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중이다.
한바탕 즐거운 시간이 지나갔다. 맛있는 후식도 먹고 가족끼리 윷놀이도 했다. 어찌나 즐거운 시간이었는지, 금세 새벽이 됐다. 불이 꺼진 거실에 조명이 켜져 있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에 세 남자가 뭉쳐 있었다.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이재원이었다.
딸칵.
맥주캔이 따지고 아버지가 캔을 내밀었다. 강우와 이재원이 아버지 캔에 퉁하고 캔을 부딪쳤다.
꿀꺽. 꿀꺽.
세 남자가 단숨에 한 캔을 비웠다. 동시에 미간을 찌푸리며 맥주의 짜릿함을 느꼈다. 강우가 땅콩을 집어먹었다.
“아버지, 오셔서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저도요. 어떻게 되신 거예요? 엄청 바쁘시다면서요.”
이재원도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씩 웃었다.
“이거 전부 남규 덕분이야.”
“네? 남규 씨요?”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남규는 지금 한창 일을 배우고 있을 때였다. 선전 지사가 세워지는 절차가 아직 진행 중이라 베이징에 남아있었다.
“강우야, 남규가 진짜 대단한 인재야. 회사 한 달 정도 다니더니 업무를 다 파악을 했더라고. 강우 네가 능력이 있으면 중용해보자고 해서 업무를 좀 더 밀어줬더니 글쎄 그것도 뚝딱해내더라고.”
“음…. 그 정도예요?”
강우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진남규가 나온 칭화대 경영학과라면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이 들어가고 또 경쟁하는 곳이었다. 중국 여정을 함께하는 동안 자신을 뛰어난 인재라며 강력 어필했었다.
“그래, 남규가 자기를 와룡이라고 하더니 정말 틀린 말은 아닌가 봐.”
“와룡이면 제갈량이잖아요.”
이재원이 눈을 빛냈다. 그리고 강우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얻은 와룡은 바로 강우가 아니던가. 이재원의 진남규에 대한 호기심이 짙어졌다. 강우가 자신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한 사람이었다. 단 환경이 다른 것 빼고는 말이다.
“아니 두 사람 삼국지 좋아하는 거도 비슷하고 하는 행동도 비슷하고 혹시 회장님 중국….”
“야!”
이재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강우가 움찔하며 말을 멈췄다. 아버지가 두 사람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내가 잠깐 자리를 비워도 될 만큼 능력이 있더라고. 어차피 춘절이라 업무도 멈춰있기도 하고.”
“중국 춘절이면 올스탑이긴 하죠.”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르만 민족 대이동에 버금가는 민족 대이동으로도 유명한 중국 춘절이었다.
“맞아. 나도 한국행 항공편 간신히 구해서 왔어.”
“아버지 오시니까 다들 너무 좋아했어요.”
강우가 아버지에게 맥주캔을 하나 더 따드렸다. 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명절은 그야말로 꿀맛 같은 휴식이었다.
“아 참…. 너희 해병대 시험 봤다며?”
“네.”
아버지가 조금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건장하고 체력도 좋은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 마음이라는 게 달랐다.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편한 곳에 갔으면 했다.
“강우 너는 카투사 가지 그랬어?”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닌데요. 가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서요. 가장 빨리 입대했다가 돌아올 수 있는 게 해병대이기도 하고 가서 제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기도 하고.”
이재원이 아버지를 향해 낮게 말했다.
“아버지, 강우 수색대 지원한답니다.”
“수색대? 해병대 수색대를?”
아버지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해병대 수색대도 힘들고 고된 훈련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아들이 힘든 곳을 간다고 하니 아버지가 망설였다.
“네, 뭐…. 궁금해요. 얼마나 힘들지.”
강우가 슬쩍 미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은 인연이 닿지 않은 친구 중 한 명이 해병대 수색대를 전역했었다. 그린 베레모를 쓰고 휴가를 나올 때마다 멋있다고 생각하고는 했었다. 그리고 고된 훈련내용을 들을 때면 남자로서 부럽기도 했었다.
“아니 아버지, 힘든 게 궁금해서 수색대 가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내 말이 그 말이야 재원아.”
아버지와 이재원은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강우가 씩 웃으며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때였다.
