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402)

할 수 있어.

건물 안 웅성거리는 복도의 한구석에 이나은이 있었다. 이나은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복도에는 자신처럼 잘 꾸미고 온 많은 여성으로 가득했다.

‘진짜 장난이 아니네….’

오늘은 JG 소프트의 신작 게임인 튀니지의 광고 모델을 뽑는 날이었다. 게임을 광고하기 위해 CF를 찍는다니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이번 기획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리고 이례적인 일인 만큼 주변의 관심이 쏠렸다. 더군다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강우가 기획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탤런트? 가수도 있네….’

한쪽에는 탤런트와 가수들이 있었다. 아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면 알만한 연예인들이었다. 앞 순서는 그들의 차지였다. 연예인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오디션장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졌다. 다행히 CF 오디션이라 그런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덜컥.

문이 열리고 오디션을 끝낸 가수 한 명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뒤를 이어 오디션을 볼 사람들을 쓱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22번 참가자 심미은 씨.”

복도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나은의 옆에 앉아있던 여성이 화들짝 놀랐다.

“딸꾹.”

여성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을 했다. 그리고는 어쩔 줄을 모르며 당황했다. 오디션을 봐야 하는데 딸꾹질이 나오니 낭패였다. 이나은이 가방에서 물을 꺼내 여성에게 내밀었다.

“숨을 참고 물 마시세요. 딸꾹질 멈출 거에요.”

“고마워요…. 딸꾹.”

이름이 호명된 여성 심미은이 물을 받으며 감동한 표정이 되었다. 연예인 지망생인 심미은은 여러 오디션을 봤었다. 심미은에게 오디션이란 남과의 치열한 경쟁이었다. 참가자들은 서로를 밟고 올라서기 위해 견제도 서슴지 않았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요. 들어가서 다 보여주고 나오세요! 응원할게요.”

이나은이 심미은을 향해 양손을 불끈 쥐었다. 심미은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 네….”

심미은이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딸꾹질도 멈춰있었다. 혼자 남은 이나은이 긴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강우를 떠올렸다. 늘 남을 돕고 정정당당한 강우를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 한창 바쁘겠지? 보고 싶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덜컥.

오디션장의 문이 열리고 심미은이 밖으로 나왔다. 이나은의 시선이 심미은에게 향했다. 바로 다음이 자신의 차례였다. 이나은과 심미은의 시선이 맞닿았다.

“고마워요. 덕분에 후회 없이 오디션을 봤어요. 이름이….”

“이나은이에요.”

“나은 씨, 꼭 오디션 잘 보기를 응원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심미은이 복도를 걸어 나갔다.

“23번 참가자 이나은 씨.”

그리고 이나은의 이름이 호명됐다. 이나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긴장감은 사라지고 강우에게 자세히 들었던 엘프의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할 수 있어.’

이나은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일렬로 앉아있는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대번에 쏠렸다.

“이나은 씨?”

그중 가운데 앉은 사람이 이나은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번 CF의 촬영감독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이나은입니다.”

이나은이 기품 있게 인사를 했다. 강우에게 배운 대로 엘프들의 인사법을 흉내를 냈다.

“오오….”

“허….”

곳곳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촬영감독 역시 대번에 탄성을 뱉어냈다. 눈앞의 이나은은 그야말로 엘프 그 자체였다. 촬영감독이 빠르게 이나은의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떠오르는 연예계의 신성인 대진 엔터테인먼트의 소속이었다.

“흠흠…. 이번 CF의 촬영대본입니다. 한번 확인하고 따라 해주실 수 있을까요?”

주변에서 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촬영대본을 보여준다는 것은 자칫 민감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나은이 굉장히 유력한 후보가 됐다는 뜻이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스태프 한 명이 이나은에게 광고 촬영대본을 가져다주었다. 이나은이 빠르게 촬영대본을 읽어보았다. 그리고 자세를 잡았다. 촬영감독의 눈에 또 이채가 서렸다. 이렇게 빠르게 촬영대본을 보고 파악을 했나 싶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이나은이 촬영대본에 나온 자세를 잡고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대사가 이어지고 도도했던 표정이 어느새 기품 넘치는 표정으로 변했다.

