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0화 (220/402)

더 중요한 걸 해주셔야 합니다.

벌컥.

내무실 문이 열리고 이등병 한 명이 들어왔다. 내무실을 두리번거리던 이등병이 창가 쪽을 보더니 움찔했다. 그리고는 잔뜩 군기가 잡힌 자세로 엉성하게 걸어갔다.

“필승! 박강우 병장님. 면회 왔습니다!”

내무실 끝 쪽에는 나른한 표정의 강우가 누워있었다.

“면회?”

강우가 몸을 일으켰다. 일요일인 오늘 면회가 온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누가 왔는데?”

“여자친구분입니다.”

이등병의 대답에 내무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강우가 몸을 일으키자 내무실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강우가 황급히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쉬고들 있어.”

강우를 바라보는 후임들의 얼굴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

-해병대 수색대 병장 박강우.-

수색대 역사상 전설로 남을 인물이었다. 각종 훈련에서 역대 최고 기록을 낸 것은 물론이고 군 생활 역시 FM 그 자체였다. 더군다나 후임들을 어찌나 챙기는지 해병대 2사단 전체가 강우를 알 정도였다. 또한, 해병대에 남아있던 온갖 부조리들을 앞장서서 개혁한 강우였다.

“형수님 오신 겁니까?”

“박 병장님! 저도 같이 나가면 안 됩니까?”

강우 바로 아래 후임들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렇게 예고 없이 면회가 왔을 때 누가 오는지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이것들이 정말. 끝까지 이래야겠냐? 내가 너희들 때문에 제대로 된 면회를 해본 기억이 없다고.”

강우가 짐짓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후임들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러나지 않았다. 강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내일이면 전역을 앞둔 자신이었다.

“그래, 말년병장 말이 먹힐 리가 없지. 같이 가자. 같이 가. 아! 같이 가는 김에 오늘 비번인 애들 다 불러.”

내무실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강우가 씩 웃었다.

“중대장님한테는 내가 가서 말해 놓을 테니까 오늘 밖에 나가서 회식이다.”

“우아아아!”

환호성이 함성으로 바뀌었다.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무실을 나갔다. 강우는 곧장 당직사령실로 향했다. 주말인 오늘 마침 강우가 속한 중대의 중대장이 당직사령을 맡고 있었다.

똑똑.

드르륵.

“필승! 병장 박강우 중대장님께 용무 있습니다.”

“오? 박 병장 무슨 일이지?”

당직사령실에 앉아있던 건장한 체격의 중대장이 강우를 반겼다. 강우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호감과 신뢰가 가득했다.

“오늘 면회가 왔습니다.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아? 그래? 이번에도 여자친구인가 보지?”

중대장이 씩 웃으며 물었다. 강우가 멋쩍어하며 답했다.

“네, 중대장님.”

“참 박 병장 여자친구도 정성이군. 바쁠 텐데 말이야.”

이나은은 2년 동안 더욱 인기가 높아져 있었다. 출연하는 드라마는 주연급이었고 온갖 CF를 휩쓸고 있었다. 지금은 영화 주연까지 제안을 받은 상태였다. 이나은은 말 그대로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나은이 꼭 빼먹지 않는 것이 있었다.

“제가 괜찮다고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이렇게 자주 면회 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말이야.”

중대장의 말처럼 이나은은 시간이 나는 대로 꼭 강우 면회를 왔다. 어떨 때는 혼자 오고 또 어떨 때는 강우 가족과 함께였다.

“저…. 중대장님.”

“왜?”

“그래서 말입니다. 내일이면 제 전역 날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중대장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강우가 전역하는 것은 중대장뿐만이 아니라 부대 간부들 전체가 고민하는 문제였다. 강우가 선임자가 되면서 사건, 사고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뛰어난 리더십으로 수색대 전투력을 크게 상승시켰다.

“아쉽군. 하사관으로 남으라는 말은 정말 욕심이겠지….”

“.....”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중대장도 내뱉은 말이 어이없는지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되물었다.

“그래서?”

“오늘 비번인 애들 데리고 나가서 회식하고 오고 싶습니다. 제 마지막 날이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래? 좋지. 그렇게 해. 내가 행정실에 말해서 외출증 끊어놓으라고 할게. 그런데 이 병장은?”

