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을 응징할 생각이니까요.
회의실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권태복 회장과 백도종 이사가 나창식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 무슨 헛소리인가?!! 이 수첩이 뭐라고 증거가 된다는 말이야!”
나창식이 대번에 소리를 치며 부정했다. 강우가 분노를 잘근 씹으며 입을 열었다.
“이건 옛 광복군 사령부터에서 발견된 증거물에서 발췌한 부분입니다. 여기 보시면 그 당시 일본에 협조한 내부 밀정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백도종 이사가 빠르게 수첩을 들었다. 그리고는 내용을 확인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도 뉴스를 본 기억이 나네. 자네가 광복군 사령부에서 최준 님의 장부를 찾아냈다고. 하지만 이런 장부가 있었을 줄이야….”
“이 자료는 광복 이후 세상에 발표될 예정이었습니다. 다만 중국 내전으로 인해 자료가 유실됐을 뿐이었습니다.”
나창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백 이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지금 이 허무맹랑한 자료를 믿겠다는 건가?”
“그럼 어찌 안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광복군에서 운용하던 밀정을 말이야. 그들이 남긴 기록이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나창식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광복된 이후부터 논란이 많던 사안이었다. 다만 그 당시 많은 친일파가 증거 불충분으로 죄를 인정받지 않았다. 아니 일부는 오히려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진실을 외치는 사람들도 하나둘씩 사라졌다. 모두 현실에 치여 삶을 살아가기도 바빴다.
‘그사이 당신들은 사회 곳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었지.’
강우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 눈빛을 마주한 권태복 회장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몇 년 전 강우가 옛 광복군 사령부터에서 최준의 장부를 찾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때 찾은 장부는 여러 역사학자의 검증을 통해 인증된 자료였다.
“이…. 이런 게 있었단 말인가? 그럼 어째서?”
강우가 나창식을 가리켰다.
“사회 곳곳에 뿌리 박혀있는 암적인 존재들을 한 방에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힘을 알기에 더 힘을 길렀을 뿐이죠. 오늘 저는 광복회에 남아있는 배신자들을 지목할 겁니다. 지금, 이 순간 이미 언론에 보도 자료가 뿌려졌을 것입니다.”
백도종 이사가 탄성을 뱉어냈다. 나창식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리모컨을 찾았다. 그리고 다급히 텔레비전을 틀었다. 회장실 한쪽에 있던 텔레비전이 켜졌다.
-오늘 사단법인 광복에서 광복회에 소속된 친일 명부를 정리해 배포했습니다. 이는 2년에 걸친 역사자료 수집과 수많은 역사학자의 고증과 검증을 거친…….-
툭.
나창식이 리모컨을 떨어트렸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창식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강우가 떨어진 리모컨을 들어 볼륨을 높였다.
-오늘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그동안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유명 인사들 또한, 포함되어있어. 사회와 학계에 커다란 파장을….-
강우가 나창식을 보며 말했다.
“당신들이 덮어온 진실이 언제까지고 묻혀 있기를 바랐겠지.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있는 법입니다.”
“강우…. 아니 부사장….”
권태복이 정신을 못 차리겠는지 창백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일을 벌일 줄 몰랐다.
“부사장, 이렇게 갑자기 일을 벌이면 독립유공자들과 후손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네.”
강우가 권태복 회장을 보며 말했다.
“무슨 피해가 간다는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저들이 만들어 놓은 가난과 무지 속에 살던 분들입니다. 저는 그분들을 제가 할 수 있는 안의 범위에서 제자리로 돌려드리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집을 드리고 교육을 받게 하고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죠. 이게 도대체 어떤 사회적 문제와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겁니까?”
강우가 날리는 일침에 권태복 회장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제가 2년 전에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내부의 알력싸움 그리고 독립유공자의 탈을 쓰고 있는 친일파들을 처리하시라고요. 회장님이라면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은 모습이더군요. 아니 오히려 우리 재단이 하는 일에 일일이 불만을 토하고 심지어 방해하려는 행동도 하시더군요.”
