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은혜 평생 안 잊을게.
이재중이 몸을 앞으로 쭉 뺐다. 그리고는 강우의 손을 붙잡으려 했다. 강우가 기겁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이재웅이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야, 우리 회사 부도나게 생겼어. 지금 미분양 건이랑 채무 만기일 돌아오는 공사대금들까지 있다고.”
“그걸 제가 어떻게 해결해요. 저 건설 쪽에는 아는 게 없습니다.”
이재중의 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강우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이철금 회장을 닮아 덩치도 산만 한 이재중이었다.
“아니…. 왜 갑자기 눈물을….”
“나 이번에 회사 말아먹으면 아버지가 나가 죽으라고 했단 말이야. 진짜 너 우리 아버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만나봐서 알지?”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재원과 함께 만났던 이철금 회장은 무서운 사람까지는 아니었다.
‘인상이 강해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야.’
물론 강우에게는 잘 대해 주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당신이 사고를 엄청 치고 다녔는지도 모르지.’
강우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회장님이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죠. 애초에 문제가 많은 건설사라는 건 조금만 조사해봐도 알았을 텐데 실적에 눈이 멀어서 무턱대고 인수한 건 이재중 사장님이.”
강우가 존칭을 붙이자 이재중이 대번에 입을 열었다.
“형이라고 불러.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저희 띠동갑 아닌가요?”
강우의 말에 이재중이 손을 황급히 저었다.
“그 정도는 나이 차이 나는 거도 아니지!”
“아무튼, 재중 형이 잘 못 하신 건 맞죠.”
정말 입에 안 붙는 형이라는 호칭이었다. 이재중의 얼굴이 말 그대로 흙빛이 되었다.
“내 측근들이 분명히 건실하고 장래가 밝은 회사라고 했다고. 난 그거만 믿고 밀어붙인 거뿐이고.”
“그 사람들이 지금도 형 곁에 있나요?”
이재중의 얼굴에 씁쓸함이 떠올랐다. 자신을 후계자로 밀며 온갖 아부를 떨던 사람들. 건설 회사를 인수해 대박을 터트리면 확실히 아버지의 눈도장을 찍을 거라던 사람들.
“아니, 전부 없다. 다들 퇴직하거나 아니면 다른 계열사로 넘어갔어.”
“하아…….”
강우가 긴숨을 뱉어내며 이재중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재중의 옆에서 온갖 아부를 하고 그 권세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고 떠나간 사람들일 것이다.
‘옆에서 부추기는 사람들이 더 나쁜 거야.’
똑똑.
그때, 문이 열리고 직원 한 명이 시원한 오렌지 주스 두 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고마워요.”
직원이 강우와 이재중의 앞에 음료를 두고는 밖으로 나갔다. 강우가 오렌지 주스를 들었다.
“일단 한잔하세요.”
“어어….”
이재중이 오렌지 주스를 들고는 강우를 힐끗 바라보았다. 오렌지 주스를 좋아한다더니 정말이었나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렌지 주스나 잔뜩 사 올 걸 그랬나.’
이재중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미간을 좁혔다. 어떻게든 강우의 환심을 사야만 했다. 그 길만이 자신이 사는 길이었다. 이제 후계자 자리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아버지의 서슬 퍼런 숙청을 피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재중이 생각하기에 유일한 동아줄은 강우였다.
“음…. 그러니까 건설 회사를 살려만 달라는 거죠?”
“맞아.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아. 제발 살려만 주라.”
이재중이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재중을 보며 강우가 속으로 웃었다. 사실 용산역 개발 사업권을 따고 복합 멀티플렉스를 지을 계획이 있는 강우였다. 대진 그룹의 계열사 중 건설사가 있어야 했다. 다만 이재중이 사장으로 있고, 상황도 좋지 않아 다른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알아서 넝쿨째 굴러들어오네.’
그것도 백기를 번쩍 든 채로 말이다. 강우가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려 잡으며 말했다.
“음…. 뭐 재원이 형을 봐서라도 제가 한번….”