중대장이 이재원에 관해 물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말년 휴가 중입니다.”

“아…. 맞다. 그랬지. 하도 오래 자리를 비워서 깜빡했다.”

중대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재원은 기가 막히게도 전역 전날인 오늘 말년 휴가에서 복귀였다. 군 생활 내내 휴가를 아꼈다가 한 방에 몰아 썼다. 무려 한 달 가까이 이어진 말년 휴가에 얼굴도 까먹을 지경이었다.

“아무튼, 분대 외출증은 끊어놓을 테니 애들이랑 좋은 시간 보내고 와.”

“필승! 감사합니다.”

강우가 인사를 마치고 당직사령실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던 후임들이 기대감에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박 병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허락받았다. 다들 준비해.”

강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후임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내무실로 달려갔다. 강우도 내무실로 걸어가 이나은을 만날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봤자 군복을 깔끔하게 다리고 빡빡머리를 몇 번 툭툭 털어내는 정도였다.

“필승! 수색 1분대 준비를 끝냈습니다!”

후임들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강우가 후임 중 한 명에게 명령했다.

“넌 행정실 가서 분대 외출증 받아와.”

“네!”

내무실을 박차고 나가는 막내의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워 보일 수가 없었다. 이윽고 준비를 모두 마친 강우와 분대원들이 막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구령에 맞춰 각 잡힌 대열로 한참을 걸어 나가자 면회소가 보였다. 그곳에는 꽃같이 예쁜 이나은이 있었다. 두 손 가득 보따리를 들고 온 것을 보니 지금 상황을 예측했나 보다.

“강우야!”

2년이란 시간 동안 미모가 더욱 꽃피운 이나은이었다. 강우를 보며 미소를 짓는 모습에 뒤를 따르던 후임들이 일제히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은아.”

강우가 환하게 웃으며 이나은을 반겨 주었다. 이나은 옆에는 매니저도 있었다. 매니저가 강우를 보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매니저님, 오랜만입니다.”

강우가 매니저의 양손에 들린 짐들을 보며 물었다.

“뭐를 그렇게 많이 가지고 왔어요?”

“아…. 나은 님이 이사님 전역한다고 부대에 돌릴 떡이랑 과일을 좀 사 왔습니다. 이거 말고도 차에 더 있습니다.”

“떡이랑 과일이요?”

강우가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이나은이 싱긋 웃었다. 그 웃음 한 방에 강우 뒤에 있던 후임들이 단체로 심장을 부여잡았다.

“내일 전역하니까. 그동안 감사했다는 의미에서.”

“그래?”

강우가 감동한 표정이 되었다.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강우를 챙기는 마음은 늘 한결같았다. 아니 오히려 떨어져 있는 2년 동안 서로 더욱더 애틋해졌다.

“그럼 일단 부대에 떡이랑 과일 돌리고 나갈까?”

“좋아.”

강우가 위병소로 향했다.

“중대장실에 전화 좀 걸게.”

“네! 박 병장님.”

위병들은 다른 대대 소속이었지만, 강우에게 깍듯했다. 보통 다른 대대면 계급에 무관했지만, 해병대 기수라는 특이점도 있었고. 강우가 사단 내에서 워낙 유명하기도 했다. 이윽고 중대장과 통화를 마친 강우가 이나은에게 돌아왔다.

“출입증 끊어주신대. 조금만 기다려보자.”

“응.”

이나은이 부대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에 분대원들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위병들도 잔뜩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이나은이 누구던가 뭇 남성들에게 엘프 여신이라 불리는 스타였다. 전역 전날인 지금껏 면회는 왔어도 부대 안까지 들어온 예는 없었다.

“박 병장님!!!”

이윽고 멀리서 행정병 한 명이 달려왔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행정병을 보며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전쟁 났냐?”

“네! 지금 부대 안이 전쟁 났습니다.”

강우가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나은 님이 부대 안에 들어오신다고 해서 지금 발칵 뒤집혔습니다.”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중대에 떡과 과일을 돌릴 생각이었지 않던가. 강우가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나은아, 어쩌지? 일이 좀 커진 거 같은데.”

