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183/402)

그때 눈치를 챘지.

딸랑.

카페의 문이 열리고 찬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문 근처에 있던 손님들이 몸을 살짝 떨며 입구를 바라보았다. 입구에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박광웅이 서 있었다. 두꺼운 점퍼를 입은 박광웅의 덩치는 두 배는 커 보였다. 더군다나 색도 짙은 갈색이라 곰의 모습 그 자체였다.

“어디지?”

박광웅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추위가 덜 가신 탓일까? 박광웅의 양 볼은 붉었고, 숨을 쉴 때는 옅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여기다.”

카페의 한쪽 구석에 먼저 앉아있던 강우가 손을 흔들었다. 박광웅이 강우를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등 뒤에 메고 있던 가방을 풀었다.

쿵.

탁자 위에 올려진 가방에서 묵직한 소리가 났다. 터질 듯이 부풀어있는 가방에는 그동안 공부했던 참고서가 가득했다.

“가져오라는 거 다 가져왔어. 그리고 오늘 일요일이라 쉬는 날일 텐데 미안하다.”

“아니야. 상관없어. 앉아.”

강우가 가방을 열어 참고서들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참고서마다 박광웅의 손때가 진하게 묻어있었다. 몇 번이고 참고서를 봤는지 겉표지가 낡은 것투성이였다.

“너 엄살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공부 엄청 열심히 한 거 같은데?”

“아니야. 그냥 여러 번 보기만 했지. 이해하기 어려웠어.”

박광웅의 말이 맞았다. 사실 학교 수업은 참 중요했다. 아무리 사교육이 판을 치는 한국 입시제도라지만, 학교 수업은 기본 중의 기본을 깔아주는 것이었다. 그런 학교 수업을 3년이나 내다 버리다시피 한 박광웅이었다. 혼자서 고등과정을 이해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재수 학원에 다녔다고 해도 부족한 건 맞지.’

강우가 생각을 정리하고는 박광웅에게 물었다.

“너 이번에 몇 점 목표로 하고 있어?”

“나? 이백 점 중후반?”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팔짱을 꼈다. 그 정도 점수라면 4년제 서울 내 대학은 무리였다. 특히 내신이 엉망인 박광웅의 경우는 더 그랬다.

“음…. 알겠어. 그럼 일단 자신 있는 과목은 뭐야?”

“언어 영역이랑 사탐 쪽?”

박광웅이 점점 쪼그라들 듯 말했다. 사실 기초가 튼튼해야 할 수학은 포기상태나 다름없었다.

“알겠어. 그럼 내가 기출문제랑 출제 예상 문제 위주로 짚어서 정리 도와줄 테니까 기다려봐.”

“어어….”

강우가 박광웅의 참고서를 빠르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참고서에는 수능에 그대로 나올 예상 문제도 있었다. 강우는 그 문제들에 붉은색으로 별표를 그려주었다.

“일단 이거는 내가 볼 때 그대로 나올 확률이 높은 문제들이야. 이건 꼭 외워서 가든지 해라.”

“어어….”

강우가 이번에는 이번 수능에 나올 문제와 최대한 비슷한 유형의 문제들을 뽑아 주었다. 그리고 파란색으로 별표를 그려주었다.

“이거는 이번에 나올 수능 문제들이랑 비슷한 유형의 문제들이야. 이것도 여러 번 봐서 숙지하고 가.”

“어, 알겠어.”

강우의 설명과 정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박광웅의 얼굴은 멍해졌다.

“그런데 강우야.”

“어?”

강우가 문제집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답했다.

“너는 어떻게 이런 걸 다 아는 거야? 진짜 너무 신기해서 그래.”

“아….”

강우가 움찔하며 책을 내려놓았다. 친구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에 예정했던 것보다 꼼꼼하게 문제를 짚어주고 말았다.

“그냥 알아.”

“아….”

박광웅이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강우가 안다면 아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최소한 박광웅에게 강우는 그런 존재였다. 그렇게 강우의 1:1 집중 과외가 이어졌다. 박광웅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으면 강우에게 물었다. 강우는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주었다.

