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면 좀 쉬어요.
입구를 가득 메운 기자들 앞에 강우와 이재원이 섰다.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인터뷰에 비서진들이 크게 당황했다. 이재원은 비서진들에게 괜찮다고 신호를 주었다.
“두 분 경례 자세 취해 주실 수 있습니까?!”
기자들이 강우와 이재원에게 경례를 해달라 요청했다. 강우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아직 입대도 아닌 단순한 검사를 치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못 해줄 건 또 없었다. 강우가 이재원의 옆구리를 툭 하고 쳤다.
“아…. 싫은데….”
“해줘요. 어려운 것도 아닌데.”
강우와 이재원이 경례 자세를 취했다. 미래 기억이 있는 강우는 능숙했고, 이재원은 조금 어색한 경례였다.
펑. 퍼퍼펑.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모습을 담기 위해 쉼 없이 셔터를 눌렀다. 사진 촬영이 끝나자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박강우 이사님과 이재원 사장님 정말 해병대에 자원입대하시는 겁니까?”
“두 분 정말 병역의무를 성실히 치르실 생각입니까?!”
마구 쏟아지는 질문에 강우와 이재원이 조금 난감해했다. 그러자 두 사람을 따라온 비서진들이 나섰다.
“한 분씩 지명하는 순서대로 인터뷰를 진행하겠습니다.”
기자들이 차분해졌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평소 인터뷰에 성실히 응해주기로 소문난 강우와 이재원이었다.
“먼저 오늘 시험을 본 분들부터 전부 나가신 후 진행하죠.”
강우의 말에 이재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기자들이 입구에 진을 치는 바람에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기자들이 한쪽으로 나갈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빠져나가지 못하던 사람들이 강우에게 고맙다고 하며 입구를 벗어났다. 그렇게 잠깐의 소란이 끝나고 인터뷰가 시작됐다. 먼저 포커스를 받은 것은 강우였다.
“박강우 이사님, 해병대 자원입대하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첫 질문에 강우가 답했다.
“병역의무는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이행해야 하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그리고 올해 군대에 가기로 한 만큼 가능한 한 빨리 입대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해병대는 매력적인 곳입니다. 그곳에서 제 체력과 정신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기자들이 강우의 말을 열심히 받아적기 시작했다.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다.
“박강우 이사님과 이재원 사장님이 동반 입대한다는 게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물론 둘 다 해병대에 동시에 합격한다는 가정 아래에 말이죠.”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강우와 이재원이 동반 입대라니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면 대진 그룹과 동양 무역의 업무 공백이 크게 생기는 것 아닙니까?”
“병역의무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일이니까요. 차라리 둘이 한 번에 갔다 오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동양 무역과 대진 그룹의 사업은 전부 기초를 튼튼히 해놓았습니다. 저희 둘이 없다고 안 돌아갈 곳이 아니죠.”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재원 사장님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재벌가의 병역의무 회피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범이 되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혹시 다른 재벌 2세들에게 해주실 말이 있겠습니까?”
다소 위험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재원은 씩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죠. 제가 어떤 모범을 보이기 위해 입대하는 건 아닙니다. 당연한 의무이고 강우가 간다길래 같이 가는 겁니다.”
단순하고 이재원다운 답이었다. 강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자들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재원의 이런 인터뷰 스타일은 잘 알려져 있기도 했다. 기자들이 빠르게 이재원의 말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번쩍이는 게 특종이다 싶었나 보다.
“다음 질문받겠습니다.”
이후 여러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강우는 입대에 관련된 질문만 받기로 했다. 강우와 이재원의 뒤로도 체력검사와 면접 일정이 더 남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인터뷰가 모두 끝났다.
스르륵.
고급 세단이 강우와 이재원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이 차에 타서는 긴 숨을 뱉어냈다. 특히 이재원은 시트에 몸을 깊게 묻었다.
“강우야, 나 완전 방전이다. 당분간 좀 쉴까 봐.”
“힘들면 좀 쉬어요.”
이재원이 강우를 힐끗 바라보았다.
“넌 안 힘드냐?”
“저요? 음…. 별로요?”
“참….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넌 대단해. 체력도 정신력도.”
강우가 이재원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이재원의 인생도 그야말로 격변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 어린 이재원이었다. 강우야 미래의 기억으로 성숙한 정신력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형, 내가 예전에 해준 말 기억하죠?”
“기억하지.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이 남들은 그리 원해 마지않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즐기라고.”
“맞아요. 그렇다고 너무 꾹꾹 누르고 참지 말아요.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돼요.”
“너 말고는 내색하기가 싫어.”
이재원이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 이재원이 가지고 있는 삶의 원동력은 복수심이었다. 그런 이재원이 강우를 만나고 가족의 의미를 깨닫고 점점 그 마음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가끔 찾아오는 옛 상처에 대한 고민까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잘하고 있어요. 내가 옆에서 계속 도와줄게요.”
“고맙다. 동생아.”
강우가 말없이 이재원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이재원이 씩 웃고는 두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재원이 형네 집으로요.”
김 기사가 알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강우를 보며 고마운 표정을 지었다. 이재원에게 강우는 든든한 가림막이자 어두운 길을 밝혀준 등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어디까지 높이 올라갈지 문득 궁금해지는 김 기사였다. 잠시 후, 강우와 이재원이 집에 도착했다.
덜컥.
“엄마, 강우 왔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어머니 표 된장찌개의 냄새였다.
“어머? 강우도 왔어? 마침 된장찌개 끓였는데 잘됐다. 밥 먹고 가.”
주방에서 요리하던 김세아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네, 알겠습니다.”
