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한바탕 파티가 끝났다. 직원들은 강우가 돌아와 사기가 잔뜩 올랐다. 동양 무역의 진짜 선장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있다가 점심 같이 먹으러 가요.”
“그래, 오랜만에 마사토랑 같이 칼국수 먹으러 가자.”
“네.”
강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사무실 한쪽에 있는 방문으로 향했다. 이사실이라 적힌 곳은 2년 동안 비어있던 강우 방이었다. 강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 자리를 비웠지만 잘 정돈된 사무실이었다.
털썩.
강우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황규범 부장이 건네준 자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강우가 자리를 비운 2년 동안 동양 무역의 상황을 정리한 파일이었다. 황규범 부장이 강우를 위해 특별히 신경을 쓴 자료였다.
사라락.
강우가 서류를 검토했다. 먼저 김치 사업은 일본 제2 공장이 폭발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일본 김치 소비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면서였다. 동양 무역은 일본 김치 시장을 장악했다. 한국에서 여러 기업이 후발주자로 뛰어들었지만, 동양 무역을 당할 수는 없었다.
‘일단 현지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있으니까 말이야.’
일본에 공장을 세우고 일본인을 고용한 기업이라고 생각했다. 강우는 일본에서 벌어들인 돈을 전부 한국에 투자하고 있었다. 일본 소비자들은 막대한 외화가 빠져나가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값싸고 품질 좋은 고춧가루를 이용해 단가 경쟁력도 강해졌지.’
그야말로 돈을 쓸어 담고 있었다. 더군다나 한국 시장은 물론이고 중국 시장에서도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사라락.
다음은 김 사업이었다. 김 사업 역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수출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동양 무역은 한국에 생산 공장까지 지었다. 기존에 계약한 가공 업체들도 모두 동양 무역의 제품을 생산하는데에도 벅찰 정도였다. 특히 김스낵은 동남아 시장을 강타했다. 동남아로 여행을 간 한국 관광객들이 특산품이라며 김스낵을 한국으로 사 오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
‘좋아. 이제 식품 사업부는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김치와 김.
두 개의 식품 사업을 장악한 동양 무역은 튼튼한 자금줄을 가지게 됐다. 강우가 출근용 가방에서 노트 여러 권을 꺼냈다. 강우가 2년 동안 군대에서 정리한 사업 계획서였다. 그 안에는 강우가 준비해 놓은 동양 무역의 다음 단계에 대한 계획이 가득했다.
‘군대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정보를 접하면서 미래 기억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었다.’
강우가 노트를 차분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군대를 빨리 갔다 온 거는 정말 잘한 일이야.’
동양 무역은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단계였다. 바로 사업 영역을 넓히는 것이었다.
‘일단 대진 그룹 식품 사업부 인수를 마무리하자.’
현재 동양 무역은 대진 그룹으로부터 식품 사업부를 모두 인수한 상태였다. 대진 그룹은 미디어 사업으로 탈바꿈하고 있었고, 동양 무역은 식품 사업을 장악할 생각이었다. 다만 대진 그룹 내에서도 사양길이었던 식품 사업부를 강우가 어찌 살려낼지 걱정이 많기도 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시대에 맞춰 빠르게 움직이면 되니까.’
현재 동양 무역은 3년 평균 매출이 4천억 원이 훌쩍 넘었고, 순자산도 2천억에 달했다. 중소기업이라고 하기에는 규모도 능력도 급성장한 상태였다.
‘이제 중견 기업이라고 봐야 하나.’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만 사용하는 단어였지만, 동양 무역 상황이 그랬다. 강우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착실히 덩치를 키워 온 것이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볼 때 강우가 계획한 사업을 벌이기에 자금이 부족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었다. 동양 무역의 덩치가 대기업에는 못 미치지만 그건 한국 법인만 두고 말할 경우였다.
‘뭐. 중국 법인에서 투자식으로 자금을 끌어오면 충분하겠지.’