그 순간이었다. 방문이 벌컥 열리고 이재원이 나타났다. 잔뜩 화가 난 이재원이 이재중을 향해 소리쳤다.
“형!”
“재…. 재원아!”
이재중의 얼굴이 한층 더 흙빛이 되었다. 강우가 그런 이재원을 보며 픽하고 웃었다.
‘저 형 진짜 화났나 보네.’
* * *
강우와 이재원 그리고 이재중이 탁자를 마주 두고 앉아있었다. 이재원이 등장하자 이재중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쪼그라들었다.
“형, 제가 강우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죠?”
이재원의 말에 이재중이 움찔했다. 그리고는 앞에 놓인 시원한 음료를 벌컥 마셨다. 그리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어떡하냐? 건설사 이대로 가다가 부도나게 생겼다고. 아무리 미운털이라고 해도 같은 그룹 계열사인데 부도는 아니지 않냐?”
“그러니까 내가 진작에 인수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건 강우도 말렸던 거라고요.”
“그렇지. 강우가 진작에 미래를 내다 본거지.”
이재중의 말에 강우가 움찔했다.
“아무튼, 강우 요즘 바쁘니까 형이 알아서 하세요.”
“재원아!”
이재원이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이재중이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아직도 그렇게 싫으냐?”
“아니요.”
이재원은 아니라고는 했지만, 표정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그래, 내가 너 처음에 많이 미워하고 욕하고 그랬지. 그런데 바꿔 생각해봐라. 나도 얼마나 당황했겠냐.”
“......”
이재원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재중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뭐…. 인제 와서 그런 이야기가 뭐 필요하겠냐. 내 성격 개차반인 거 나도 알고 그래서 너한테 심했다는 거 안다.”
이재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죽든 살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신경 쓰지 마라.”
강우와 이재원의 눈이 그 순간 마주쳤다. 강우가 물끄러미 이재원을 보며 눈빛을 보냈다. 이재원이 버럭 성질을 냈다.
“알았어! 알았어!”
이재원이 이재중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앉아봐요.”
“재원아!”
이재중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잘 들어요. 형이 이뻐서 그러는 게 아니고 그룹을 생각해서 그리고 강우 봐서 한번 넘어가 주는 거예요. 다음부터는 절대 그룹에 손해 가는 행동 하지 마세요. 알겠죠?”
“그래, 맹세하마. 이번 한 번만 도와주면 얌전히 지낼게.”
이재중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이철금 회장의 성격상 내쳐진다면 그야말로 완벽히 내쳐질 것이었다. 재벌로 화려한 삶을 살았던 이재중에게는 끔찍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무조건 강우와 이재원에게 붙어야 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강우야, 미안하다. 나까지도 모자라서 우리 형까지.”
강우가 씩 웃고는 이재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먼저 건설사에 대한 모든 업무 권한은 지금 즉시 그룹 전략 지원팀에 이양합니다. 그리고 재무 상황부터 시작해서 공사 현황 그리고 하도급업체들 리스트까지 전부 넘겨주세요. 아 그리고 당분간 절대 간섭하기 없습니다.”
“그…. 그래.”
이재중이 조금은 당황했다. 강우가 말하는 것은 건설사를 통째로 넘기라는 것이었다.
“왜요? 망설여져요? 그럼 취소.”
이재원이 말에 이재중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니야! 절대 그런 거 아니야.”
“사장직은 뺏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강우의 말에 이재중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허울뿐인 사장이면 어떤가 강우라면 분명히 건설사에 호흡기를 달아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몰래 알아본 강우는 그야말로 대단한 존재였다. 대진 그룹을 순식간에 다른 체질로 바꾸어 놓았고, 나날이 성장하게 하고 있었다.
“고마워. 진짜 고마워. 이 은혜 평생 안 잊을게.”
“은혜까지는 모르겠고요. 앞으로 재원이 형한테나 잘 대해 주세요.”
이재중이 이재원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동안 미안했다. 앞으로 형 노릇 잘할게.”
