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그냥 숨만 쉬는데?
민족 대명절 설날이 다가오는 2월이 되었다. 아직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신촌 거리에 강우와 이나은이 나타났다.
“으으…. 춥네.”
“나 손 잡아줘.”
이나은이 강우의 점퍼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이나은의 손을 잡았다.
“다들 도착해 있으려나?”
“우리가 제일 늦는다고 했으니까 다 모여 있겠지?”
강우와 이나은이 총총걸음으로 약속장소를 향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앞으로 익숙한 패스트푸드점이 나타났다. 강우와 이나은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얘들아!”
이나은은 특히 반가운 표정을 했다. 패스트푸드점의 이 층 창가로 친구들이 보였다. 친구들도 강우와 이나은을 발견했는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양손으로 햄버거와 콜라를 보여주며 입구를 가리켰다. 강우와 이나은이 걸음을 재촉했다.
딸랑.
문이 열리고 따듯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추위에 얼었던 몸이 금세 스르륵 녹아내렸다. 주변의 시선도 일제히 두 사람을 향했다. 특히 이나은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와….”
남자들이 멍한 표정으로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옆에 있던 여자친구에게 무릎을 꼬집히기도 했다. 강우가 빠르게 주문을 했다. 이윽고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강우가 쟁반을 들고 이나은은 음료를 따로 들었다.
“올라가자.”
“응.”
두 사람이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 층에는 김춘배와 김혜지, 신원주와 채보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민정이는?”
이나은이 김혜지에게 물었다.
“오늘 못 와. 정호한테 가야 해서.”
“응, 그렇구나.”
조민정은 연정호의 뒷바라지를 하는 중이었다. 연정호는 고시 공부를 위해 속세와의 연을 끊고 절에 들어간 상태였다. 강우와 이나은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강우가 햄버거 포장을 벗기고 감자튀김을 하나로 모으고 케첩을 뿌렸다.
“나은아, 배고프지 빨리 먹어.”
“응, 그런데 나 살찌겠어.”
이나은이 배를 만지며 말했다. 그러자 김혜지가 자신의 배를 만지며 말했다.
“나은이 네가 살이 어디 있다고.”
그러자 김춘배가 김혜지를 보며 바보같이 웃음을 흘렸다.
“혜지 너도 살이 어딨다고. 우리 혜지도 살 좀 쪄야 해.”
“추…. 춘배야.”
김혜지가 얼굴을 붉혔다. 김춘배는 헤벌쭉 웃으며 김혜지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보이지 않는 남재식에 관해 물었다.
“재식이는 왜 안 왔냐?”
“재식이? 이번에 지혜 모의고사 성적 떨어져서 비상사태야.”
“아……. 그래.”
1999년이 되며 고3이 된 박지혜였다. 본격적인 수험생이 된 것이다. 남재식은 그런 박지혜와 함께 수험 생활을 같이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하긴 광웅이가 한창 정신없을 때니까 재식이가 신경 많이 써야겠지.”
박광웅은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였다. 입학식 전부터 시작된 새내기 생활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못 온대?”
“아니, 있다가 저녁 먹을 때 합류한대.”
“지혜도 데려오라고 해. 저녁 사주게.”
“그럴까?”
김춘배가 핸드폰을 꺼내 남재식과 통화를 했다.
“그래, 알겠어. 있다가 보자 장소는 내가 문자 남겨 놓을게.”
김춘배가 통화를 끝내고는 엄지를 '척' 하고 들었다.
“오케이. 있다가 지혜 학원 끝나고 집에 바래다주고 합류한대. 그런데 재원이 형은?”
“오늘 저녁이나 먹자고 하더라.”
“그래? 오랜만에 재원이 형 얼굴 보겠네.”
대화를 마친 강우가 햄버거를 크게 베어 물었다. 단 세 입 만에 햄버거가 사라졌다.
“아니 너는 이제 먹는 것도 괴물처럼 먹냐. 그걸 세 입에 먹어?”
“어?”
강우가 배를 만지작거렸다. 요즘 들어 부쩍 먹는 양이 늘어난 강우였다.
“강우야, 더 먹을래?”
“음…. 있다가 저녁에 많이 먹지 뭐…. 그런데 요즘 왜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지 모르겠네.”
“한창 먹을 나이잖아.”
“그런가….”
이나은이 강우의 팔뚝을 만지며 말했다.
“우리 강우 몸도 엄청 튼튼해졌어. 이거 봐봐.”
김춘배가 강우의 팔뚝을 만지고는 화들짝 놀랐다.
“너 요새 운동해?”