덜컥.
방문이 열리고 강용이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아빠…. 나 오늘 아빠랑 잘래.”
“그래? 우리 막내가 아빠랑 자고 싶어?”
아버지가 헤벌쭉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강우와 자느라 곁을 내주지 않던 막내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의 귀여움에 끌리듯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자자. 내일 아침 일찍 세배해야지.”
“그러죠.”
강우와 이재원이 잠을 청하러 강우 방으로 향했다. 강용이는 아버지와 함께 안방으로 갔다. 김세아는 남아있는 방 한 곳에서 자고 있었다. 강우와 이재원이 방에 나란히 누웠다.
“그 진남규라는 사람 궁금하네. 나중에 한번 만나보고 싶기도 하고.”
“음…. 나이대도 형이랑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하고 그래요.”
“그래?”
이재원의 호기심이 짙어졌다.
“네, 그리고 독립유공자 후손이기도 하고요.”
강우가 중국에서 있었던 여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이재원이 일단 강우가 가진 강철 체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또 강우를 향해 존경심을 드러냈다.
“나보다 어린 동생인데 진짜 너는 대단해. 네가 지금 하는 일을 사람들이 더 많이 알아주어야 할 텐데.”
“그럼요. 알아줘야죠. 널리 알리려고 하는 일이니까요.”
이재원이 강우를 힐끗 바라보았다.
“하긴 이 일은 겸손 떨고 감출 일이 아니지. 알려야지 아주 남녀노소 가리지 말고 전부.”
“군대 다녀오는 동안 정비는 다 끝날 거에요.”
“그래, 제대하고 나면 세상이 발칵 뒤집히겠지.”
이재원 역시 강우가 가진 계획을 잘 알고 있었다. 강우가 유일하게 모든 계획과 마음을 털어놓는 사람이 이재원이었다. 그리고 이재원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강우를 돕기로 맹세했다.
“하아…. 수색대.”
하지만 해병대 수색대는 다른 이야기였다. 이재원이 긴 숨을 뱉어냈다. 강우가 슬쩍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왜요? 수색대도 따라오게요?”
“고민 중이다.”
진지한 이재원의 대답에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참 별걸 다 따라다니는 형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떡국도 먹고 세배도 끝냈다. 강우는 아침 세배를 마치고 두둑한 용돈도 받았다. 돈이 얼마나 있던지 설날에 받는 용돈은 그 기분이 참 새로웠다.
“다녀오겠습니다.”
저녁쯤 돼서 강우와 이재원이 현관에서 나갈 채비를 했다. 거실에 있던 강용이가 손을 휘휘 흔들었다.
“잘 갔다 와!”
강우와 이재원이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여행하던 삼 일 내내 꼭 붙어 다니던 강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 무릎에 앉아 같이 특선 영화를 보고 있었다. 어젯밤 이후로 아버지 옆에서 내내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런 막둥이가 귀여워 헤벌쭉하고 있었다.
“와…. 진짜 강용이 마음이 갈대라더니.”
“인정.”
강우와 이재원이 밖으로 나왔다.
띵.
엘리베이터가 일 층에 서고 강우와 이재원이 내렸다.
부스럭.
이재원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가족들에게 받은 세뱃돈이 들은 봉투였다. 이재원이 하얀색 봉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돈이야 넘치고 넘치는 이재원이었다. 하지만 얇고 가벼운 봉투의 무게는 정말 무거웠다. 가족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말이다.
“오늘 내가 쏜다.”
“오? 대박.”
강우가 엄지를 척 들었다. 이재원이 강우와 어깨동무를 하며 소리쳤다.
“오늘 다 죽었어!”
강우와 이재원은 택시를 타고 목동사거리로 이동했다. 오늘은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친구들과 모이는 장소는 목동사거리로 고정된 느낌이었다.
딸랑.
익숙한 호프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설날 연휴를 맞이한 가게는 한산했다.
“어서 오세요.”
연휴를 맞이해 아르바이트생들은 쉬고 가게 사장이 있었다. 가게 사장은 강우와 이재원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만큼 단골이었다.
“두 분 입대하신다면서요? 오늘 제가 안주 서비스 드립니다.”