“네, 저도 조금 까칠했던 거 미안해요.”
두 형제가 서로를 보며 남은 감정을 녹여냈다. 강우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흐뭇해했다.
‘그래, 핏줄이 반은 달라도 형제는 형제고 가족은 가족이지.’
그때, 이재원이 물었다.
“강우야, 내가 얼핏 알기로는 건설사 사정이 진짜 안 좋아. 어떻게 살릴 생각이야?”
“나도 궁금하다.”
이재중도 큰 호기심을 드러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형 용산역 사업건 있잖아요.”
이재원이 입을 벌리며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했다.
“역시, 넌 무서운 놈이야.”
“용산? 거기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이재중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강우와 이재원이 서로를 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용산에 거대 복합 멀티플렉스를 짓겠다는 계획은 강우가 이재원에게 말한 일이었다.
꼬르륵.
그때였다. 이재중의 배에서 배꼽시계가 작동했다. 이재중이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사실은 요즘 너무 힘들어서 밥을 잘 먹지도 못했어. 그런데 오늘 갑자기 식욕이 도내. 다들 배 안 고프냐?”
이재중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점심 먹으러 가죠.”
“오케이.”
이재원이 단번에 좋다고 했다. 이재중이 이때다 싶어 말했다.
“그래, 오늘 점심은 내가 살게. 뭐 먹고 싶어? 어디 근사한 레스토랑이라도 갈까? 아니면 내가 잘 아는 호텔…….”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칼국수 먹을 수 있죠? 근처에 끝내주는 맛집 있어요. 거기로 가죠.”
“칼국수?”
이재중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강우의 말이니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강우가 마사토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문을 열고 들어간 강우가 마사토에게 말했다.
“아저씨, 저 중요한 손님이 와서요. 점심은 지숙 과장이랑 드세요.”
“그래? 알겠어. 잘 다녀와.”
“네, 칼국수는 내일 먹으러 가요.”
“좋지.”
강우가 마사토의 방을 나왔다. 강우와 이재원 그리고 이재중이 근처의 칼국수 집으로 향했다.
“여기가 맛집이라고?”
이재중이 영 미덥지 않은 듯했다. 오늘 밥을 살 생각이었으니 이왕이면 비싸고 호화로운 데로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강우와 이재원은 망설임 없이 가게로 들어섰다.
“음…. 맛이 있나?”
이재중이 두 사람을 따라 가게로 들어섰다.
“여기 칼국수 세 개 주세요.”
“하나는 곱빼기요.”
이재원이 곱빼기를 시키고는 입맛을 다셨다. 이재중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주문한 칼국수가 나왔다.
“김치 올려서 먹어봐요. 진짜 맛있으니까.”
이재원의 조언에 이재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김치를 올려 후루룩 면을 먹어 보았다.
“어?”
이재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안 가득 퍼지는 짭조름한 맛이 일품이었다. 이재중이 정신없이 면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강우와 이재원이 그 모습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사람 입맛이라는 게 다 똑같다고 생각했다.
“흠흠…. 내가 오늘 종일 굶어서….”
두 사람의 시선을 느낀 이재중이 민망한 듯 말했다. 강우와 이재원이 픽하고 웃더니 칼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이재중이 김치를 하나 집어서 이재원의 칼국수 위에 놓아주었다. 이재원이 순간 멈칫하며 이재중을 바라보았다.
“아니…. 김치랑 먹으니까 맛있더라고.”
“전 김치보다는 단무지가 좋은데요?”
이재원의 말에 이재중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재원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더니 이재중이 올려준 김치와 함께 후루룩 면을 삼켰다. 입안 가득 면을 오물거리던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형이 준 김치랑 먹으니 맛이 나쁘지는 않네요. 우리 앞으로 종종 같이 밥도 먹고 그래요.”
“그…. 그래. 좋지.”
이재중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강우가 그런 두 형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관계의 회복이라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작은 계기와 서로 조금의 이해가 있다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 형제끼리 잘 지내야 복이 들어오지.’
강우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칼국수를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