“나? 아니 그냥 숨만 쉬는데?”
강우의 말에 이나은이 킥하고 웃었다. 김춘배는 질렸다는 표정을 했다.
“아니 누구는 근육 좀 만들어 보겠다고 그 난리를 쳐도 안 생기던데….”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원래 187이 넘는 키에 건장한 체격의 강우였다. 그런데 요즘은 힘도 더 세지고 몸도 더 좋아지고 있었다.
“너 무슨 특전사라도 갈라고 그러냐?”
김춘배가 물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특전사는 무슨….”
요즘 친구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나 군대였다. 다들 입대를 앞둔 나이가 됐으니 말이다.
“춘배, 너는 영장 아직이지?”
“어. 그런데 영장 나와도 연기해야지. 연기하려면.”
기가 막힌 라임으로 농담을 던졌다는 생각에 김춘배가 한 손으로 코를 잡으며 자존감을 높였다. 김혜지는 뭐가 그리 웃긴지 입까지 틀어막고 웃었다.
“아주 환장의 커플이구만….”
지켜보던 신원주의 타박에 김춘배가 발끈했다.
“너보다는 재밌거든?”
“난 나 재밌다고 한 적 없는데?”
신원주의 일격에 김춘배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러자 채보라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희 진짜 군대는 어쩔 거야? 연기 안 하고 갈 거야?”
“나는 꼭 갈 거야 군대.”
신원주가 다짐하듯 말했다. 사실 신원주는 어릴 적부터의 진료 기록이 남아있었다. 어렸을 적 정신과를 다니며 진료를 하고 치료도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신체검사에서 보류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신원주도 신원주의 부모님도 꼭 군대를 다녀오기를 원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남자는 군대 갔다 와야 멋있어.”
채보라가 신원주의 결정을 응원해 주었다. 그리고는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가야죠. 그런데 최대한 빨리 갔다 오고 싶어요.”
“입대 지원이라도 하려고?”
채보라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요. 빨리 갈 방법이 있죠. 해병대.”
“해병대를 간다고? 거기 엄청 힘들다고 들었는데….”
채보라의 말이 끝나자 신원주가 결심을 하듯 말했다.
“그럼 나도 해병대 시험 볼래.”
채보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해병대라 하면 힘들다는 인식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하여간 원주는 강우가 하는 거라면 다 같이하려고 한다니까? 그런데 강우는 왜 해병대 가려고 하는데?”
“그게 가장 빨리 입대하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사실 가고 싶기도 하고….”
“이왕 가는 군대 제대로 있다가 오고 싶데요.”
이나은이 말을 거들었다. 채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강우 성격이라면 그럴 만도 해. 뭐든지 대충하는 게 없으니까. 그런데 해병대 가려면 막 시험 보고 그러지 않나?”
“누나, 이 터미네이터 뺨치는 괴물이 떨어질 리가 있겠어요? 아마 해병대 가서도 특수부대 끌려갈걸요?”
김춘배의 말에 모두가 공감했다. 강우가 보여주는 신체 능력은 간혹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김춘배가 혀를 내두르며 말을 이어갔다.
“진짜 강우 혼자 부대 만들어서 전쟁 나가도 될걸요? 코만도 람보 저리 가라고 할 거야.”
“야…. 그건 좀 심했다.”
강우의 타박에 김춘배가 씩 웃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까불면 다친다.”
강우의 짐짓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김춘배가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영화 촬영에서 보여준 강우의 신들린 무술 연기가 아직도 뇌리에 생생했다.
“알겠다 친구야.”
갑자기 진지해진 김춘배의 표정에 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배우는 배우다 싶었다.
“아 참 영화 시간 아직 남았나?”
“이거 다 먹고 슬슬 가면 돼.”
김춘배가 설레는 표정이 되었다. 오늘은 김춘배가 출연한 영화가 개봉하는 날이었다. 친구들이 모두 모인 것도 영화 관람을 위해서였다.
“영화 잘되겠지?”
김춘배가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강우가 픽 웃으며 김춘배의 손을 툭 하고 때렸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흥행할 거야.”
“그렇지? 강우, 네 말을 들으니까 안심이다.”
김춘배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강우의 말은 항상 그대로 이루어지는 마법이 있었다. 김춘배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했다.
“앞으로 나 보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 많이 봐둬. 혜지 너도.”
“응.”
김혜지가 싱긋 웃었다. 김춘배가 또 헤벌쭉하며 좋아했다.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연이라도 하는 날에는 아주 난리가 나겠네. 난리가.”
“아…. 생각만 해도 설렌다.”
