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402)

나 좀 한 번만 살려줘라.

사무실에 강우와 마사토가 출근했다. 집이 가깝기도 했고, 아직 한국 지리에 익숙지 않은 마사토였다.

“아저씨 방은 이쪽이에요.”

강우가 마사토가 사용할 방으로 안내했다. 동양 무역의 이사 직함을 가진 마사토였다. 개인 방은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오? 이거 내 방이 너무 크고 좋은 거 아닌가?”

“우리 회사 일본 사업부를 총괄하실 이사님인데 당연한 대우입니다.”

마사토가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방 안에 있는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어르신들은 호텔 생활 안 불편하시려나?”

“제일 좋은 방이라서 괜찮으실 거예요.”

하루오와 기무라는 일정을 훌쩍 넘기고도 한국에 남아있었다. 할아버지와 최준과 지내는 하루하루가 너무 즐겁고 좋다는 이유였다. 급기야 강우가 일본을 방문하려던 일정도 바뀌었다.

“변호사들이 한국으로 온다고 했으니까. 잘됐지?”

“그렇긴 한데. 설마 저 때문에 일본에 안 가고 계시는 건 아니겠죠?”

강우가 바쁜 자신을 위해 한국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했다. 마사토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건 아닐 거야. 그리고 그렇다고 해도 어르신들이 어련히 알아서 판단하셨겠니?”

“네, 맞아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때였다.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강우의 말에 사무실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김지숙 과장이 나타났다. 김지숙 과장이 능숙한 일본어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마사토 이사님.”

“오? 지숙 과장. 오랜만입니다.”

마사토가 반가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일본 김치 사업을 함께한 전우 같은 존재였다. 다만 한국과 일본에 있어 자주 보지는 못했을 뿐이었다. 그런 마사토가 한국에 왔으니 반가울 수밖에 없는 김지숙 과장이었다.

“앉아요.”

“네.”

마사토가 자리를 권하자 김지숙 과장이 맞은편에 앉았다. 일벌레 김지숙 과장이 곧장 업무 이야기를 꺼냈다.

“제2 공장 완공일에 맞춰서 일부 생산량을 그쪽으로 돌리는 건 일정표가 다 짜였습니다. 그리고 유통망 문제는 일본에 있는 카이토 부장님이랑 계속 연락하고 있습니다.”

“나도 한국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왔어. 앞으로 카이토랑은 내가 연락할 테니까. 지숙 과장은 이제 김 사업 쪽에 집중해주기 바라.”

카이토는 하루오의 친척 중 한 명이었다.

‘사촌 동생 쪽의 손자뻘이라고 했었지.’

할아버지와 하루오의 이야기를 알게 된 카이토가 큰 관심을 드러냈고, 자진해서 일본 김치공장을 돕겠다고 나섰다고 했다. 명문가인 하루오 가문의 후손답게 인재라고 했다. 김지숙 과장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사님. 이제 한국에 계시니 업무적으로 더 소통할 수 있어서 좋을 거 같아요.”

“그러게 말이야. 아 참. 내가 한국어도 열심히 공부할 테니까 나중에는 한국어로 대화하자고.”

“정말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고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아침 회의 끝났죠? 이사님 새로 오셨으니까 모여서 인사라도 나눠요.”

“네, 이사님.”

김지숙 과장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마사토가 옷매무새를 다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의 웃음기 가득한 표정과는 완전히 다른 진지한 표정이었다.

덜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사무실 가득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와 마사토 이사입니다. 동양 무역에서 일본 쪽 사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직 한국어가 서툽니다. 가능한 영어와 일본어로 당분간 소통하겠습니다.”

강우가 마사토의 말을 번역해 주었다. 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영의 손뼉을 쳤다. 그렇게 간단한 인사가 끝났다. 마사토가 인사를 한다고 직원들의 시간을 뺏는 것은 실례라고 했다. 그렇게 첫인사를 마치고 마사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있다가 점심때 봬요.”

“오? 점심? 오늘 칼국수 가는 거 맞지?”

역시 면이라면 어쩔 줄을 모르는 마사토다웠다. 강우가 입꼬리를 실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곱빼기로 시켜드릴게요.”

“좋아.”

마사토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강우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책상 위에 수많은 결재 서류가 올라와 있었다. 강우가 자리에 앉아 서류를 하나씩 펼쳐보았다.

‘아버지는 이걸 전부 혼자 하고 계셨던 거겠지.’

동양 무역은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중소기업의 크기에 불과했다. 내실이 튼튼한 기업이었지만, 아직 체계가 덜 잡힌 상태였다. 대부분 중요 업무는 아버지의 손을 거쳐 가야 했다. 경험 많은 황규범 부장이 손을 거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음…. 임원직으로 좀 뽑아야 하나?’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임원은 회사의 민감한 부분을 결정해야 하는 자리였다. 아무나 뽑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분간은 내가 해야지 뭐.’

아버지도 했는데 강우라고 못 할 일이 아니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사용하면 될 것이었다. 사실 신체 능력이 좋아진 이후로 긴 시간 잠을 자지 않아도 크게 피로감을 못 느끼는 강우였다.

사라락. 사라락.

강우는 열심히 서류를 검토했다. 김 사업에 탄력이 붙기 시작하면서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그중에서 특히 강우의 시선이 끌리는 곳이 있었다. 바로 가공업체들과의 투자협약서였다.

‘3곳 모두 세부 조율까지 끝났군.’

강우가 인터폰으로 강종민 과장을 연결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이사님. 지금 강종민 과장님 자리 비우셨습니다.-

“아…. 맞다. 오늘 가공업체 미팅 가셨죠?”

-네, 이사님.-

“알겠습니다.”