“강우 너는 학원강사 했어도 잘했겠다. 설명이 귀에 쏙쏙 박히네.”

“다행이네.”

박광웅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다짐하듯 입을 열었다.

“강우야, 나중에 우리 지혜도 공부하는 거 한번 봐주라.”

“그래.”

박광웅의 부탁에 강우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박광웅이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역시 동생이라면 끔찍이 챙기는 박광웅이었다.

“그런데 강우야.”

“어?”

박광웅이 의자를 앞으로 당기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아무래도 지혜가 좋아하는 남자가 생긴 거 같아.”

“어어?!”

강우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박광웅은 그런 강우의 모습에 확신이 섰다.

“지혜가 아무래도 재식이를 좋아하는 거 같아.”

“.....”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박광웅이 말을 이어갔다.

“사실 얼마 전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다. 지혜가 재식이 좋아하는 거.”

“그…. 그래? 어떻게?”

박광웅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혜가 먹을 거 양보하는 남자는 세상에 딱 둘이야. 나랑 우리 아버지. 그런데 예전부터 이상하게 재식이를 못 먹여서 안달이더라고. 그때 눈치를 챘지.”

“그랬구나.”

박광웅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아마 다른 애들은 모를 거야. 나야 오빠니까 금세 파악했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당분간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줘.”

“그…. 그래.”

강우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참 대단한 눈치구나 싶었다. 남재식과 박지혜가 그렇게 티를 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또 이런 게 박광웅의 매력이 아닐까 싶었다. 곰같이 둔하기는 했지만, 또 우직한 면도 있었다.

“그럼 공부 마저 하자. 너도 빨리 가서 쉬어야지.”

“아직 시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두 사람은 다시 마지막 정리를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수능에 나올 문제들의 정리가 끝났다. 박광웅이 크게 기지개를 켜며 신음을 뱉어냈다.

“으아…. 고생했다. 내가 밥이라도 살게.”

“그래? 그럼 집 근처 분식집 가자.”

박광웅이 고개를 끄덕하며 참고서를 정리했다. 홀쭉해졌던 가방이 어느새 빵빵해졌다. 그렇게 카페 밖으로 나오자 주변은 어두워져 있었다.

“지혜도 나오라고 할까?”

박광웅이 말했다. 강우가 슬쩍 물었다.

“재식이도 오라고 할까?”

박광웅이 씩 웃었다.

“그래, 좋지.”

강우가 남재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연락을 받은 남재식은 한동안 멍한 듯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괴성을 지르며 당장 달려오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박광웅의 집 근처 분식집에 도착했다. 연락을 받은 박지혜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오…. 오빠.”

박광웅을 본 박지혜는 평소와는 달리 당황한 모습이었다. 박광웅이 박지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재식이 녀석 좋은 놈이니까. 난 별걱정 안 해. 대신 너 수능 끝나고 대학생 될 때까지는 연애 금지다.”

“응! 당연하지. 나도 지금은 공부해야지.”

박지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이윽고 분식집의 문이 벌컥 열리고 남재식이 나타났다.

휙!

문이 열리자 바람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 바람에 남재식이 휘청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에 박광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뭐 좀 먹이자.”

“먹여도 안 되더라.”

강우도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자 박지혜가 두 사람을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왜요? 사람이 마를 수도 있지.”

“허? 박지혜. 너 언제는 오빠같이 튼튼한 남자가 좋다며?”

박광웅이 실소를 흘렸다, 분명 박지혜의 이상형은 덩치 크고 튼실한 남자였었다.

“그랬었지. 그런데 지금은 좀 변했어.”

박지혜의 말에 강우와 박광웅이 웃음을 터트렸다. 남재식이 멋쩍게 웃으며 박지혜의 옆에 앉으려 했다. 그러자 박광웅이 벌떡 일어나 박지혜의 옆에 앉았다.

“아…. 미안.”

남재식이 멋쩍게 웃으며 강우의 옆에 앉았다. 강우가 남재식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힘내라. 이제 일 년 남았다.”

“어.”