중국 법인은 강우가 주도한 투자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또한, 위진오의 지원사격을 등에 업고 각종 사업에 뛰어들어 기록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진남규가 있었다.
‘능력이 너무 뛰어나 선전지사에 놔두기에는 너무 아까웠지.’
진남규는 일 년 만에 베이징 본사로 발령받았다. 그리고 본부장으로 승진한 상태였다. 진남규가 중국 법인을 책임지게 되자 아버지가 자유로워졌다. 아버지는 바로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동양 무역에 집중하고 있었다.
‘모든 게 완벽하다.’
강우가 노트를 서랍장에 넣은 후 잠갔다. 노트에 적힌 사업 계획들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제법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 * *
치이익.
퇴근길 지하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틈에는 강우도 있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어?”
주변 사람들 일부가 강우를 알아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지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강우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군대에 있는 동안 좀 잊혔으면 했는데 말이야.’
그럼 바람과는 달리 오히려 더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강우였다. 특히 전역 날 이나은과 투 샷이 잡힌 것이 더욱 화제인 지금이었다. 강우와 이나은이 오래전부터 연인이었던 것을 온 국민이 알게 된 것이다.
“이나은 남자친구 맞지?”
“이나은이 박강우 여자 친구지.”
속삭이는 사람들 사이를 강우가 빠르게 이동했다. 지하철 입구를 벗어나자 주변은 어둑해져 있었다. 강우가 나온 곳은 종로역이었다. 오늘 강우는 김말숙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아침에 있었던 할아버지와 관련된 기억 때문이었다.
‘말숙 할머니라면 할아버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있을 거야.’
강우가 미래 기억을 가졌다고는 했지만, 할아버지는 강우가 고등학생 때 돌아가셨었다. 돌아가신 이후에도 여러 친척에게 박씨 가문 가족사를 듣기는 했지만, 극히 적은 정보뿐이었다.
드르륵.
가게 문이 열리자 김말숙이 있었다.
“할머니.”
“응? 강우니?”
김말숙이 강우를 보고 놀란 표정이 되었다. 혼자 불쑥 찾아왔으니 말이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배고파서 밥 얻어먹으러 왔어요.”
“그래? 밥은 없고 빈대떡은 있는데.”
김말숙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막걸리도 주세요.”
“그래, 자리에 앉아.”
김말숙이 정성스럽게 빈대떡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막걸리 주전자까지 들고 왔다. 김말숙이 강우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강우 잔에 막걸리를 따라주었다. 강우가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받았다.
“우리 강우가 혼자서 무슨 일로 왔을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김말숙이 조금 긴장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우리 강우는 못 속이는구나.”
“네?”
강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김말숙이 민망한 듯 입을 열었다.
“준이 오라버니가 곧 말한다고 했어.”
“네에에?”
강우가 화들짝 놀라자 김말숙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아유…. 나이 들어서 내가 주책이지?”
“아…. 아니에요.”
강우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최준과 김말숙은 공통점이 있었다. 가족을 모두 잃고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이었다. 물론 최준에게는 강우 가족이 있었다.
‘말숙 할머니가 눈에 밟히셨나 보네.’
강우 가족이 중국에 가 있는 동안 김말숙이 집에 와서 신경을 써주며 두 분이 마음이 맞은 듯했다. 강우로서는 대환영이었다. 김말숙이 막걸리를 쭉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주변 시선도 있고 그래서 그냥 조용히 지내려고 했어. 괜히 강우 너희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도 싶었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도 우리 가족이에요. 누가 뭐라고 하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아요.”
최준이 한국에 있는 가족을 찾아 헤맨 것은 제법 알려진 이야기였다. 엄청난 자산가로 알려진 최준을 노리고 온갖 사기꾼들이 가족이라며 나타나기도 했었다. 물론 강우 때문에 모두 제지당했지만 말이다. 그러니 김말숙이 조심스러운 것도 이해가 갔다.
