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도 이제 중요한 존재라고요.
편의점 앞에 앉아있는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빨리 결혼을 하라는 이야기가 나올 줄 정말 몰랐다. 이나은은 지금 연예인으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나은 아버지 생각은 달랐나 보다.
“나는 나은이 연예인 생활을 오래 시킬 생각이 없어. 너무 위험하고 힘든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연예인이 힘든 직업은 맞습니다.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죠.”
강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했다. 미래 기억으로도 알고 있었다. 많은 연예인이 화려한 삶 뒤로 고통을 가지고 살았었음을 말이다.
‘항간에는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고 하기도 하지만….’
이나은은 강우의 전폭적인 지원과 도움으로 순탄한 연예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가 바라보는 자식은 다른가 보다.
“나은이가 내색은 안 하지만 힘들어 보여.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해 보인다.”
“정신적인 스트레스요?”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나은 아버지가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자인 자기가 봐도 완벽한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어떨 때 보면 참 둔한 거 같단 말이야. 나은이가 왜 스트레스받는지 모르겠어?”
“혹시 제가 2년 동안 군대 가 있던 게 힘들었을까요?”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미래 기억까지 합치더라도 연애 경험이 극히 적은 강우였다. 여자 마음을 잘 알 리가 없었다.
“하…. 녀석 참. 그게 아니지 다시 생각해봐.”
“제가 나은이한테 신경을 못 쓴 부분이 있나요?”
나은 아버지가 결국, 실소를 흘렸다. 여자에 밝지 못한 강우가 다행인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네가 나은이한테 충분히 잘해주고 있는 거 나도 안다. 그런데 말이야 나은이는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평범한 아이가 아니야. 받는 것에만 익숙한 아이가 아니란 말이지. 강우 너를 만나면서 자신이 가져야 할 소양들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걱정하는 아이지.”
“저를 만나면서 가져야 할 소양이요? 그런 게 필요한가요?”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자신이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소양까지 필요하단 말인가. 나은 아버지가 강우를 향해 말했다.
“강우 너는 너무 겸손한 나머지 네가 어떤 위치에 있는 남자인지 잘 모르는 거 같구나.”
“.....”
강우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은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야, 앞으로 네가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네 옆에 있는 사람은 더 주목을 받게 될 거다. 내 부족한 안목으로도 너는 정말 크게…. 아니 이미 크게 된 아이니까 말이야. 나은이는 그런 너에게 힘이 돼주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거야.”
“아….”
강우가 작게 탄성을 뱉어냈다. 미래 기억이 있다고는 하지만 강우는 평범한 삶을 살았었다. 미래에 옆에 있던 배우자와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강우의 삶은 달랐다.
‘하긴…. 오늘 지하철에서도….’
누구누구의 남자친구. 누구누구의 여자친구.
강우와 이나은은 서로에게 큰 의미가 되는 상황이었다. 서로의 말 한마디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까지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나은이 유명해지면서 더더욱 그렇게 됐다. 강우는 군대에 2년 동안 있으면서 그런 자각을 하지 못했다.
“막 전역했으니까 아직 못 느낄 만도 하지. 그래도 나는 같은 남자라 알 거 같다. 강우 너는 분명 더 훌륭하고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될 거야. 그러니까 이제는 예전처럼 잘 대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을 더 세심히 살펴야 할 것이야. 네 말 한마디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가 점점 무게감이 더해질 거고 그 무게가 사람들을 짓누를 수도 있거든.”
“새겨듣겠습니다.”
강우가 나은 아버지 말을 가슴에 새겼다. 역시 어른에게서 들을 수 있는 조언은 항상 금과옥조였다. 나은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나이는 어린놈이 어찌 이리 겸손한지 참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너무 말이 길었지? 미안하다.”
“아닙니다.”
나은 아버지가 맥주 캔을 슬쩍 들었다. 그리고 강우에게 내밀었다. 강우가 예의 바르게 캔을 부딪치고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은이는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예계 생활이 힘들다고 하지만, 지금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이기도 하고요. 저는 나은이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했으면 좋겠습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나은이라면 곧 극복해 낼 겁니다. 나은이는 제게도 과분한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
나은 아버지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 입에서 나오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고마움을 느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아직 저랑 나은이 어립니다. 더 많은 걸 보고 느끼고 연애도 더 하고 싶고요. 시간이 흘러 나은이도 저도 서로의 자리에서 높이 갔을 때도 사랑은 변치 않을 거라 확신합니다. 나은이는 그때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믿어도 될까? 그리고 부탁해도 될까?”
나은 아버지가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강우가 특유의 신뢰가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나은 아버지가 긴 숨을 뱉어냈다. 강우의 표정과 목소리에 가슴속 남아있던 모든 불안감이 날아가 버렸다. 나은 아버지가 한결 밝아진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제 마음 편하게 술이나 마셔볼까?”
“네, 아버님.”
“어허! 아버님이 아니라 장인어른이라고 불러.”
“아…. 네…. 장인어른.”
강우가 민망함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였다.
“아니, 금쪽같은 딸을 너무 쉽게 넘기는 거 아니에요?”
강우와 나은 아버지 고개가 휙 돌아갔다. 목소리가 들린 곳에는 나은 어머니와 이나은이 싱긋 웃고 있었다.
“나은아!”
“여…. 여보!”
두 남자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나은 어머니와 이나은이 각각 남자들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맥주 캔을 하나씩 집었다.
“엄마가 강우 왔다고 하니까 얼굴 보고 싶다고 해서 나왔어요. 두 사람 대화는 들었지만 못 들은 거로 하기로 엄마랑 합의했습니다~”
이나은이 강우를 보며 눈을 찡긋했다. 그 미소에 강우가 헤벌쭉 웃었다.
