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0화 (230/402)

끝까지 가보자고.

강우와 삼 형제가 대회의실을 나섰다. 이철금 회장은 진작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이재우가 강우를 보며 물었다.

“다들 업무가 바쁘지? 오늘 끝나고 저녁이나 같이하지.”

“네, 좋죠.”

강우가 고개를 끄덕했다. 이재우가 강우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전역하자마자 바빠지겠군. 한창 놀 나이인데 말이야.”

“전 이게 좋습니다.”

이재우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리고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전역하고 바로 못 봐서 미안했다.”

“형님, 바쁜 거 알고 있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아직 어색한듯한 대화였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편안했다. 이재우가 이재중을 힐끗 바라보았다.

“둘째, 너는 술 먹으면 항상 조심하라고 그랬지.”

“하하….”

이재중이 움찔하며 강우와 이재원 뒤로 숨었다. 강우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부여잡았고, 이재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장소는 내가 잡아 놓으마.”

이재우가 발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이재원이 몸을 쓱 돌려 이재중을 향해 씩 웃었다.

“죽어도 비밀 지켜준다던 사람이 어딨더라?”

“그…. 그게 말이야. 아버지가 뭔가 눈치를 채시고 일부러 술을 잔뜩 먹여서….”

이재중이 고개를 떨궜다. 이철금 회장은 아들을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재우는 무심한 듯 놓아두면 알아서 잘하는 스타일이었다. 이재중은 사실상 막내나 다름없었다. 이재원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으니까 말이다. 여동생도 있었지만, 이재원보다 어렸다.

“뭐…. 잘된 거죠. 이 기회에 인사도 드리고.”

“강우야, 회장…. 아니 아버지 성격 알면서 그러냐? 미나한테 이것저것부터 시작해서 아마 역사서라도 쓸 기세로 다 캐물을 건데.”

“괜찮아요. 부모님 마음이 다 그런 거죠. 그리고 미나 정말 마음에 들어 하실 거예요.”

“그렇지. 우리 미나가 어디 가서 빠지지 않지.”

이재원이 헤벌쭉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재중이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그럼 나 잘한 거지?”

강우와 이재원이 동시에 이재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이재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잘한 거냐고?”

이재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걸음을 옮겼다. 강우가 이재중을 끌어당겼다.

“이럴 때는 가만히 계시는 게 좋아 보입니다.”

“아…. 그럼 나는 일이 밀려서.”

이재중이 업무가 밀려있다며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와 이재원이 씩 웃었다.

“재중이 형이 생각보다 일을 잘 처리해주네.”

“그러게요. 당분간 렌탈 사업이랑 건설사 쪽은 재중이 형님한테 맡겨도 될 거 같아요.”

“그래야지. 우리는 이쪽에 집중을 좀 해야 하니까.”

이재원 역시 강우가 그린 청사진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향후 몇 년간이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강우와 이재원이 서로를 보며 전의를 다졌다.

“끝까지 가보자고. 나도 너도.”

“당연하죠.”

강우와 이재원이 주먹을 툭 하고 부딪혔다. 군 생활까지 함께한 두 사람은 이제 영혼의 파트너나 다름없었다. 눈빛만 보아도 서로의 생각을 알 정도였다.

“일단 엔터 사업부부터 둘러보죠.”

“오케이.”

강우와 이재원이 엔터 사업부를 향했다. 그룹 본사 내에 있는 엔터 사업부는 곧 독립을 앞두고 있었다. 엔터 사업부를 위해 빌딩을 매입해 재단장 중이었다.

“사…. 사장님! 이사님!”

강우와 이재원이 엔터 사업부에 나타나자 김성현 부장이 달려 나왔다. 김성현 부장은 현재 대진 엔터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었다. 엔터 사업부가 독립하면 전무로 승진할 것이라는 평이 자자했다.

‘그야말로 전설을 쓰고 있는 거지.’

김성현 입사 초기에는 의심과 우려의 시선도 많았다. 일부에서는 강우의 인맥으로 들어온 인사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김성현은 자신의 능력으로 그런 시선을 말끔히 걷어냈다.

‘김성현 부장님의 능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지.’

미래기억 속에서 거대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이끌던 수장이 바로 김성현이었다. 그 능력을 지금 대진 엔터에서 자유롭게 풀어내고 있었다. 그런 김성현 부장의 성공으로 강우가 인재를 보는 안목 또한 인정받고 있었다.

“잘 지내셨어요?”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김성현 부장이 강우와 이재원을 보며 크게 반가워했다. 입사 초기 적응에 조금 힘들었던 자신을 끌어주던 두 사람이었다. 강우가 엔터 사업부를 둘러보고는 감탄했다.

“직원들이 많이 늘었네요?”

“네, 분사를 앞두고 직원 채용을 좀 했습니다. 그리고 사업부가 점점 분야가 넓어지기도 하고 있습니다.”

강우와 이재원 그리고 김성현 부장이 대화를 나누며 회의실로 이동했다. 회의실에는 엔터 사업부의 과장과 대리들이 모여있었다.

드르륵.

강우와 이재원이 등장하자 과장들과 대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짝 경직된 표정을 지은 직원들 모습에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다들 편하게. 앉아 계세요.”

강우 목소리에 직원들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이재원이 강우를 보며 대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안정시키는 능력까지 생긴 것 같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김성현 부장이 대리 한 명을 바라보았다.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엔터 사업부 김종환 대리입니다. 지금부터 대진 엔터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 분야에 대한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대진 그룹 산하에 있는 대진 엔터테인먼트는 현재 약 100여 명의 소속 연예인과 예술계 각 분야의 예술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속 연예인이 많은 이유가 있었다. 대진 엔터는 흔히 말하는 돈이 되는 분야에만 투자하는 것이 아니었다. 문화 강국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예술계에도 투자하고 있었다. 다음 단계로는 체육계에도 대대적인 투자를 할 생각이었다.

