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아아아!
부우웅.
커다란 배기음과 함께 아파트 단지로 허머가 들어섰다. 텅 빈 아파트 주차장의 한쪽에 허머가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강용이가 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아파트를 둘러보며 씩 웃었다.
“형아, 사람들 다 내려갔나 봐.”
“그러네. 설날이라고 다 고향 내려갔나 보네.”
강우가 허머에서 짐을 내리며 답했다. 운전석에서 내린 이재원이 강우를 거들었다.
“나머지는 천천히 정리하고 여행 가방부터 올리자.”
“일단 아버지 짐은 제가 들 수 있어요.”
강우가 온몸에 차곡차곡 짐을 부착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짐으로 뒤덮인 강우를 보며 이재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나중에 같이 나르자니까.”
“왔다 갔다 하는 게 더 귀찮아요.”
강우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강용이는 그런 강우를 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 형아 짐 괴물이다아아~!”
“으허헝!”
강우가 짐짓 무서운 소리를 내며 강용이를 위협했다. 강용이가 비명을 지르며 엘리베이터로 도망쳤다. 이재원이 황급히 다가와 강우를 받쳤다.
“강용이 진짜 신났네.”
“그렇죠?”
강우가 흐뭇하게 웃었다. 2박 3일의 여정 동안 세 사람은 말 그대로 원 없이 자유를 만끽했다. 허머를 몰고 발길 닿는 대로 여행과 야영을 즐겼다. 그리고 오늘 민족 대명절인 설날 연휴 시작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강용이가 폴짝 나왔다. 그 뒤를 짐으로 둘러싸인 강우가 나왔다.
“악! 꼈어요.”
짐 괴물 강우가 엘리베이터 문에 껴버렸다. 뒤에 있던 이재원이 이를 악물고 강우를 밀어냈다. 강우가 마치 ‘뽕’ 소리가 나듯 튕겨 나왔다.
“아하하!”
강용이가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강우가 씩 웃고는 강용이를 향해 달려갔다. 강용이는 또 비명을 지르며 집으로 도망갔다.
“엄마! 엄마!”
강용이가 벨을 누르고 어머니를 불렀다. 문이 곧장 열리자 강용이가 토끼굴에 숨들 폴짝 숨어들었다.
“어머! 강우니?”
어머니가 짐을 잔뜩 둘러멘 강우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네, 엄마.”
강우의 목소리에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이재원이 강우 뒤에서 얼굴을 슬쩍 내밀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재원이 잘 갔다 왔지? 안에 세아도 있어 빨리 들어가자.”
강우와 이재원이 ‘네!’ 하고 힘차게 답했다. 강우와 이재원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에는 구수한 기름 냄새가 가득했다. 명절을 맞이해 어머니가 잔뜩 솜씨를 발휘하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거실에는 할아버지와 최준이 있었다. 두 분 할아버지 가운데로는 어느새 강용이가 앉아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내가 형아랑 재원이 형이랑요….”
강용이가 무용담을 늘어놓듯 여행에서 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야영을 한 것부터 험난한 산길을 차량으로 다닌 것 그리고 간혹 보았던 야생동물들까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어이쿠~ 그랬어? 우리 강용이 정말 재미있었겠구나?”
“응응! 나 물고기도 잡았어. 그런데 나처럼 어리다고 해서 형아한테 가라고 놓아줬어요.”
“착하다. 우리 강용이.”
할아버지가 강용이를 꼭 안아 주었다. 강용이가 씩 웃으며 할아버지 품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할아버지 향기를 맡으며 눈을 꼭 감았다.
“어? 할머니도 계셨어요?”
주방에는 김세아는 물론이고 김말숙도 있었다.
“강우 잘 갔다 왔니? 입대한다는 이야기 들었어.”
“네, 잘 오셨어요. 할머니 계시니까 집이 꽉 차는 거 같네요.”
“그래?”
김말숙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강우는 항상 말로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김말숙은 정말 행복했다. 김말숙이 슬쩍 거실을 바라보았다. 무뚝뚝한 듯한 표정을 한 최준이 있었다. 그 순간, 최준의 시선이 주방을 향했다.
‘어머나….’