“아…. 감사합니다.”
강우와 이재원이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는 서로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전 국민이 강우와 이재원의 입대를 알고 있나 보다.
“여기야!”
호프집 한쪽에 친구들이 모여있었다. 신원주와 김춘배 그리고 남재식에 박광웅까지였다. 역시 보이지 않은 연정호의 모습에 강우가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시기이니 이해했다.
“얘들아, 형 오늘 세뱃돈 받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재원이 하얀 봉투를 자랑했다. 친구들이 ‘와아~’하며 영혼 없이 감탄했다. 이재원이 픽하고 웃었다. 이제는 강우만큼 편해진 동생들이었다.
“그런데 강우야, 너 합격은 언제 알 수 있는 거냐?”
박광웅이 크게 관심을 드러냈다.
“보통 4월쯤 알려준다고 하더라.”
“그럼 재원이 형이랑 같은 날 입대하는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아…. 부럽다. 나도 재수만 안 했으면 너랑 같이 해병대 가는 건데.”
박광웅이 진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러자 김춘배가 미간을 좁혔다.
“이러다가 해병대 가는 거 유행되겠네.”
강우가 씩 웃었다. 사실 지금의 해병대는 경쟁률이 그리 세지 않았다. 사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입영자가 모자라 육군 현역 중에 징집해갈 정도였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모병제로 바꾸며 조금씩 경쟁률이 올라가고 있었다.
‘기억 속 미래에는 경쟁률도 대단했는데 말이야.’
젊은이들에게 해병대는 묘한 매력이 있는 곳이었나 보다.
“아쉽다. 나도 가고 싶었는데.”
신원주가 아쉬움을 표했다. 사실 신원주도 해병대 시험을 보려 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너무 강했다. 그래서 그냥 육군으로 입대하기로 한 상태였다.
“아…. 너희 하나둘씩 입대하고 나면 남은 사람들 심심해서 어쩌냐.”
김춘배가 한숨을 푹 쉬었다. 각자 영역에서 점점 바빠지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일부가 군대까지 가버리면 참 허전할 것 같았다. 더군다나 모두의 정신적 지주인 강우가 군대에 가는 것이었다.
“나도 걱정이야. 강우 없으면.”
남재식도 한숨을 푹 쉬었다. 남재식은 신체검사에서 역시나 보충역 판정을 받았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남재식이었으니 모두가 예상했던 일이었다.
“뭐가 걱정이야. 지금도 잘 해내고 있구먼.”
“그래도….”
강우가 남재식을 응원했다. 튀니지의 성공에 힘입은 남재식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정 걱정이면 내가 회사에 한번 들를게.”
“알겠어.”
이제야 안도하는 남재식이었다. 강우가 또 어떤 아이디어 보따리를 풀어 놓을지 기대가 됐다.
“춘배 너는 내가 회사에 잘 말해 놨으니까. 다음 영화 오디션 볼 준비하고.”
“어어.”
얼마 전 개봉한 영화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한국 영화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말이 돌고 있었다. 특히 이번 설날 연휴가 그 분수령이었다. 영화가 유명해지자 김춘배도 점점 인지도를 쌓아갔다. 이제 강우는 김춘배의 다음 영화를 몇 개 선택해 놓은 상태였다. 모두 미래 기억으로 흥행하는 작품들이었다.
“광웅이는 학교생활 잘하고.”
“그래, 걱정하지 마. 공부 죽어라 해서 장학금도 받을 거다.”
박광웅이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너는 보라 누나랑 화해는 했냐?”
“어?”
강우가 마지막으로 신원주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입대 문제로 다툰 상태였다. 신원주가 한숨을 푹 쉬었다.
“몰라. 어차피 가야 하는 군대 일찍 가겠다는데 왜 섭섭해하는지.”
“네가 누나랑 상의도 없이 덜컥 입대 날짜까지 받았으니까 그러지.”
강우가 신원주를 질책했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가서 잘 풀어. 보라 누나 같은 여자 없다.”
“알겠어.”
신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강우 말이라면 고집을 부리지 않는 신원주였다. 이재원이 그런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걱정이긴 하다. 너 군대 가면 남아있는 어린양들을 어쩔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