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만 오라고 몸만.
한참을 정리하자 어느새 밤늦은 시간이 되었다. 활짝 열린 베란다 창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강우와 이재원이 이마에 땀을 훔치며 크게 숨을 내뱉었다.
“끝났네.”
“그러게요.”
이삿짐이야 업체 사람들이 들여놓았다고 했지만, 뒷정리할 것이 정말 많았다. 마사토 가족이 일본에서 쓰던 물건들이 항공화물로 도착한 탓이었다. 하지만 장정이 넷이니 정리까지 끄덕없었다.
“다들 너무 감사해요. 제가 밥이라도 대접해야겠어요.”
집 정리가 끝나자 료코가 밥을 차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강우가 료코를 말렸다.
“한국에서는 이사하고 나면 꼭 먹는 게 있거든요.”
료코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알겠다고 했다. 강우가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주문했다. 마사토가 또 입맛을 다셨다.
“강우야, 짜장면 시킨 거야? 탕수육도?”
“네.”
마사토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마사토의 등을 툭 하고 쳤다.
“솔직히 말해. 먹으려고 한국 이민 온 거지?”
“부정하지는 않겠어.”
마사토의 말에 아버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배달이 도착했다. 료코와 미나는 철가방에도 호기심을 드러냈다. 강우가 거실에 신문지를 깔았다.
“강우야, 식탁 있는데….”
료코가 식탁을 가리켰다. 강우가 신문지를 열심히 깔며 말했다.
“이렇게 먹어야 맛있어요.”
세팅이 끝나고 음식을 중심으로 모두가 둘러앉았다. 강우가 랩을 뜯어서 료코와 미나가 잘 보이게 내밀었다.
“지금부터 제가 짜장면을 먹는 시범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강우가 짜장면을 비벼서는 크게 한 입 먹었다. 노란 단무지까지 집어 아삭 깨물었다. 료코와 미나가 강우를 보고는 그대로 따라 했다.
후루룩. 후루룩.
거실에 면을 흡입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재원이 탕수육 포장을 뜯고 양념을 부었다.
“에헤이!”
강우가 이재원의 손을 붙잡았다.
“형, 처음부터 부먹을 강요하는 건 아니죠.”
“왜? 난 무조건 부먹이야.”
아버지도 이재원의 편에 섰다. 세 사람이 아웅다웅하자 료코와 미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가 황급히 탕수육 몇 개를 건져냈다. 그리고는 다른 접시에 옮겨 놓았다. 그리고는 료코와 미나를 바라보며 설명을 했다.
“소스에 찍어 먹는 거랑 부어 먹는 거랑 맛이 달라요. 어떤 게 입맛에 맞는지 확인해보세요.”
료코와 미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경험이 있는 마사토는 웃음을 터트렸다. 료코와 미나가 각각 부먹과 찍먹을 번갈아 먹어 보았다.
“나는 부어 먹는 게 좋네요.”
료코의 말에 이재원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미나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특히 이재원은 알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미나가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도 부어 먹는 게 좋아요.”
“예쓰!”
이재원이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아버지와 마사토가 물음표가 떠오른 눈빛으로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이재원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조용히 팔을 내렸다.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저나 마사토, 이번에 우리 여행 가는데 같이 가는 건 어때?”
“오? 여행?”
마사토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래, 직원들은 다 휴가 갔다 왔고. 얼추 업무들도 정리되어가고 그래서 말이야.”
“좋지.”
강우 가족이 지난번 계획했던 가족 여행이었다. 다만 직원들을 모두 보내고 업무도 처리하느라 스케줄이 늦어졌다. 더군다나 성수기를 피해 가는 여행이 더 좋은 강우와 아버지였다.
“어디로 갈 건데?”
“있어 동해안에 속초라고.”
“언제 가는데?”
“이번 주 금요일.”
아버지의 말에 마사토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금요일이라면 바로 며칠 후였다. 휴가라면 보통 몇 개월을 준비하는 성격의 마사토였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다. 아버지가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뭘 걱정해. 몸만 오라고 몸만.”
“그…. 그럴까?”
마사토가 료코와 미나에게 의향을 물었다. 료코 역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도요.”