“그래요. 아니 당신도 참 언제 데려갈 거냐니. 나은이 없으면 매일 보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모르면서 그런 말이 나와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나은 아버지가 당황했다.
“어머? 당신 당황하는 거예요? 웬일이래?”
“흠흠….”
부모님의 장난 섞인 대화에 이나은이 킥하고 웃었다. 그리고 강우 팔짱을 끼며 머리를 기대왔다.
“역시 내 남자친구야.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강우가 헤벌쭉 웃으며 좋아했다. 그렇게 강우는 나은 부모님과 이나은과 함께 한 여름밤의 한가로움을 즐겼다.
* * *
고급세단에서 잘 차려입은 강우가 내렸다. 깔끔한 슈트를 빼입은 강우는 정말 멋졌다. 탄탄한 몸매에 훤칠한 외모까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기자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직업정신을 발휘했다.
펑. 퍼펑.
사방에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에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박강우 이사님, 오늘 그룹에 첫 출근이십니다.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사님, 그룹 내부에서 이사님의 승진이 거론되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자신도 오늘 아침 이재원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그룹 본사로 오는 길이었다. 이윽고 그룹 본사 입구에서 직원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그리고는 강우 곁으로 다가와 지키듯 섰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그룹 내부 행사로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몇몇 직원들이 기자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강우에게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바로 그룹 본사에 있는 최 비서였다.
“이사님, 회장님과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가시죠.”
강우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최 비서는 눈을 빛내며 강우 뒤를 따랐다. 2년 사이 완전한 어른이 돼버린 느낌이었다. 이윽고 본사 입구로 들어서자 환영 문구가 적힌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직원 몇 명이 강우에게 다가와 꽃다발을 건넸다.
“전역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대진 미디어에서 나온 카메라와 사진기들이 열심히 본업을 하고 있었다. 오늘 있는 일을 카메라에 담아 프로그램이라도 만들 모양이다.
“강우야.”
역시나 그림이 나와야 했다. 맞은편에서 이재원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강우를 향해 손을 척 내밀었다. 강우가 살짝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자 이재원이 미소를 지으며 낮게 말했다.
“웃어…. 빨리….”
“하아….”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이재원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강우와 이재원이 나란히 서서 활짝 웃었다.
“이건 뭐 하는 쇼에요?”
“우리 창립 기념일용 영상 찍는 거다.”
강우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재원이 강우 옆구리를 툭 하고 찔렀다. 강우가 다시 웃으며 카메라를 하나씩 응시해 주었다.
“후……. 진짜 미리 언질이라도 주던지.”
잠시 후, 사무실에 강우가 털썩 앉으며 말했다. 맞은편으로 이재원도 앉았다.
“나도 오늘 알았다. 회장님이 미리 알려주면 너랑 나랑 도망갈까 봐 안 알려 줬단다.”
“내가 아니라 형이 도망갈까 봐 그렇겠죠.”
“아…. 한마디를 안 져요.”
이재원이 미간을 좁혔다. 강우가 픽 웃었다.
“동기끼리 이러기 있기?”
“야! 이제 사회거든?”
“한 번 해병은?”
강우의 질문에 이재원이 한숨을 푹 쉬며 답했다.
“영원한 해병이다. 그래 이제 맞먹어라. 맞먹어.”
“그런데 진짜 이거 찍자고 부른 거예요? 밖에 기자들도 있던데? 그리고 나 승진 이야기는 뭐에요?”
이재원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박 병장,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
“아 좀….”
이재원이 볼을 긁적였다.
“그게 말이야. 회장님이 너 부사장으로 승진시킬 생각이시더라고. 이제 군대도 갔다 왔고 본격적으로 그룹 좀 키워보라고.”
“부사장이요? 나 앞으로 시간 없는데.”
강우가 살짝 발을 빼자 이재원이 화들짝 놀랐다.
“야! 인제 와서 발을 빼면 우리는 어떡하라고?”
“농담. 조크.”
강우 말에 이재원이 가슴을 탕탕 치며 분노했다.
“군대 갔다 오더니 능글맞아져서는.”
“형은 제대하더니 왜 이리 진지해졌어요?”
이재원이 결국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일단 이사회에서도 너 승진은 적극 찬성이더라. 대진 그룹 최연소 부사장 탄생이 곧이다.”
“형은 최연소 사장 아닌가요?”
“아…. 그게 그렇게 되나?”
강우와 이재원 동시에 픽하고 웃었다. 그때였다.
똑똑.
문이 열리고 이재중이 들어왔다. 못 본 사이 부쩍 늙은듯한 얼굴이었다.
“강우야!!”
이재중이 강우를 보고는 이산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눈가가 촉촉해진 것이 감격 그 자체인듯했다. 강우가 움찔하며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이재중이 왜 그러냐는 듯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너 없는 동안 회장님한테 좀….”
“아….”
강우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재중이 고개를 푹 떨궜다.
“이제 너랑 재원이 돌아왔으니까 나 장기휴가 보내줘. 한 반년?”
“그냥 일을 푹 쉬려고요?”
이재원이 무슨 소리냐는 듯 말했다. 이재중이 심한 내적 갈등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사실 강우와 이재원이 군 생활을 하는 동안 제대로 된 경영의 맛을 본 이재중이었다. 능력이 있는 사람들과 제대로 된 사업을 진행하는 것에 대한 기쁨을 느꼈다. 그동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오직 자신의 위치와 돈을 보고 몰려들었음도 통감했다.
“그렇죠? 형이 가긴 어딜 가요. 형도 이제 중요한 존재라고요.”
“재…. 재원아!”
이재중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참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최 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사회 준비됐습니다.”
최 비서가 문을 노크하고 열고 들어왔다. 이재원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강우를 향해 말했다.
“가자. 이제 다시 시작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