“먼저 부서별로 나눈 매출 현황을 보겠습니다.”

매출 현황이 나타났다. 아직은 투자 대비 수익이 나지 않는 적자 상태였다. 다만 적자를 그나마 줄여주고 있는 연예인이 몇 명 있었다. 바로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이나은과 서서히 배우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권창식이었다.

‘이 두 사람 빼고는 전부 부진하긴 하네.’

그럴 만도 했다. 대진 엔터는 현재 산하에 수많은 연습생을 키우고 있었다. 그들 역시 강우가 미래기억으로 스카우트해온 연습생들이었다.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는 큰 수입을 가져다주겠지.’

물론 강우가 커다란 수익을 바라는 것만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문화산업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려는 포부도 있었다.

‘그게 내게 모습을 보여주셨던 백범 선생님과의 약속이다.’

이재원이 생각에 빠진 강우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우야, 어차피 당분간은 투자하는 시기라고 했잖아. 걱정하지 말자고.”

강우가 상념에서 벗어나 이재원을 바라보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믿어줄 든든함이 느껴졌다.

“네, 걱정 안 해요. 이제 곧 대진 그룹의 이름을 건 문화 콘텐츠들이 전 세계를 장악하는 장면을 보게 될 거예요.”

“아….”

이재원이 탄성을 뱉어냈다. 회의실 안에 있는 사원들도 꼭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우가 하는 일은 항상 승승장구였으니까 말이다.

“그럼 수고들 했습니다. 앞으로 더 바빠질 겁니다. 여러분은 대진 그룹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는 문화산업의 첨병이라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우의 마지막 당부를 끝으로 회의가 끝났다. 사원들이 모두 나가고 김성현 부장이 남았다.

“부장님, 춘배는 요즘 어때요?”

사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김성현 부장의 얼굴이 조금 더 편해졌다. 사석에서는 정말 친한 두 사람이었다.

“춘배, 요즘 많이 힘들어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사…. 아니 부사장님한테 한 번 연락 드리려고 했습니다.”

“지금 춘배 어디 있죠?”

“지금 집에 있을 겁니다.”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저녁 약속은 다음으로 미루죠.”

“그래, 아니면 나는 형들이랑 먹을게. 너는 마음 놓고 다녀와.”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하며 답했다. 강우에게 친구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김춘배는 이재원에게도 소중한 동생이었다.

* * *

부우웅.

고급 세단이 김춘배가 사는 목동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적당한 곳에 주차가 되고 강우가 고급 세단에서 내렸다.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아…. 그냥 돌아가셔도 돼요. 오늘 늦을 겁니다.”

강우가 부사장이 되면서 대진 그룹에서 고급 세단과 기사를 배정했다. 익숙지 않은 상황에 강우가 거절했지만, 이재원이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제 대진 그룹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강우라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하…. 난 운전하는 게 좋은데.’

그래서 강우는 합의점을 찾았다. 대진 그룹의 공식적인 업무와 행사에만 차량을 이용하기로 했다. 다만 오늘만큼은 차를 타고 오기로 했다.

“그…. 장 기사님.”

강우가 끝까지 버티고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네, 부사장님.”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해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우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장 기사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이제 40대가 훌쩍 넘은 장 기사였다. 다른 임직원을 모신 것도 여러 차례였다. 하지만 지금 강우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들어가서 쉬세요.”

인사가 끝나고 고급 세단이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차량이 사라지자 강우가 시선을 돌렸다. 김춘배가 사는 아파트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강우는 먼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뚜르르. 뚜르르.

-고객이 전화를….-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가 계속 이어지고 결국, 김춘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점점 더워지고 있는 날씨만큼 끈끈하고 축 처진 목소리였다. 강우가 한숨을 푹 쉬더니 입을 열었다.

“한여름에 늘어진 호박엿 같은 목소리네?”

-가…. 강우냐?!-

김춘배가 화들짝 놀랐다. 핸드폰 너머로 벌떡 일어나는 김춘배 모습이 그려졌다.

“나와. 집 앞이다.”

-집 앞이라고?-

“어, 10분 준다. 지금부터 일어나 세면과 환복을 실시한다.”

군대에서 후임들에게 하던 말투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강우가 아차 했지만, 김춘배는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아…. 알겠어!-

툭.

통화가 끊기고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강우가 한쪽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벤치 위를 덮고 있는 나뭇가지들이 시원한 자연의 그늘막을 되어주었다. 아파트 단지 사이로 바람이 한 차례 불었다. 향긋한 풀냄새와 여름이 다가오는 꿉꿉함이 느껴졌다.

‘장마라도 오려나?’

이윽고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툭. 투둑.

하늘에서 한두 방울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비는 소나기가 되었다.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에 강우가 슬쩍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뭇잎들이 강우에게 떨어지려는 빗방울을 열심히 막아주고 있었다. 작은 나뭇잎이 여러 개 모여 만든 천연 우산을 보며 강우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마치 여럿이 모여 하나를 이루는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강우야!!”

그때, 아파트 입구에서 김춘배가 달려 나왔다. 순간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며 김춘배가 달려왔다.

“와! 갑자기 비가.”

흠뻑 젖은 김춘배를 보며 강우가 픽 웃었다.

“우산은?”

“아….”

김춘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강우가 그 모습이 흡사 눈물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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