강우가 인터폰을 끊고는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강종민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가고 강종민 과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이사님. 강종민 과장입니다.-

존대하는 거 보니 업체 사람들과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미팅 중이세요?”

-네, 십 분 정도 있다가 끝날 거 같습니다.-

“그럼 그때, 다시 연락해 주세요.”

-네.-

통화가 끝나고 강우가 다시 서류를 점검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우가 서류에 집중한 채 전화를 받았다.

“네, 과장님.”

-과장? 누가 과장이야?-

휴대전화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강우가 서류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시죠?”

-박강우 핸드폰 맞지?-

대뜸 이어지는 상대방의 반말에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누구시냐고 먼저 물었습니다.”

-아…. 나 재원이 형이다.-

강우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말투를 보아하니 이재원의 둘째 형인 이재중이 분명했다. 강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핸드폰 번호는 어떻게 아셨죠?”

-우리 그룹 팀장 연락처야 사내 연락망에 나와 있으니까 알았지.-

강우가 ‘아….’ 하고 헛숨을 뱉어냈다. 사내에 비상 연락망에서 강우의 연락처를 알아낸 것이다. 강우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재원을 괴롭힌 사람은 자신의 적이나 다름없었다.

“무슨 용무로 전화하셨습니까? 사장님은 저랑 업무적으로 연관이 없으실 텐데요.”

이재원의 둘째 형인 이재중은 본인이 앞장서서 인수한 건설사를 맡고 있었다. 적자투성이에 무너져 가는 건설 회사는 그룹에서 조만간 분리될 것이라는 말이 돌고 있었다. 이재중은 그야말로 끈 떨어진 연이었다.

‘그나마 첫째 형은 출판사라도 꽉 잡고 있지.’

이철금 회장이 이재원을 후계자로 선언한 이후 첫째 형은 의외로 백기를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진 그룹에서 이철금 회장의 말은 곧 법이고 진리였다. 거역할 수 없는 아버지의 선언에 조용히 자신의 밥그릇이라도 챙긴 것이다. 그리고 이재원은 그런 첫째 형을 어찌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요즘 자주 만나서 사업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했지.’

문제는 바로 꼴통 중의 꼴통 둘째였다. 무너져 가는 건설사를 붙잡고 땅속 저 깊은 곳으로 몰락하는 중이었다. 그런 이재중이 강우에게 먼저 연락을 한 것이었다. 딱히 어떤 업무적인 접점이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그…. 나 지금 너희 회사 앞인데 잠깐 내려올 수 있나? 마침 회사 건물 일 층에 카페가 있더라.-

끝까지 마이페이스인 이재중이었다. 강우가 단박에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진짜 바빠서요.”

-알겠어! 그럼 내가 올라간다. 잠깐만 시간을 좀 내줄 수 있지?-

“네?”

대답할 시간도 없이 통화가 끊어졌다. 강우가 핸드폰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나를 볼 일이 뭐가 있다는 거지?’

그때, 강우의 핸드폰이 또 울렸다. 이번에는 강종민 과장이 분명하리라 생각했다.

“여보세요?”

-강우야! 그 인간 지금 너한테 갔지?-

이재원의 잔뜩 흥분한 목소리였다.

“네, 지금 사무실로 올라온다는데요?”

-하아…. 진짜 내가 그러지 말라니까. 기다려 나 금세 간다.-

“형, 안 그….”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통화가 끊겼다. 그와 동시에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박강우 이사 방이 어디입니까?”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방문을 열었다.

“이쪽입니다.”

“여~ 강우야, 오랜만이다!”

이재중이 강우를 보고 반가워하며 다가왔다.

‘뭐지? 두 번째 보는 건데?’

방 안으로 들어선 이재중이 쓱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야~ 사무실 잘 꾸며 놨네. 좋네.”

“아…. 네.”

이재중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후…. 덥다 더워. 8월 중순이 넘어갔는데 왜 이렇게 덥냐.”

괜히 말을 돌리는 이재중이었다. 강우가 말이 없자 이재중이 힐끗 강우를 바라보았다.

“앉아라. 사람 민망하게 서 있지 말고.”

“하아….”

강우가 이재중의 반대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이재중을 힐끗 바라보았다. 무언가 쫓기듯 불안한 표정이었다.

“이 건물 통째로 쓰는 건가? 한 달에 세는 얼마나 나가?”

“여기 우리 건물입니다.”

“아~”

이재중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자세를 쓱 고쳐잡았다.

“청와대에서 내 친구가 모임에 초대한 거 거절했다고 들었다.”

“보시다시피 제가 매우 바빠서요.”

강우가 결재 서류들을 힐끗 보며 말했다. 이재중이 강우의 시선을 따라가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바빠? 어차피 직원들이 다 일 처리해주잖아?”

“그래도 중요한 건 직접 검토하고 결정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강우의 말에 이재중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에 강우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왜 그렇게 회사를 말아먹는지 이제 알 거 같군.’

대충 알 거 같았다. 이재중의 힘만 탐하는 사람의 장벽에 둘러싸여 자신의 의지라고는 없는 그런 타입이 분명했다.

“그런가? 아무튼…. 모임에 한 번만 와줘라. 오면 너한테 도움이 되면 됐지. 나쁘지는 않을 거야. 무슨 나쁜 의도 있는 건 아니니까. 너 재원이랑은 매일 만나고 붙어 다니잖아? 시간 좀 내줘.”

“......”

강우가 이재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재중이 조금은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그건 생각해보죠. 그런데 그 말 하려고 찾아온 겁니까?”

강우의 담담한 말투에 이재중이 움찔했다. 그리고는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강우야, 부탁이다. 나 좀 한 번만 살려줘라.”

갑자기 자세까지 간절해지는 이재중이었다. 강우가 멍한 표정으로 이재중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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