“와….”

촬영감독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관계자들도 멍한 표정으로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짧은 촬영대본 연기가 끝나고 이나은이 긴 숨을 뱉어냈다. 연기를 할 때면 항상 이렇게 몰입을 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 몰입 이후 찾아오는 기분이 참 좋았다.

“감사합니다.”

이나은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자 멍하게 있던 촬영감독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네네. 수고했어요.”

“네.”

촬영감독이 주변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나은 씨는 광고주가 원하던 엘프의 역할에 정말 잘 어울리는군요?”

촬영감독의 말에 관계자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 다른 목소리를 냈다. 바로 광고 기획사에서 나온 담당자였다.

“흠흠…. 그런가요? 그런데 앞쪽에서 오디션 봤던 탤런트 박주하 양도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촬영감독이 담당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담당자는 강 부장이라는 인물이었다. 즉 JG 소프트에게 이번 광고 진행을 위임받은 클라이언트라고 볼 수 있었다. 촬영감독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최종 후보군을 뽑아야 하니까요.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이나은이 몸을 돌려 오디션장을 나갔다. 이나은이 나가자 촬영감독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클라이언트 쪽에서는 박주하로 밀어붙일 모양이군.’

촬영감독의 의사보다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사람이 모델로 뽑힐 확률이 높았다. 더군다나 관계자와 인맥이 있는 사람이 광고에 뽑히는 일은 흔한 일이었고 말이다.

‘쩝…. 아쉽군…. 엘프 역할로는 딱 맞았는데.’

촬영감독이 이나은의 프로필을 내려다보았다. 최종 후보에는 뽑혔지만,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라이언트는 결국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흔한 연예계의 생리에 촬영감독도 금세 이나은에 대해 잊었다.

* * *

오디션을 보고 나오니 해는 지고 어둑해져 있었다. 짧은 광고 오디션이었지만, 진이 빠진 이나은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이나은의 앞쪽으로 연예인들을 태운 대형 밴들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아…. 강우 보고 싶다.”

이나은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멀리서 꽃을 든 강우가 짜잔 하고 나타났다.

“나은아!”

“어? 어어?”

이나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바빠서 못 온다고 하던 강우였다.

“뭐야~ 못 온다고 했잖아.”

“어? 정확히는 못 올 수도 있다고 했는데?”

강우가 씩 웃으며 이나은에게 꽃을 내밀었다. 이나은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꽃을 받아들었다.

“우리 나은이 첫 광고 오디션을 축하합니다.”

“고마워.”

강우를 보자 갑자기 힘이 나며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오디션 잘 봤어?”

“열심히는 했는데…. 모르겠어.”

“왜? 누가 우리 나은이를 이기고 엘프가 가능하다고?”

강우의 과장된 말투에 이나은이 킥하고 웃어버렸다. 역시 강우를 만나는 순간이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응, 일단 최종명단에는 올라갔대. 그래서 다음에 다시 오라고 하더라고.”

“그래? 잘될 거야.”

강우가 이나은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나은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응, 강우, 네 말이니까 믿어.”

“배고프지?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강우가 이나은의 손을 잡고 가려던 차였다. 멀리서 누군가가 강우를 알아보고 반갑게 소리쳤다.

“아이고~ 이사님!!”

강우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둑해진 주변 때문에 상대방을 잘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누구지?’

남성이 대번에 강우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제야 강우가 상대방을 알아보았다. 남재식과 함께 미팅했었던 광고 기획사의 인물이었다.

“강 부장님이셨군요. 오늘 오디션 참관하셨군요?”

“네, 이사님. 오늘 제가 참석해서 꼼꼼히 확인했습니다.”

황 부장이 강우를 향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강우의 뒤편에 있는 이나은을 힐끗 바라보았다.