미나는 신이 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와 마사토의 영어 대화를 듣던 이재원이 눈을 빛냈다. 그리고는 강우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받은 강우가 픽하고 웃어버렸다.
* * *
따가운 햇볕이 들어오는 창밖에는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절정에 이르렀다. 침대 위에는 강우와 강용이가 누워있었다. 두 사람의 앞쪽으로는 선풍기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강용이가 벌떡 일어났다.
“아침이다!”
강용이가 커튼을 촤악 걷었다. 그리고는 강우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형아, 빨리 일어나 여행 가야지!!”
“으음….”
강우가 눈을 뜨더니 피식 웃었다. 강우의 얼굴 위로 잔뜩 상기된 강용이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모습에 강우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좋아?”
“응. 다른 친구들은 다 여름 여행 갔다 왔대!”
“그래?”
한참 친구들의 행동에 민감한 나이였다. 여름 내내 우리도 놀러 가자고 노래를 부른 강용이었다. 이제 개학을 며칠 앞둔 상황에서 여행을 가게 됐으니 신이 난 게 당연했다.
“짐은 다 쌌어?”
“응응.”
강용이가 자신의 여행 가방을 낑낑대며 들고 왔다. 몸통만 한 여행 가방을 보며 강우가 피식 웃었다. 어젯밤 짐을 싸면서 강우는 강용이와 한참을 실랑이를 벌였다. 담으려는 자와 덜려는 자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강용아, 어차피 2박 3일인데 짐을 조금 덜어.”
“아니야. 준비는 철저히 하라고 했어.”
강우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 보면 미래의 기억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강용이의 꼼꼼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여행이라도 가려고 하면 자신이 사용할 것을 매우 꼼꼼히 챙기고는 했다. 양말도 옷도 속옷도 잔뜩 담긴 가방은 금세라도 터질듯했다.
“그래, 대신 네가 들어.”
“응.”
반면 강우의 가방은 단순 그 자체였다. 딱 필요한 것만 담은 가방은 크기는 커도 강용이의 가방에 비해 훨씬 홀쭉했다.
덜컥.
방문을 열고 나가자 거실에도 여행의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부지런한 할아버지와 최준은 완전무장을 한 채 거실에 앉아있었다.
“일어들 났구나.”
“안녕히 주무셨어요.”
꾸벅 아침 인사를 한 강우와 강용이가 동시에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깨끗이 샤워를 하고 나왔다.
“다들 준비됐지?”
아버지와 어머니도 준비를 끝마쳤다. 아버지는 반바지에 화려한 무늬의 하와이안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머니는 푸른색 원피스에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멋졌고 어머니는 눈에 띄게 아름다웠다.
“자 다들 기다리겠어. 빨리 내려가자.”
할아버지와 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 가족이 집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강우나 남아 집을 단속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일 층에 도착한 강우가 피식 웃었다.
“자자! 다들 빨리빨리 타세요.”
어느새 도착한 이재원의 뒤쪽으로는 커다란 관광버스가 서 있었다. 이번 여행의 스케일을 짐작게 하는 이동 수단이었다. 관광버스로 할아버지와 최준이 먼저 올라탔다. 뒤를 이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버스로 올라갔다.
“나는 나중에 탈래.”
강용이는 신이 나서 주차장을 뛰어다녔다. 강우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아파트 주민 몇몇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 관광버스가 출몰했으니 그럴만했다.
“강우야!”
이윽고 가까이 사는 마사토 가족이 나타났다. 마사토는 약속이나 한 듯 아버지와 비슷한 복장이었다. 료코도 어머니와 말을 맞췄는지 원피스에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미나는 청바지에 반소매를 입은 수수한 차림이었다.
“미나야!”
이재원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누나아!”
강용이가 미나에게 달려가 폭 안겼다. 이재원이 쩝 하는 소리를 내며 아쉬워했다.
“누나, 우리 오늘 놀러 가서 재미있게 놀아요.”
“그래, 강용아.”
마사토 가족이 버스에 올라탔다. 다음으로는 이나은이 나타났다. 하늘하늘한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이나은이 나타나자 주변의 이목이 쏠렸다.
“나은아!”
이번에는 강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대번에 달려가 이나은의 가방을 들어주었다. 이나은의 뒤로는 나은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그래, 강우야. 초대해줘서 고맙다.”
