으니 말이야.”
강우의 눈앞으로 회한에 잠긴 할아버지의 표정이 나타났다. 강우가 어지러움을 느끼고 비틀거렸다. 할아버지가 깜짝 놀라며 강우에게 말했다.
“강우야, 왜 그러는 게야? 어디가 아파?”
“아니에요.”
강우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두통이 사라지고 기억의 파편이 선명히 뇌리에 각인됐다. 강우가 힐끗 옆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의 말을 듣는 아버지와 마사토의 표정을 크게 상기되어 있었다. 군국주의가 만연하던 일본 강점기에 항일운동가를 변호하는 변호사라니.
‘이건 마치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잖아.’
강우가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옆에 놓인 주전자에서 물을 따른 할아버지가 벌컥 물을 마셨다. 손을 들어 입가를 쓱 닦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분이 변호해준 수많은 조선인이 있었다. 하루오는 그런 형님을 자랑스러워했지. 나 역시 그 형님을 매우 존경했었지.”
할아버지가 하루오의 형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겼다. 강우 역시 변호사를 떠올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똑똑.
그때, 방문을 노크하고 어머니가 들어왔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어머니가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 온 것이다.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고맙다 어멈아.”
“아니에요. 드시면서 말씀들 나누세요.”
“너도 와서 앉아라.”
할아버지가 나가려는 어머니를 붙잡았다.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강우의 옆쪽으로 앉았다. 그러자 강용이도 빠질 수 없었다.
“나도 들을래요.”
열린 문 사이로 강용이가 뛰어 들어와 할아버지의 무릎에 껑충 뛰어들었다.
“어이쿠~ 녀석.”
할아버지가 강용이를 받아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강용이가 할아버지의 품에 파고들며 스르륵 웃었다.
“할아버지 냄새가 제일 좋아요.”
“허허….”
마지막으로 최준이 나타났다.
“나도 왔네.”
“형님은 다 아시는 이야기지 않습니까?”
“들어도 들어도 대단한 이야기지.”
할아버지의 옆으로 최준이 앉았다. 그렇게 모두가 모이자 할아버지의 말이 이어졌다.
“그분은 참 멋진 분이었지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바라셨던 분이었어. 그렇게 조선인들을 변호하기 시작하자 신변의 위협도 거세졌어. 만약 하루오의 가문이 일본에서 유력한 가문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변을 당했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지.”
“그 시절에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게 정말 대단한 거지. 귀족 가문의 자제가 체제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이니.”
최준도 할아버지의 말을 거들었다. 숨겨져 있던 지난 이야기에 강우도 아버지도 마사토도 숨도 못 쉬고 집중했다. 어머니와 강용이도 점점 이야기에 빠져들어 갔다.
“그 형님은 내가 징집되려 했을 때도 백방으로 도와주시려 했었다. 하지만 난 결국 학도병으로 징집됐고, 그 이후로 한참 소식을 듣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런 할아버지의 표정에 최준이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할아버지가 짧게 숨을 뱉어냈다.
“형님의 소식은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2차대전 끝나갈 때쯤 자살특공대로 끌려가 목숨을 잃으셨다고 하더구나.”
할아버지의 말에 방 안의 모두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특히 마사토는 손까지 덜덜 떨며 분노했다.
“그런 훌륭한 분을 가미카제로 끌고 갔단 말입니까!!”
마사토의 분노에 아버지도 화를 참지 못했다. 일본 군국주의의 엄청난 악행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자국의 청년들을 전쟁의 구렁텅이에 몰아놓은 것도 모자라 억지로 죽음에 내몰다니요.”
2차 세계대전의 말미에 일본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살특공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 초기에 유력 가문의 자제들을 내세운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유력 가문의 자제들이 솔선수범함으로써 다른 국민의 참여를 유도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천황에 대한 충성심으로 자발적으로 나선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실상은 전혀 달라.’
수많은 젊은이가 군국주의의 야욕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 징집된 일반인들이 몇 시간의 비행 교육을 받고 폭탄 조끼를 입은 채 눈물을 흘리며 죽어간 이야기가 지금에야 밝혀지기도 했다. 하루오의 형은 바로 그 군국주의 야욕의 희생양이었다.
“평소 형님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사람들 때문이었다. 형님은 태평양 한가운데서 죽음을 맞이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말에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모두가 군국주의의 노예였던 것은 아니었다. 하루오와 그 형님처럼 올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오는 오랜 세월 형님의 일로 일본 정부와 싸워왔지. 진상을 밝히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왔지만…. 이제는 너무 지쳤다고 했어. 그리고 일본에 대한 회의감도 너무 크다고 했고.”
강우는 이제야 그동안의 일들이 전부 이해가 됐다. 하루오를 비롯한 할아버지의 일본 동기들이 왜 그렇게 커다란 부채감을 가졌는지 말이다.
‘모두가 잘못된 역사에 대한 죄책감과 반성을 느끼고 계신 거였어.’
그런 이유로 하루오는 강우에게 유산을 전부 기부하겠다고 한 것이다. 올바르고 곧은 강우가 자기 뜻을 이루어주기를 바랐고, 또 강우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루오를 만나러 가야겠어.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해.”
할아버지의 말에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자신도 일본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할아버지, 마사토 아저씨 돌아갈 때 같이 들어갈 수 있게 준비해놓을게요.”
“그래, 강우야 부탁한다.”
할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랑 강우가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다들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니.”
할아버지의 말에 모두가 방을 나갔다. 최준은 할아버지의 옆을 지켰다. 할아버지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우야, 하루오의 유산을 받아 재단에서 사용하는 것은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 이건 우리 회사가 투자를 받은 거랑은 이야기가 달라.”
할아버지의 말에 강우도 동의했다. 사단법인 광복은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을 위한 일을 하는 단체였다. 자칫 일본의 자금이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흘러나간다면 좋지 않았다. 언론이라는 것은 확대하고 부풀리기를 좋아하는 법이었으니까 말이다.
“네, 알고 있어요. 그래서 편지를 본 순간부터 생각해 놓은 게 있어요.”
하지만 강우에게는 하루오의 유산을 가장 적절한 곳에 사용할 계획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최준의 눈이 빛을 발했다. 강우가 또 어떤 대단한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이윽고 강우의 입이 열렸다.
“저는 그 자금을….”
강우의 설명에 할아버지와 최준이 크게 탄성을 뱉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