“저분은….”

어둑한 주변에 모자까지 눌러쓴 이나은이었다. 강 부장이 한 번에 못 알아볼 만했다. 강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 제 여자친구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강 부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나은이 강 부장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또 봬요.”

“네? 그게 무슨….”

강 부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이나은을 자세히 확인했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떡하니 벌렸다.

“아…. 안녕하세요.”

강우가 강 부장을 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이나은을 보고 놀란 이유가 오디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강 부장이 놀란 이유가 조금은 달랐지만 말이다.

“그럼, 수고하세요. 그리고 오늘 여기서 제 여자친구를 봤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아시겠죠?”

“아…. 네네….”

강 부장이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강우가 이나은의 손을 잡았다.

“가자 나은아.”

“응, 그럼 안녕히 계세요.”

마지막까지 예의 바른 이나은이었다. 강 부장이 자기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하마터면 큰일을 저지를뻔했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강우야, 강 부장님이 많이 놀라셨나 봐. 어떡해?”

“뭐…. 괜찮을 거야. 어차피 심사 조건대로 판단할 거니까. 그리고 내가 말했지? 너 말고 누가 엘프에 어울리겠어?”

강우의 말에 이나은이 또 입을 가리며 웃었다. 두 사람은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었다.

* * *

“좋습니다! 좋아요!”

광고 촬영감독의 입이 귓가에 걸렸다. 엘프 복장을 한 눈앞의 이나은은 말 그대로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움이었다.

“자 다음 컷으로 넘어갑니다!”

촬영감독의 말에 이나은의 자세와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촬영감독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카메라에 이나은을 담았다. 그리고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건 대박이다. 내 작품 중 최고의 광고가 나오겠어.’

모든 게 완벽했다. 모델도 그리고 촬영 현장까지 말이다. 그렇게 촬영이 이어지다 잠깐의 휴식 시간이 되었다.

“아이고~ 나은 씨! 고생이 많아요.”

멀리서 클라이언트 참관자로 온 강 부장이 이나은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는 따듯한 음료를 전해주고 핫팩까지 손에 쥐여 주었다.

“아…. 네 부장님 감사합니다.”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강 부장이 두 손을 황급히 저었다.

“아이고~ 아니에요. 불편한 점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만 해요.”

“네, 감사합니다.”

강 부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촬영감독이 그런 강 부장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오디션 당일만 하더라도 탤런트 박주하를 강하게 밀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최종 선발을 하는 회의 당일에 이나은을 최종 모델로 선정하자며 급변했다.

‘나야 뭐…. 땡큐였지. 나은 씨 아니면 솔직히 다른 후보들은 다 별로였거든.’

모델이 정해지자 그야말로 뻥 뚫린 고속도로처럼 촬영이 시작됐다. 촬영감독이 이나은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분명 스타가 될 거야. 내 감은 틀린 적이 없으니까.’

그때였다.

“사장님! 이사님!”

강 부장이 또 호들갑을 떨며 한쪽으로 달려갔다. 촬영감독의 시선이 그쪽을 향해 돌아갔다. 촬영장의 입구 쪽으로 두 명의 남성이 들어오고 있었다. 연예인 뺨치는 미남자 한 명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호남형의 남성이었다.

‘사장? 이사? 아…. 설마?’

촬영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의 정체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었다. 바로 세간의 화제를 모으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이라 불리는 대진 그룹 이재원 사장과 동양 무역의 박강우 이사였다.

‘그런데 두 사람이 여길 왜?’

의문은 곧 풀렸다.

“나은아! 오늘 예쁜데?”

이재원이 이나은에게 농담을 건네며 다가갔다.

“밥은 먹었어? 안 힘들어?”

강우도 이나은을 알뜰히 살폈다.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두 사람 촬영 방해되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이나은의 말에 두 남자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강 부장은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두 사람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감독님, 촬영 마저 해요.”

이나은이 촬영감독을 향해 말했다. 촬영감독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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