김말숙이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장면을 강우는 놓치지 않았다. 강우가 몰래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부터 느꼈지만, 두 분의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잘됐지.’
강우가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웃었다. 강우 가족이 있다지만, 그래도 최준에게 동반자가 생긴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와?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하세요?”
이재원이 주방 가득한 음식들을 보며 입을 떡하니 벌렸다.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별로 안 많아. 그리고 우리 가족이 몇 명이니?”
“맞아요, 언니.”
김세아가 어머니 말에 동의하며 주방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어머니를 닮아 손이 커진 김세아였다.
“도와드릴 거 없어요?”
몸에 잔뜩 부착했던 짐을 정리하고 강우가 주방으로 돌아왔다. 그사이 음식은 더 만들어져 식탁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재원은 식탁 의자에 앉아 몰래 전을 빼먹고 있었다.
“아들! 도와주는 거 맞지?”
김세아가 이재원의 손들을 찰싹 때렸다. 이재원이 움찔하며 손을 뒤로 뺐다.
“시식 평가 중이라고요.”
“됐고, 가서 상이나 펴줘.”
“네~”
이재원이 군말 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한쪽으로 가서 커다란 교자상을 꺼내 거실에 펼쳤다. 상을 꺼내는 것도 적당한 위치에 펴는 것도 마치 자기 집처럼 능숙한 이재원이었다.
“이제 씻고들 와. 밥 먹게.”
“네.”
강우와 이재원이 차례대로 씻고 나왔다. 강용이는 마지막에 씻었다.
“오랜만에 다 모이니까 좋네.”
이재원이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강우 방에는 이재원의 여벌 옷들도 많았다.
“그러게요. 역시 집에 사람이 많아야 좀 사는 거 같고 그래요.”
“맞아. 그래서 엄마랑 나도 오늘 여기로 온 거잖냐.”
이재원과 김세아는 명절을 같이 보내기 위해 강우네 집으로 온 것이다. 설날 연휴 내내 강우네 집에 있겠다고 했다.
“있다가 마사토 아저씨네도 오기로 했다는데요?”
“진짜?”
이재원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마사토가 온다면 미나도 온다는 이야기였다. 히죽히죽 웃는 이재원을 보며 강우가 이나은을 떠올렸다. 이나은은 설날 연휴를 맞아 더 바쁜 스케줄이 잡힌 상태였다. CF 스타를 넘어서 다방면에서 인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는 드라마 오디션에도 합격해 한참 촬영을 진행 중이었다. 복수와 사랑을 주제로 한 드라마였는데 주연급은 아니고 조연급이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었다.
‘나은이가 이번 드라마를 통해 더 이름을 알릴 수 있을 거야.’
미래의 기억을 알고 있는 강우가 고심 끝에 선택해준 드라마였다. 물론 오디션을 통과한 것은 이나은의 실력이었지만 말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나은은 흔히 말하는 예능에서도 출연 요청이 쏟아지고 있었다. 강우와 이나은이 연인 사이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고, 예능에서 다루기 좋은 소재였다.
“뭐해 갈아입다 말고 팬티 바람으로.”
“아….”
이재원이 상념에 빠진 강우를 툭 하고 쳤다. 강우가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강우와 이재원이 밖으로 나오자 상 위는 풍성해져 있었다.
“도와드릴게요.”
강우와 이재원이 일을 거들자 금세 상차림이 끝났다.
딩동. 딩동.
“누…. 누구세요?!!”
여행의 피로 탓일까? 할아버지 무릎 위에서 꾸벅 졸던 강용이가 화들짝 놀라더니 현관으로 달려갔다. 역시 수문장다운 모습이었다.
“마사토 아저씨야.”
문밖에서 마사토가 웃음기 띈 목소리로 말했다. 매번 올 때마다 강용이가 반응을 하니 그럴 만도 했다.
덜컥.
문이 열리고 마사토와 료코 그리고 미나가 들어섰다. 마사토는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있었다. 료코도 손에 음식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미나는 이재원이 있을 줄 알았는지 정말 예쁘게 꾸미고 왔다.
“저희 왔습니다.”