강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 * *
커다란 거실에 이철금 회장의 웃음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손에는 신문이 들려있었고, 탁자 위에도 여러 개의 신문이 놓여있었다.
“참 내가 말년에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 있을 줄 몰랐어.”
이철금 회장이 신문을 내려놓았다. 탁자 위에 놓인 신문들의 일면에는 강우와 이재원의 입대 기사가 실려있었다. 메인 기사는 아니지만, 충분히 눈에 띌만했다.
“사실 둘이 같이 군대 간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는데 말이야.”
이철금 회장의 앞에는 강우와 이재원이 앉아있었다.
“저랑 강우가 자리를 비우는 기간을 최대한 짧게 하려면 같이 갔다 오는 게 맞아요. 따로따로 가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지.”
이철금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철금 회장은 현역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이력이 있었다. 다만 첫째 아들과 둘째는 군대에 가지 않았다. 내심 그 부분이 부끄럽고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그런데 이재원이 현역으로 그것도 해병대를 자원입대한다고 하니 뿌듯했다. 다만 걱정은 강우와 이재원이 동시에 자리를 비운다는 것이었다.
“회장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진행 중인 사업의 기초는 잡아놓은 상태이니까요. 2년 동안은 튼튼한 기초 위에 싹이 자라기를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저와 재원이 형이 전역하는 2년 후부터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는 시기일 겁니다.”
“그래그래. 내가 우리 강우 말이라면 무조건 믿지.”
이철금 회장이 강우를 바라보는 눈빛은 아들 그 이상이었다. 사실 이철금 회장은 늘 딜레마를 가지고 있었다. 출판업과 학습지를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고 회사를 키웠다. 하지만 사업 구조적 한계로 더 높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강우가 나타나 대진 그룹을 완벽히 바꿔놓았다. 강우에 대한 이철금 회장의 신뢰는 강력했다.
“그리고 제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전반적인 사업은 재중이 형이 관리해주기로 했습니다.”
“재중이가?”
이철금 회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재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이재중이 그룹 사업을 총괄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철금 회장의 얼굴에 내심 못 미더움이 떠올랐다.
“재중이라…. 잘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아버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재중이 형이 다른 건 몰라도 정해진 방식대로 하는 건 잘하더라고요. 그리고 은근히 밑에 사람 말을 잘 듣는 편이고요.”
그동안 이재중은 강우와 이재원을 열심히 도왔다. 자신이 살아남을 길이 두 사람 곁에 남아 열심히 돕는 것이라 했다. 이재원도 시간이 지나며 이재중에게 마음을 점점 열었다. 배는 달라도 가족은 가족이었고, 가족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 알겠다. 나야 경영에서 손 떼기로 했으니 네가 알아서 판단하거라.”
“네, 아버지.”
그때였다. 거실로 이철금 회장의 비서가 다가왔다.
“회장님, 이재우 사장님이 오셨습니다.”
“재우가?”
이재원의 얼굴에 조금의 불편함이 떠올랐다. 이재우는 이철금 회장의 첫째 아들이었다. 현재는 대진 출판사의 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현재 대진 그룹에서 사업적으로 중요한 부서는 아니었지만, 그룹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들어오라고 해.”
“네, 회장님.”
이윽고 거실로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들어섰다. 이철금 회장의 복사판이라 해도 믿을 만큼 닮은 남성이었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그래, 재우야.”
이재우가 이철금 회장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강우와 이재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우와 이재원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어요.”
이재원이 꾸벅 인사를 했다. 이재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 재원이 와 있었구나.”
이재우가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우가 정중히 인사를 했다. 이재원의 형이기도 했고, 나이도 훨씬 많았다.
“안녕하세요. 박강우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박 이사.”
이재우가 손을 내밀었다. 강우가 이재우의 손을 잡았다.
“자리에들 앉아라.”
이철금 회장의 말에 세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이철금 회장이 이재우를 바라보았다.
“그래,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왔어?”
“재원이가 군대 간다는 소식을 듣고 본사에 연락했더니 아버지 뵈러 갔다고 해서요.”
이철금 회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재원의 입대에 세상이 시끌벅적했다. 그만큼 대진 그룹의 위상이 예전과는 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 설마 우리 아들이 해병대 시험에 떨어졌을 리는 없으니 조만간 가겠구나.”
“재원이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그룹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재우의 질문에 이철금 회장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이재우를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그룹을 물려받아야 했을 적장자가 바로 이재우였다.
‘설마 인제 와서 딴소리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사실 이재원이 후계자가 된 후 이재우는 특히 이재원과의 왕래를 자제했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전부 거절하고 대진 출판사 업무에 몰두했다. 세간에서는 침묵의 항변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었다.
“달라질 게 있겠느냐?”
이철금 회장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이재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재원이가 군대 가 있는 동안이 걱정입니다.”
이재우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강우가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재원의 얼굴도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강우가 이재원 대신 말을 했다. 이재우가 강우를 쓱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재중이가 요즘 열심히 산다고 들었다. 그게 다 박 이사 덕분이라더군. 어린 나이지만 참 대단하고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닙니다. 재중이 형님이 열심히 하시는 거죠.”
이재우가 강우를 보며 짙은 호기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철금 회장 앞이라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오랜만에 재중이도 불러서 다 같이 밥이나 먹자꾸나.”
이철금 회장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재원이 군대 가요?!”
양반은 못 되는지 거실로 이재중이 허둥지둥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강우와 이재원을 발견했다.
“어? 와있었네.”
마지막으로 이재우를 발견한 이재중이었다.
“혀…. 형도 있었어?”
이재중이 슬그머니 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자 이철금 회장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이놈아. 이리와 앉아.”
“네!”
이재중이 후다닥 달려와 이재원의 옆에 앉았다. 이재우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