김춘배가 몸을 떨며 미래를 상상했다.
“그런데 강우야 나 언제부터 스케줄 잡아줄 거야?”
영화 촬영이 끝나고 김춘배는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강우가 조금 더 기다려 보자며 말렸다.
“기다려봐 영화 개봉하고 나면 입장이 달라질 테니까. 다음 영화는 내가 더 비중 있는 역할로 찾아볼게.”
“진짜?”
김춘배가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씩 웃으며 감자튀김을 집어 먹었다. 강우와 김춘배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나은이 햄버거를 다 먹었다.
“아~ 배부르다.”
이나은이 배를 쓰다듬었다. 김춘배가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강우를 향해 낮게 말했다.
“사람들이 나은이 쳐다보는 거 좀 봐라.”
그러더니 가방을 열었다. 가방에서 모자와 선글라스를 꺼내 강우에게 내밀었다.
“뭐야? 이건 왜 가방에 넣어 다니는 건데?”
“오늘 영화 끝나고 혹시 누가 알아볼까 봐….”
강우가 피식 웃었다. 강우가 이나은을 향해 모자와 선글라스를 내밀었다.
“나은아, 불편하면 모자랑 선글라스 쓸래?”
“그게 더 튀어 보일 거 같은데?”
이나은이 싱긋 웃었다. 그 꽃 같은 미소에 가게 안이 환해졌다. 그러자 주변 손님들이 넋이 나간 듯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강우가 움찔하더니 이나은의 머리에 모자를 푹 씌웠다.
“응?”
이나은이 강우를 보며 응?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말없이 웃으며 선글라스까지 쓰게 해주었다.
“안 되겠어. 우리 나은이 얼굴 닳겠다.”
이나은이 입을 가리며 킥하고 웃었다.
“이제 가야 할 거 같은데?”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와 친구들은 신촌 거리에 있는 영화관으로 향했다.
“와…. 여기가 이렇게 바뀌었어?”
이나은이 영화관을 보며 탄성을 뱉어냈다. 강우와 영화를 봤었던 추억이 담긴 영화관이었다. 지금은 대진 그룹이 인수해 건물을 개보수한 상태였다.
“들어가자.”
강우와 친구들이 영화관 입구로 다가갔다. 김춘배가 품에서 영화표를 꺼냈다. 배우들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영화표였다.
“우리 먹을 거 사서 들어가자.”
이나은이 영화관 안에 있는 간식들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김혜지와 채보라도 감탄을 한 듯했다. 영화관 내부에는 카페도 있었다. 그리고 잘 꾸며진 인테리어는 무척 세련되어 보였다.
“와…. 영화관 안이 예쁘네.”
“이건 급하게 리모델링만 해서 이 정도에요. 앞으로 새로 지어질 전용관들은 어마어마합니다.”
강우가 씩 웃었다. 현재 SJ 그룹과 문화 전쟁 중인 대진은 기존에 있던 유명 영화관들을 모두 사들였다. 그리고 총력을 다해 리모델링을 했다. 그리고 오늘 개봉할 영화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일제히 개관했다. 미래의 기억으로 영화가 흥행할 것을 안 강우의 묘수였다.
“그럼 먹고 싶은 거 전부 사서 들어가죠.”
강우가 품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채보라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야. 오늘은 커플 데이트니까 각자 내는 거로….”
“이거 법인카드예요.”
채보라가 표정을 돌변하더니 카드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감사. 얘들아, 강우가 이걸로 먹고 싶은 거 다 사도 된대!”
채보라를 필두로 이나은과 김혜지가 간식 코너를 휩쓸었다. 이윽고 양손 가득 먹을 것을 들고 세 여자가 나타났다.
“강우야, 고마워 잘 먹을게.”
“고마워.”
채보라와 김혜지가 고맙다고 말했다. 강우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들어가죠.”
강우와 친구들이 상영관에 들어갔다.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간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윽고 웅장한 소리와 함께 광고가 상영됐다. 광고가 끝나고 상영관이 암전됐다.
“한다.”
김춘배가 잔뜩 긴장한 표정을 했다. 김혜지가 김춘배의 손을 잡아주었다. 강우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첫 개봉 날임에도 상영관은 꽉 차 있었다.
‘홍보야 우리가 빵빵하게 했고. 사람들 반응은 걱정할 게 없고.’
강우가 김춘배를 슬쩍 바라보았다. 잔뜩 긴장한 김춘배의 얼굴을 보며 강우가 씩 웃었다. 이번 영화를 통해 김춘배의 앞날이 바뀌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