나은 어머니는 강우가 이뻐 죽겠나 보다. 강우의 손을 덥석 잡고는 연신 미소를 지었다. 그때, 나은 어머니의 뒤쪽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흠흠….”
강우가 움찔하며 꾸벅 인사를 했다. 이나은의 옆쪽으로 건장한 체구에 강한 인상의 남성이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박강우입니다.”
“나은이 아비다. 만나서 반갑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성의 정체는 이나은의 아버지였다. 나은 아버지가 강우를 향해 손을 척 하고 내밀었다. 강우가 나은 아버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억세고 두꺼운 손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은 아버지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나도 힘이라면 지지 않는데.’
강우가 슬쩍 마주 힘을 주었다. 나은 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는 강우를 자세히 살폈다. 건장한 체격에 훤칠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은 아버지의 마음이 순간 녹아내렸다.
‘이거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는 놈이군’
나은 아버지에게 이나은은 장중 보옥 이상의 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미모면 미모 총명함이면 총명함이 두각을 나타내던 딸이었다. 주변에서 며느리로 삼고 싶다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었다. 이나은에게 반해서 집까지 쫓아오는 남자 놈들을 쫓아낸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음…. 마음에 드는군.”
나은 아버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강우가 화들짝 놀라며 꾸벅 인사를 했다.
“가…. 감사합니다.”
“흠흠….”
그때였다. 차에서 아버지가 내려 강우에게 다가왔다. 분위기를 단번에 파악한 아버지가 나은 아버지를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이고~ 나은 아버지이십니까? 저는 강우 아비입니다. 이거 나은이가 누굴 닮아서 예쁜가 했더니 아주 훤칠하십니다.”
“안녕하십니까? 강우 아버지.”
아버지와 나은 아버지가 인사를 나누었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던 때였다. 차에서 할아버지까지 지원군으로 합류했다.
“안녕하신가?”
할아버지가 나타나자 나은 아버지가 화들짝 놀라며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존경합니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나은 아버지의 외침에 이나은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나은 어머니는 고개까지 돌리며 웃었다.
“어때 내 손자 강우가 마음에 들지?”
“네, 어르신!”
나은 아버지가 멋쩍게 웃었다. 사실 첫인상부터 통과였으니까 말이다. 남자답고 듬직하고 예의까지 바르고 어디 가서 강우 같은 남자를 볼 수 있겠는가 싶었다.
“그래그래, 여행에 와주어서 고맙네.”
“아닙니다. 우리 가족을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은 아버지가 순한 양이 되었다. 강우가 그런 할아버지와 나은 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할아버지가 이상할 정도로 나은 아버지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이나은 가족이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이 또 시끌시끌해졌다. 강우와 이재원은 버스에 타지 않고 또 누군가를 기다렸다.
“강우야!!!”
멀리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강우의 표정이 또 환해지며 손을 흔들었다. 멀리서 친구들과 친구들의 가족이 우르르 나타났다.
“이제 다 온 건가?”
이재원이 씩 웃으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처음 강우 가족 여행으로 시작된 여행은 이제 그 스케일이 커져 있었다. 강우 가족의 여행계획을 알게 된 친구들이 가족들에게 일정을 맞추자고 한 탓이었다. 하지만 아직 모두가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이요. 두 분 더 오실 겁니다.”
“설마?”
강우가 씩 웃는 순간 멀리서 택시 한 대가 나타났다.
스르륵.
관광버스 앞에 멈추어선 택시 문이 열리고 하루오와 기무라가 나타났다. 두 사람이 강우를 보고는 멋쩍게 웃었다.
“이거 우리까지 합류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강우가 흐뭇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국에 오셨으니까 관광도 하고 가셔야죠. 다들 환영할 겁니다.”
“그래, 고맙다.”
강우의 말에 하루오와 기무라가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쪽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 좋네. 이게 여행이지.’
늘어난 일행만큼 어쩐지 시끌벅적하고 유쾌한 여행이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관광버스가 가득 찼다.
“자자! 제1회 친목 여행을 출발합니다!!!”
아버지의 선언과 함께 관광버스 안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버스 기사가 버스를 출발시켰다. 목적지는 강원도 속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