마사토가 할아버지와 최준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이제는 제법 또렷한 한국어를 썼다. 할아버지와 최준이 미소를 지으며 마사토 가족을 반겨 주었다.
“그래그래, 앉아라. 어멈이 음식을 아주 맛있게 했어.”
“네, 어르신.”
마사토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미나는 이재원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 막 시작한 연인의 풋풋함이 느껴졌다.
“잘 다녀왔어요?”
“으응….”
이재원이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내심 여행에 데려가지 못해 미안했나 보다. 하지만 미나는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셋이서 정말 즐거웠겠어요. 나도 나중에 나은 언니랑 둘이 여행 갈래요.”
“어? 나은이랑?”
이재원이 의미를 오해하고는 울상을 했다. 하지만 정말 이나은과 여행을 가고 싶은 것뿐인 미나였다.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미나 앞에서 쩔쩔매는 이재원의 모습은 늘 새롭고 신기했다.
“먹을 걸 조금 해왔어요.”
“어머? 료코 씨.”
료코가 가지고 온 음식 바구니를 주방으로 가져갔다.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바구니를 받아 열었다. 바구니 안에는 일본 전통 음식들이 들어있었다.
“어머~ 료코 씨 그냥 와도 되는데.”
“아니에요. 뭐라도 해오고 싶었어요.”
주방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어머니와 김세아 그리고 료코는 바디랭귀지를 섞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김말숙은 그런 세 어머니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가족의 온기가 너무나 따듯하게 다가왔다.
“자자! 이제 올 사람 다 왔는데 어서 먹자꾸나.”
할아버지가 주방을 향해 말했다.
“네~ 아버님.”
커다란 교자상을 중심으로 모두가 둘러앉았다. 마지막으로 료코가 가지고 온 음식이 놓였다.
“아버님, 오늘 좋은 날인데 한 말씀 해주세요”
어머니가 할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최준을 바라보았다.
“형님 먼저 하시죠.”
“흠흠…. 그럴까?”
최준이 목을 가다듬고는 모두를 한번 둘러보았다. 거실을 가득 채운 가족이라는 존재들에 묘한 벅참을 느꼈다.
“내가 한국에 온 지 어느덧 일 년이 지났구나. 그동안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자꾸나. 정말 고맙다.”
최준의 말이 끝나자 거실에 박수 소리가 가득 찼다. 이번에는 할아버지 차례였다.
“올해도 모두 건강하고 하는 일들이 다 잘되고 무엇보다 가족끼리 계속 화목하게 지내자꾸나.”
역시 할아버지는 최고였다. 짧은 한 말씀과 함께 식사가 시작됐다. 어머니와 김세아에 김말숙이 합세하니 음식 맛이 한층 대단해졌다. 식탁 위에 있던 음식들이 순식간에 비워지기 시작했다.
“맛있다아아!”
특히 강용이는 너무나 잘 먹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한결 밝아지고 활발해진 강용이었다. 강우와 이재원이 군대에 가도 이렇게 씩씩하기로 여행 내내 약속했었다.
“아…. 아버지도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이재원이 중국에 있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강우도 아버지의 빈자리가 아쉬웠다. 하지만 너무나 바쁜 일상을 보내는 아버지였다.
딩동. 딩동.
그 순간, 벨이 울렸다. 와구와구 밥을 먹던 강용이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누구세요?!!”
강우와 이재원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에이…. 설마요.”
두 사람이 설마 했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우아아아! 아빠아아아!”
현관에서 강용이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강우와 이재원이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김세아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할아버지와 최준은 반가움에 미소 지었다.
“정말이야? 아범이 왔어?”
이윽고 현관에서 아버지가 나타났다. 마사토도 벌떡 일어나 아버지를 반겼다.
“정식아!”
“오? 마사토도 있었어?”
마사토에게 인사한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최준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건강하셨죠?”
“그래, 어떻게 된 게야?”
“중국도 춘절이 시작된 지 좀 됐어요. 다행히 일이 좀 한가해져서 비행기표 어렵게 구해서 왔습니다. 설날인데 가족들이랑 있고 싶어서요.”
아버지가 씩 웃었다. 그 미소가 강우 가족의 마지막 자리를 가득 채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