“으음….”
권태복 회장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생각해보면 이리저리 끌려다닌 자신이 부끄러웠다. 반면 어린 나이에도 강인한 강우를 보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일제와 맞서 싸우며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던 자신을 말이다.
“또 거짓과 변명으로 빠져나갈 생각이라면 준비를 많이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이 팔아넘긴 수많은 독립투사분을 대신해 내가 당신을 응징할 생각이니까요.”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창식이 터질 듯한 얼굴로 강우에게 삿대질했다. 자신이 누구던가? 먼 선대로부터 양반 가문에 부유했던 집안에서 살아왔었다. 물론 독립운동을 하다가 대세를 따라 일제에 협력했지만, 그건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너…. 너! 감히!”
나창식이 분노를 토해냈다. 사학재단을 이끄는 자신이 어디서 이런 모욕감을 느껴봤는지 기억도 까마득했다. 강우가 나창식을 보지도 않은 채 백도종을 바라보았다.
“어르신은 올바른 선택을 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회장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허허….”
백도종이 헛웃음을 흘렸다. 오늘 처음 만난 자신을 어찌 믿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내심 속으로 강우를 돕고 싶다고 생각했으니 틀린 부탁도 아니었다.
덜컥.
강우가 문을 열고 사라졌다. 백도종이 나창식을 바라보며 서슬이 퍼런 눈빛을 했다.
“당장 여기서 사라지게.”
“......”
나창식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쾅!
나창식이 문을 세차게 닫고 나갔다. 권태복 회장이 긴 숨을 뱉어냈다.
“이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
“순리대로 풀어가면 됩니다. 강우 저 아이가 다 해결해 줄 거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백도종 이사가 설레는 기분을 느꼈다. 광복 이후 포기했던 것이 있었다. 조국이 진정한 독립을 이루었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잊혔던 젊은 날의 패기가 다시 샘솟고 있었다.
‘일단 광복회부터.’
백도종 이사가 권태복 회장을 바라보았다. 성품이 인자하고 다툼을 싫어하는 권태복 회장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결단을 내릴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회원들을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내가 나서야겠군.’
백도종 이사가 결심을 내렸다. 먼 예전처럼 다시 전쟁을 벌일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 * *
탁.
강우가 고급 세단에 올라탔다. 정 기사와 최 비서가 뒤를 이어 세단에 올라탔다.
“출발하겠습니다.”
정 기사가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세단이 주차장을 벗어나 도로에 올라섰다. 강우가 힐끗 광복회 건물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자신이 투하한 핵폭탄으로 난리가 났을 것이었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강우가 최 비서에게 물었다. 언론 보도가 나갔으니 그 반응이 궁금했다.
“부사장님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언론사 요청이 폭주하고 있습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 전체가 시끄러워질 것이다. 세상에 드러난 진실이 너무나 충격적일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지금은 광복회에 소속된 사람들뿐이겠지만….’
강우가 준비한 친일 명단은 정계와 재계에 모두 골고루 뿌리 박혀있었다. 강우는 차근차근 뿌리 뽑을 생각이었다. 어쩌면 이제부터 견제가 들어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자신만만했다. 동양 무역도 대진 그룹도 외부의 견제에 흔들릴 곳이 아니었다.
뚜르르. 뚜르르.
그때, 핸드폰이 울음을 토했다. 강우가 전화를 받았다. 연결 전부터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네, 형.”
-뭐야? 이제는 신기도 있어?-
강우가 픽 웃었다. 이재원의 목소리를 듣자 조금 전까지 달아올랐던 흥분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지금 뉴스 보면서 실실 웃고 있죠?”
-어? 이놈 봐라. 진짜인가?-
“실없는 소리 말고요. 재단 분위기는 어때요?”
이재원은 지금 사단법인 광복에 있을 것이었다. 오늘 터트린 기사들은 강우가 광복회에 온 사이 이재원이 주도했다.