“괜찮아. 나도 강우랑 2년 동안 함께한 분들 보고 좋지.”

이나은이 싱긋 웃었다. 주변이 환해지는 느낌에 분대원들도 위병들도 탄성을 뱉어냈다. 행정병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입 다물어라. 벌레 들어간다.”

강우가 출입증을 가져온 행정병의 턱을 손으로 올려주었다. 행정병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죄…. 죄송합니다!”

강우가 위병소에 출입증을 제시했다. 이나은이 간단한 방명록 작성을 끝마쳤다. 강우가 이나은에게 말했다.

“들어갈까?”

이나은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수많은 팬 미팅도 사인회도 겪은 이나은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떨렸다. 아마 강우가 생활했던 곳과 사람들을 만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응.”

이나은이 부대 정문을 통과해 들어갔다. 분대원들이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난리 났네. 난리 났어.”

“박 병장님은 여자친구이시니까 그렇죠. 저희에게는 엄청난 스타가 방문한 겁니다.”

강우 다음으로 분대장이 된 후임병이 말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가….”

이윽고 강우와 이나은이 생활관에 도착했다. 수색대대가 쓰는 생활관 입구는 분주했다. 병사들이 나와 주변을 정리하고 난리였다.

“아…. 이거 괜히 쉬는 애들 번거롭게 만든 건가….”

강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렇게 일을 키울 생각은 절대 없었다. 군 생활에서 주말 개인 정비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우가 잘못 걱정한 것이었다.

“아닙니다. 나은 님 오신다고 하자마자 다들 자발적으로 일제히 달려 나왔습니다. 나은 님에게 칙칙한 생활관을 보여줄 수 없다고 합니다!”

“아…. 그래?”

강우가 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박 병장!”

그때, 생활관 입구에서 중대장이 달려 나왔다. 얼굴 가득 미소가 가득한 중대장에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생각해보면 중대장도 아직 30대 초중반에 불과한 청년일 것이다. 더군다나 미혼이었고, 평소 이나은의 팬임을 자주 언급했었다.

“필승! 중대장님 번거롭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왜 번거로워? 안 그러냐?!”

중대장이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생활관을 정리하던 병사들이 우레와 같은 소리로 답했다.

“하나도 안 번거롭습니다!”

중대장이 씩 웃으며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나은 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손님 맞이하느라 내부 정비 중입니다.”

“아…. 네.”

이나은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 모습에 중대장이 흠칫하며 굳어버렸다. 이윽고 생활관 정비가 끝났다.

“자자! 나은 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이나은이 중대장의 안내를 받아 생활관 안으로 들어갔다. 중대장은 먼저 당직사령실로 향했다. 중대장이 자리에 앉고, 강우와 이나은이 옆쪽에 나란히 앉았다.

“중대장님, 제가 떡이랑 과일을 좀 해왔어요.”

“감사합니다. 부대원들이 정말 좋아할 겁니다.”

이나은이 싱긋 웃었다.

“그럼 매니저님이랑 저랑 같이 부대원분들에게 나눠드릴게요.”

“아닙니다! 그럴 필요 없으십니다. 우리 부대원들이 남는 게 힘입니다.”

중대장이 옆에 있는 병사에게 명령했다.

“밖에 나가서 떡이랑 과일 가지고 들어와 그리고 내무실별로 한 명씩 당직실로 와서 받아 가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병사가 당직사령실을 날 듯이 뛰어나갔다. 이나은이 안절부절못했다.

“그럼 병사분들이 힘드실 텐데…. 그냥 제가….”

“아닙니다. 나은 님은 더 중요한 걸 해주셔야 합니다.”

중대장의 얼굴이 매우 심각해졌다. 이나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충 눈치를 챈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중대장이 한쪽에 있는 마이크를 향해 다가갔다.

-당직사령이 전파한다. 지금부터 슈퍼스타 배우 이나은 님의 사인을 받고 싶은 장병들은 질서 정연히 당직사령실 앞으로 오기 바란다.-

강우가 실소를 흘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나은은 놀란 눈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전설로 남을 팬 사인회의 서막이 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