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5화 (235/402)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라락. 사라락.

강우가 대본을 넘기고 있었다. 빠르게 대본을 살핀 강우가 김춘배에게 넘겨주었다.

“읽어봐.”

“어어.”

김춘배가 대본을 받아 빠르게 넘겼다.

“그 작품은 조연급. 거기 주인공 동료로 나오는 역할.”

“오케이.”

김춘배가 순식간에 대본에 빠져들었다. 강우가 힐끗 앞쪽을 바라보았다. 현재 대진 엔터에 쌓여있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대본이었다. 강우 앞에는 대진 엔터 실무진들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우가 빠르게 검토해 넘기는 대본들을 확인하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다….’

내부 회의를 통해 선별되었던 작품들을 강우가 그대로 골라내고 있었다. 그것도 몇 장만 살펴보고는 말이다. 하지만 놀랄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강우가 짚어준 영화가 흥행 대성공을 거뒀었기 때문이다.

사라락. 사라락.

김춘배가 신중한 표정으로 대본을 골랐다. 강우는 차분히 김춘배가 선택하기를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김춘배가 대본을 내려놓고는 긴 숨을 뱉어냈다.

“좋다. 강우 너는?”

“그래? 나는 이거 전부.”

강우가 모든 대본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씩 웃었다.

“그래, 나도 다 오디션 보게 할 생각이었어.”

“하하….”

김춘배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이고~ 부사장님!”

그때, 김성현 부장이 회의실에 나타났다.

“혀…. 아니 부장님!”

김춘배가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 김성현이 김춘배를 슬쩍 바라보더니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춘배, 너 있다가 나 따로 보자.”

“네….”

김춘배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김성현 부장의 연락도 피하던 김춘배였다. 평소 아끼던 만큼 실망도 했던 김성현 부장이었다.

“작품은 골랐어?”

“네, 여기요.”

김춘배가 대본들을 앞으로 쓱 내밀었다. 김성현 부장이 빠르게 대본을 확인하더니 강우를 바라보았다.

“이거 부사장님이 골라주신 거 맞죠?”

“네, 맞아요.”

김성현이 역시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춘배, 네가 웬일로 좋은 작품들만 쏙쏙 골랐나 싶었다.”

“하하….”

김춘배가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해했다. 김춘배가 작품을 보는 안목은 뛰어난 연기력과는 달리 최악에 가까웠다.

“그러면 나머지 미팅은 잘 부탁드립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성현 부장이 왔으니 이제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 강우가 회의실을 나오자 직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일들 하세요.”

강우가 손을 들어 직원들을 앉으라 했다. 그리고 대진 엔터 사무실을 벗어났다. 사무실을 나오자 최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부사장님, 다음 스케줄입니다.”

이철금 회장은 강우에게 가장 유능한 비서인 최 비서를 보냈다. 최 비서는 대진 그룹과 관련된 모든 스케줄을 정말 깔끔히 관리해 주었다. 동양 무역과 관련된 스케줄까지 맡아준다 했지만, 강우가 거절했다.

“다음은 광복회 방문이군요.”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강우가 전역한 이후 광복회 회장인 권태복은 계속해서 만나 달라고 요청했다. 지난 2년간 사단법인 광복은 크게 발전해 있었다. 소외된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은 물론이고 소외계층에게까지 손을 뻗고 있었다. 단순히 금전적 지원이 아닌 마음으로 다가가는 사단법인 광복의 일 처리에 많은 사람이 감동하였다. 광복회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기존에 남아있던 회원 중에서도 이탈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지.’

물론, 사단법인 광복에서 탈퇴를 권유하거나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진심 어린 대우에 회원들의 마음이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탈퇴 러쉬의 결정적인 원인은 광복회에서 제공했다.

‘광복회 회원들에게 우리 재단에서 지원을 받지 말라고 권유를 했다던데….’

중복 지원이니 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군대에서 그 소식을 들은 강우가 어이없는 한숨을 내쉬었을 정도였다.

“네, 권태복 회장님께서 꼭 한 번 찾아와 달라고 계속 연락이 오셨습니다.”

“알겠어요. 그리로 향하죠.”

강우와 최 비서가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광복회였다.

* * *

광복회 회의실에 고성이 난무하고 있었다. 특히 광복회 이사회의 일원인 나창식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큰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니 지금 그러니까 우리 광복회보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단체가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갑자기 나타나서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는 걸 지켜만 봐야 합니까?!”

나창식의 말에 권태복 회장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회의실을 쓱 둘러보았다. 커다란 회의실에 양쪽으로 이사회 임원들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나창식의 말에 한쪽은 못마땅한 표정을 또 한쪽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아…. 어쩌다 이 지경이. 아니 어쩌면 시작부터 잘못된 걸 수도….’

그때, 나창식의 반대편에 앉아있던 연로한 이사회 임원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나 이사, 그게 뭐가 중요한 건가? 독립운동가분들과 후손들을 돕는 단체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좋은 거 아닌가?”

“백 이사,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지금 우리 회원수가 얼마나 감소했는지 아나? 이러다가는 광복회 운영에 막대한 차질이 있을 수 있어.”

“자네는 마치 우리가 기업인 것처럼 말을 하는군? 우리의 쓸모가 없어지면 조용히 사라지면 될 일 아닌가?”

백 이사라는 인물의 일침에 나창식이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사라지면 독립운동의 기치와 남은 사람들의 권익은 누가 지켜준다는 말이오?”

“허….”

백 이사가 탄식을 뱉어내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권태복 회장과 눈을 마주쳤다. 권태복 회장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오늘 찾아온다고 했으니. 우리가 제대로 알려줍시다. 아직 너무 어린 친구라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거 같으니 말입니다.”