“고마워 강우야….”
“아니에요. 큰할아버지 잘 부탁드려요. 정말 힘든 일 많이 겪으신 분이니까요.”
김말숙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생각해 봐야겠어.’
생각을 마친 강우가 오늘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사실 오늘 찾아온 건요. 큰할아버지 때문이 아니에요.”
“그래?”
김말숙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했다. 강우가 차분히 오늘 아침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영상에서 보았던 것도 이야기했다.
“혹시, 더 아시는 이야기가 있나 해서요.”
“그랬구나. 사장님이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셨어.”
김말숙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먼 옛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 할아버지 회사에 처음 입사한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김말숙은 학력도 낮았고, 천애 고아라 다른 회사에서 채용을 꺼렸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김말숙을 받아주었다. 그리고 낯선 경리 일도 돈을 들여 배우게 해주었다.
“사장님은 나를 보며 잃어버린 막냇동생을 떠올리신 거야. 그래서 나를 더 신경 써주고 예뻐해 주셨어.”
“그랬군요.”
강우가 할아버지와 김말숙의 인연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었다. 강우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미래 기억에서도 할아버지는 참 많은 것을 짊어지고 사셨구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가 할아버지가 짊어진 짐을 모두 해결해 드릴 테니까.’
김말숙이 입을 열었다.
“사장님이 더 힘들어하신 건 막냇동생이 살아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어. 지금은 그 생각을 많이 내려 놓으신 거 같긴 한데….”
드르륵.
그 순간 가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 두 명의 남성이 들어섰다. 백발이 성성한 두 남성이 김말숙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말숙아, 오빠들 왔다.”
“우리 말숙이 잘 있었어?”
두 남성의 말에 김말숙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이놈의 영감들이 지금 손님도 있는데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김말숙의 타박에 두 남성이 움찔했다. 그리고는 한쪽 자리로 가서 앉았다.
“말숙아, 우리 배고프다 빈대떡 좀 만들어줘.”
“아휴…. 진짜!”
타박하는 듯했지만, 김말숙의 얼굴에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김말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고 있어. 금세 만들어 주고 올게.”
“네.”
김말숙이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강우와 두 남성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러자 두 남성이 강우를 알아보는 듯했다.
“네가 재봉 그 사람 손자 강우구나?”
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간혹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있었다. 강우는 이미 유명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할아버지까지 친근하게 언급하는 경우는 없었다.
“저희 할아버지를 아십니까?”
강우의 질문에 두 남성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재봉이 우리 이야기를 안 했나 보군?”
“섭섭하구먼. 우리가 기울인 술잔이 얼마인데.”
강우가 생각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할아버지가 언급한 적이 있었던 피맛골 술친구였다.
“혹시 황 대령님이랑 김 상사님이십니까?”
두 남성이 웃음을 터트렸다.
“재봉, 그 사람도 참 고약하구먼. 이왕 알려줄 거면 이름을 다 알려줄 것이지.”
강우가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박강우입니다.”
두 남성. 황 대령과 김 상사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듣던 대로 예의가 바른 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황규직이라고 하네. 한국전쟁 때 국군 정보사에서 있었지.”
강우가 황규직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키에 삐쩍 마른 모습이었다.
“나는 김판일이라고 하네. 황규직이 이 사람 밑에서 구르고 또 구른 사람일세.”
이번에는 김판일을 바라보았다. 작은 키에 배가 불룩 나온 모습이었다. 너무나도 대비되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황규직이 강우를 보며 물었다.
“얼핏 듣자 하니 재봉 그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던데 혹시 무슨 이야기인지 알려 줄 수 있겠나?”
김판일이 황규직을 거들었다.
“그래, 이 사람이 재봉 그 친구에 대한 건 모르는 게 없지. 아 물론 한국전쟁 때 이야기뿐이지만 말이야.”
강우가 미소를 지었다. 오늘, 날을 제대로 잡고 찾아온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