-난리지 지금 전쟁터야. 여기저기서 전화 오고.-
“다들 고생이겠네요. 곧 그리로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래, 어서 와라. 전쟁이 났는데 지휘관이 적진에 있으니 불안했다고.-
“적진은 무슨….”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강우가 잠시 시트에 몸을 묻었다.
“한숨 주무십시오. 제가 도착하면 깨워 드리겠습니다.”
최 비서의 말에 강우가 고개를 끄덕했다. 그리고 잠시 눈을 붙였다.
* * *
“부사장님.”
귓가로 들리는 최 비서 목소리에 강우가 잠에서 깨어났다. 육체적인 능력이 강화돼 어지간하면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강우였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피로감이 느껴졌다.
“도착했습니까?”
“네,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취재진이 몰려들어 있습니다.”
강우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재단 건물 앞으로 각종 언론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예상했던 대로니까요.”
“그럼 준비된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주세요.”
최 비서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로인가 전화를 걸었다. 그사이 강우를 태운 세단은 사단법인 광복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박강우 부사장님이다!”
취재진이 강우의 차량을 알아보고는 달려들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취재진에 정 기사가 움찔할 정도였다.
“괜찮습니다. 멈춰서서 대기해주세요.”
“네, 부사장님.”
정 기사가 차를 세우고 사이드 브레이크까지 채웠다. 기자들이 밖에서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부사장님 통화가 끝났습니다.”
잠깐의 통화가 끝나고 최 비서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와 동시에 재단 건물에서 보안 요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취재진을 조금씩 안전히 밀어내며 세단으로 다가왔다.
“부사장님, 내리셔도 될 거 같습니다.”
강우가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뒷문을 열고 내렸다.
펑. 퍼퍼펑.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다. 그리고 강우를 향해 질문 폭풍이 쏟아졌다.
“오늘 발표한 친일 명단이 정말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까?”
“이런 중대한 일을 갑작스럽게 발표한 이유가 있습니까?”
“현재 명단에 언급된 분들이 사실을 부정하며 긴급 기자 회견을 열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우가 잠시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오늘 이후 이런 상황은 반복될 것이었다. 저들은 끝까지 진실을 부정할 것이고 강우가 밝힌 사실이 진실인지 의심하게 만들 것이었다. 언론들이 강우의 편을 들어줄 리도 없었다.
‘논란을 키우고 거기서 파생되는 이익을 좇는 집단이니까.’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번 일을 준비하며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인맥을 총동원해준 김광일 기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강우의 외로운 싸움이 시작될 것이었다.
“저는….”
강우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보안 요원들 사이로 이재원이 나타났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온 이재원이 강우 옆에 섰다. 강우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래, 혼자는 아니지.’
강우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많았다. 당장 눈앞의 이재원도 있었고, 집에서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을 가족도 있었다. 그리고 언제든지 강우를 믿어줄 이나은과 강우 말이라면 끝까지 함께해줄 친구들도 있었다. 강우가 기자들을 향해 당당히 입을 열었다.
“저희 사단법인 광복에서 배포한 자료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곧 우리 재단에서는 정당한 공을 인정받지 못한 독립투사분들의 신분 복원 사업도 병행할 예정입니다.”
기자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청년이 그 첫걸음을 내딛으려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사실과 증거자료에 기반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제 목적은 누구를 깎아내릴 생각도 누구의 공을 과대평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잘못된 민족의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할 뿐입니다.”
강우의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사단법인 광복의 관계자들이 먼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강우의 선언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재단에서는 올바른 역사 인식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시행할 예정입니다. 이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재단에서 배포하는 자료를 참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강우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 옆을 이재원이 든든히 함께해주었다. 멀어져가는 강우를 그 누구도 붙잡을 수 없었다. 그저 오늘 일어난 엄청난 폭풍에 대해 정리하고 기사를 적어 내려가기 바쁠 뿐이었다.
2001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광복을 찾은 지 56년이 지난 오늘. 강우가 대한민국에 던진 폭탄이 커다란 후폭풍을 일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