나창식의 말에 몇몇 이사들이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회의실 문이 조심히 열렸다. 그리고 권태복 회장의 비서가 다가왔다.

“회장님, 박강우 부사장님이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권태복 회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잠시 손님을 만나고 올 테니 오늘 회의는 계속 진행들 해주게.”

“저도 갑니다.”

나창식 이사가 대번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권태복 회장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네는 회의에 남게.”

“회장님, 저도 할 말이 많습니다. 특히 제가 담당하던 장학 지원사업에 큰 차질이 생기고 있단 말입니다.”

나창식 이사가 언성을 높였다. 권태복 회장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 사람이 지금.”

“저도 가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백 이사가 일어나 분란을 잠재웠다. 가뜩이나 좋지 못한 광복회 분위기였다. 많은 사람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좋지 못했다.

“알겠네. 가지.”

권태복 회장이 몸을 돌려 회의실을 나갔다. 나창식이 씩씩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백 이사가 회의실을 한번 보더니 그 뒤를 따라나섰다.

* * *

광복회 회장실에 강우가 앉아있었다. 주인 없는 회장실에 혼자 앉아있으려니 기분이 별로 좋지는 못했다. 강우 옆에는 최 비서가 앉아있었다.

덜컥.

문이 열리고 권태복 회장이 들어섰다. 강우와 최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태복 회장이 강우를 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오! 박 부사장, 어서 오게.”

“안녕하십니까?”

강우가 권태복 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들어오던 나창식과 눈이 마주쳤다. 나창식 이사가 콧방귀를 끼며 고개를 돌렸다. 강우가 미간을 좁혔다.

“안녕하신가? 나는 백도종이라고 하네.”

나창식과 함께 들어온 백 이사가 강우를 향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강우가 살짝 심호흡했다. 그리고 백도종의 손을 잡았다.

‘윽….’

머리가 지끈 아파지고 백도종의 일대기가 영상으로 펼쳐졌다. 순식간에 지나간 기억을 갈무리하고 강우가 심호흡했다.

“자네 혹시 어디 안 좋은가?”

“아닙니다.”

강우가 백도종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 미소에서 호의를 느낀 백도종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가 권태복 회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단둘이 만나자고 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아…. 그게 말이야.”

권태복 회장이 살짝 당황했다. 그런 권태복 회장을 보며 강우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2년 전 내가 그렇게 힌트를 줬건만…. 변한 게 없네.’

눈앞의 사람은 조금은 다를 줄 알았다. 하지만 역시라는 생각에 실망감도 들었다. 사람들이 들어오자 최 비서가 강우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부사장님, 그럼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네.”

최 비서가 권태복 회장과 두 이사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일단 앉겠습니다.”

강우가 자리에 앉았다. 백도종과 나창식이 강우 맞은편에 앉았다. 권태복 회장이 인터폰을 연결했다.

“차를 좀 가져다주지.”

-네, 회장님.-

권태복 회장이 강우를 보며 말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나오더니 더 늠름해졌군.”

“감사합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똑똑.

이윽고 문이 열리고 차가 준비됐다. 권태복 회장이 찻잔을 들었다.

“차부터 하지.”

강우가 찻잔을 들었다. 나창식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강우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예전에 내가 그냥 넘어갔으니 별다른 게 없다고 생각하나 보지?’

하지만 강우는 때를 기다린 것뿐이었다. 군대도 다녀와야 했고, 조금 더 힘을 기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2년이 지나 강우는 제대했고, 그 힘도 강해졌다.

“그래, 제대하고 쉬지도 못하고 정신이 없다지?”

찻잔이 비워져 갈 때쯤 권태복 회장이 입을 열었다.

“군대에서 푹 쉬었습니다. 이제 다시 열심히 일을 해봐야죠.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많아서요.”

강우가 나창식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래, 자네 재단에서 아주 열심히 일들을 하고 있더군.”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것들을 돌려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나창식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백도종은 멍한 표정을 잠시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흠흠…. 그렇게 좋은 일이지. 그런데 박 부사장도 잘 생각해 봐야 하네. 무분별한 지원은 사회적인 시선도 좋지 못할뿐더러 그들에게도 좋은 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리고 전 재산을 쏟아부은 분들이었다. 한없이 돌려주어도 모자랄 뿐이었다.

“열심히 살려면 스스로 일어나는 법도 알려주어야 한다 이거네.”

나창식의 말에 백도종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강우의 한쪽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 미소에 권태복 회장이 섬뜩함을 느꼈다. 그리고 중재에 나서려 했다.

“이보게 나 이사….”

강우가 권태복 회장의 말을 잘랐다.

“아…. 그러십니까? 나창식 이사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딱 그 시절에 일제가 조선 백성들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니까?”

“뭐?! 나창식 이사? 어린놈이….”

나창식이 발끈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돌변한 강우의 모습에 권태복 회장과 백도종 이사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이마 오사무.”

강우 입에서 다시 그 이름이 흘러나왔다. 백도종 이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강우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백도종 이사님도 그자에게 잡혀 옥고를 치렀었지.’

나창식 이사가 콧방귀를 꼈다.

“지난번부터 자꾸 그 이름을 언급하는데 그 악질 순사를 누가 모른단 말인가? 그자가 나와 무슨 연관이 있다고 자꾸 이러는 건가?”

나창식이 은근한 눈빛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씩 웃으며 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작은 수첩을 꺼내 테이블 위에 툭 하고 던졌다.

“여기 당신이 도이마 오사무와 내통해 팔아넘긴 독립투사분들의 명단이 있다. 그리고 그 증거도.”

나창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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