* * *

늦은 밤. 강우는 대학로로 차를 몰았다. 남재식과 박지혜를 보니 이나은이 보고 싶어서였다. 이나은은 지금 김세아와 같은 연극에 출연 중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안성에서 버스를 타고 곧장 대학로로 향했다. 그리고 공연을 하고 밤늦게까지 남아 연습도 했다. 그렇게 서로가 바빠진 탓에 자주 보지 못하는 요즘이었다.

부우웅.

대학로의 유료 주차장에 주차를 마친 강우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나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가도 이나은은 연락을 받지 못했다. 아마 연습 중인 듯했다.

‘그냥 극장 앞에 가서 기다려야겠네.’

강우가 발걸음을 옮겨 이나은이 공연을 하는 소극장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근처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학로의 거리로 많은 연인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강우는 두 손을 점퍼에 찔러넣고 행인들을 구경했다.

뚜르르. 뚜르르.

잠시 후, 강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덜컥 전화를 받으니 이나은이었다.

-강우야, 혹시 전화했었어?-

“어, 연습 중이야?”

-응, 전화 못 받아서 미안.-

“아니야, 나 지금 소극장 앞이야.”

강우의 말에 이나은의 목소리가 대번에 밝아졌다.

-진짜? 나 빨리 준비하고 나갈게.-

“천천히 해.”

-응, 알겠어!-

통화가 끝나고 잠시 후, 소극장의 입구에서 이나은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히 묶은 생머리에 롱코트를 입은 이나은의 모습에 주변의 시선이 대번에 쏠렸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었다.

“나은아, 여기!”

“강우야.”

이나은의 얼굴에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가 번져나갔다. 이나은이 강우의 곁으로 단숨에 다가왔다. 그리고는 강우의 팔짱을 와락 끼었다.

“공연은 잘했어? 안 힘들었고?”

“응, 잘했어. 그런데 아직 분량이 작아서 힘든 건 없어.”

강우와 이나은이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였다.

“이나은.”

소극장의 입구에서 누군가가 이나은을 불렀다. 강우의 시선이 스르륵 소극장의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 명의 남성이 있었다.

“네, 선배님.”

이나은이 남성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자 남성이 강우와 이나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슬쩍 강우를 훑어보았다.

“저번에 말한 남자친구?”

“네.”

이나은의 답에 남성이 픽 웃었다.

“아직 대학생이라고 했던가?”

“네.”

이나은의 짧은 대답이 이어졌다. 남성이 조금은 불쾌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대상을 강우에게로 옮겼다.

“안녕하세요? 나은이 극단 선배 이성욱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나은이 남자친구 박강우입니다.”

극단 선배인 이성욱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의 이름이 영 낯설지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강우가 이나은의 손을 잡았다.

“그럼 더 볼일 없으시면 가겠습니다. 다음에 뵙죠. 가자 나은아.”

“응.”

강우가 이나은의 손을 잡고 남성에게서 벗어났다.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남성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저 사람 누구야? 무슨 사람이 저렇게 예의가 없어?”

“극단 선배야. 저번부터 자꾸 이것저것 물어.”

이나은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강우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지금 벌어진 일은 굳이 설명 안 해도 뻔한 상황이었다.

‘나은이가 워낙 예쁘니까.’

이나은이 강우를 향해 물었다.

“신경 쓰이면 연극 그만둘까?”

“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왜 연극을 그만둬.”

강우가 화들짝 놀라 말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네가 싫은 건 나도 싫어.”

“괜찮아. 네가 좋은 건 나도 좋아. 너 연극 시작하고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데 열심히 해.”

강우의 말에 이나은이 감동하였다. 그런 이나은을 바라보던 강우가 눈을 빛냈다.

‘이참에 아예 나은이를 스타로 만들어버려? 저런 어중이떠중이들 못 덤비게?’

강우가 이나은을 향해 말했다.

“나은아, 너 광고 모델 한번 해볼래?”

“광고?”

이나은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응, 마침 재식이가 개발한 게임 텔레비전 광고할 건데 엘프 역할을 할 모델이 필요해.”

“에…. 엘프?”

이나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엘프라는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은 시대였다. 강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있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종족이야. 너처럼.”

강우의 말에 이나은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그리고는 작게 답했다.

“나 그거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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