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기억하시죠?
서울 유명 호텔의 만찬장. 고급스럽게 꾸며진 이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잘 차려입은 사람들은 서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많은 사람 속에는 이재원도 있었다. 연회를 개최한 호스트인 만큼 제대로 꾸민 이재원은 정말 빛이 나고 있었다.
“사장님, 그래서요.”
이재원의 주변에는 젊은 재벌 2세들이 가득했다. 이재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문을 하나씩 답해주었다. 그렇게 질문을 받아주던 이재원이 슬쩍 몸을 빼냈다. 그리고 구석진 곳으로 향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음악들과 격식 있게 움직이는 사람들. 이재원이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순간 한숨을 푹 쉬었다.
‘하…. 소주 먹고 싶네.’
강우처럼 연기 가득한 대폿집이 훨씬 정감 간다고 느끼는 이재원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재원 사장님.”
이재원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SJ 그룹의 송경식이 있었다. 송경식이 양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 중 하나를 이재원에게 내밀었다. 이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잔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오늘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다들 모이고 말이죠.”
송경식이 부드럽게 웃었다. 호의적인 미소에 이재원이 도통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대진 그룹과 SJ 그룹은 사업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강우가 대진 그룹의 사업을 그렇게 설계를 했으니 말이다.
“이번 문화인의 밤은 저희 대진 그룹에서 주최할 차례였으니까요.”
“하긴 사장님이랑 부사장님 두 분이 이런 연회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건 아주 유명한 이야기죠.”
송경식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재원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마주칠수록 미워할 수 없는 스타일의 남자였다.
“전 강우랑 소주에 삼겹살 먹는 게 제일 좋습니다.”
“오! 저도 소주에 삼겹살 좋아합니다. 언제 한번 같이 자리하시죠?”
송경식의 제안에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시죠. 있다가 강우 오면 약속 시각 잡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부사장님도 오십니까?”
송경식의 눈이 대번에 빛을 발했다. 그동안 이런 자리에는 절대 모습을 비추지 않던 강우였다. 일각에서는 강우가 대인기피증이 있는 게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강우를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코웃음을 칠 소리였다.
“네, 조금 늦게라도 온다고 했습니다.”
“이거 오늘 제가 날을 제대로 잡았군요. 그렇게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해도 통 뵙기가 힘들었는데 말입니다.”
송경식의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 차올랐다. 그런 송경식의 표정에 이재원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동생 하나는 참 잘 두었다 생각했다. 이윽고 연회장의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강우가 오늘 만찬에 온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만찬장에 퍼져 나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강우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하자 주변의 이목이 남몰래 집중됐다.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했고, 그 대화 속에서 무언가 건질 게 없나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평화로운 분위기에 흥미를 잃어가던 찰나 강우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와…. 역시 부사장님 인기가 대단합니다.”
“하하….”
이재원이 멋쩍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폭발적인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만큼 재벌가 사이에서 신비에 쌓여있던 강우였다. 하지만 폭발적인 반응 속에서 모두가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일부 사람들은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물론, 전부 다 그런 거 같지는 않지만 말이죠.”
송경식이 눈을 빛내며 한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런 송경식의 표정에 이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송경식이 바라본 곳에 있는 무리는 이재원도 익히 알고 있었다. 바로 여러 언론사의 사주들과 2세들 그리고 사학재단을 이끄는 이사장들 그리고 이번 친일 명부 발표로 옛 과거의 행적이 드러난 몇몇 재벌들과 정치인들이었다.
“흥…. 드디어 나타나시는구먼.”
“내가 오늘을 아주 벼르고 별렀다고.”
강우를 향해 드러내는 진한 적대심에 이재원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몽땅 내쫓고 싶지만, 초대받은 손님들을 그럴 수야 없었다. 왜 초대를 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반대로 배제한다면 더 큰 뒷말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누가 누구를 벼른다는 말인지. 안 그렇습니까?”
“네?”
송경식의 말에 이재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송경식이 그런 이재원의 표정을 보며 씩 웃었다.
“그냥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아주 개인적인.”
연회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연회장에 있던 이재원을 보좌하는 김 비서가 다가왔다. 그리고 이재원의 귓가에 작게 말했다.
“부사장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알겠어요.”
김 비서가 말을 전하고는 만찬장을 떠났다. 이재원이 송경식을 보며 씩 웃었다.
“기다리시던 사람 왔다네요.”
“오? 이거 한창 말할 때 온 거 보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죠?”
이재원의 말에 송경식이 씩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만찬장의 문이 열리고 강우가 나타났다. 깔끔한 정장에 머리까지 말끔히 올린 강우였다. 건장한 체격에 남성미가 넘치는 외모에 뭇 여성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일순간에 자신에게 몰린 시선에도 강우는 담담했다.
“형, 저 왔어요.”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이재원에게 인사를 했다.
“어, 왔냐.”
강우가 슬쩍 이재원의 옆에 있는 송경식을 바라보았다. 송경식이 반가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부사장님, 오셨습니까? 저 기억하시죠?”
너무나 반가워하는 상대방의 표정에 강우가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꾸벅 인사를 했다. SJ 그룹의 사업을 진두지휘하는 송경식을 모를 수가 없었다. 강우와 송경식은 문화산업이라는 전쟁터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두 그룹의 지휘관이었으니까 말이다.
“안녕하세요. 송 본부장님.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본 게 청와대였죠?”
“네, 맞습니다. 청년 기업인 모임 때였죠.”
강우의 말에 송경식이 웃음을 터트렸다. 청년 기업인이라기에는 그 당시에도 나이가 많았던 송경식이었다.
“그때도 부사장님 한번 만나보려고 염치없이 나이가 있어도 참석을 했었는데 말입니다. 그 이후로 한 번을 만날 수가 없었군요.”
“아…. 그러셨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모임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요.”
송경식이 강우와 이재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분명 성도 다르고 부모도 달랐다. 심지어 생긴 것도 완전 반대였다. 그런 두 사람은 참 비슷한 게 많아 보였다. 그리고 서로의 경영 방식과 철학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솔직히 이건 좀 부럽군….’
늘 칼날 위에 서 있는 듯한 자신이었다. 물론 송경식의 형제자매들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SJ 그룹이 치열한 후계자 싸움을 하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반면 대진 그룹은 경영진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 중심에 박강우 부사장과 이재원 사장이 있는 거고.’
송경식이 부러움에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내 웃음을 지었다. 늘 그래야 했듯이 말이다.
“그래도 오늘이라도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앞으로 종종 만났으면 합니다. 아…. 이재원 사장님이 조만간 소주에 삼겹살을 먹자고 하더군요.”
강우가 이재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형이 웬일인가 싶었다. SJ 그룹은 적이라며 항상 전의를 불사르던 사람이 아니던가. 강우의 시선을 받은 이재원은 송경식을 바라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아…. 이거 당했네.’
역시 연륜과 경험에서 나오는 능글능글함에는 대책이 없다 싶었다. 하지만 그리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이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게 됐나 보다.”
“그래요? 그럼 언제 날 잡아요.”
대번에 허락하는 강우의 말에 송경식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몇 년 동안을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고, 약속도 잡으려 했던 송경식이었다. 그런데 이재원이 그렇다니 알겠다고 하는 모습에 부러움이 또 한가득 밀려왔다.
“오늘 만찬 끝나고는 어떻습니까?”
“오늘요?”
송경식의 화끈한 약속 제안이었다.
“네, 어차피 만찬장에서야 간단히들 먹을 테니까요. 끝나고 소주 한잔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네, 좋습니다. 그런데 저 엄청 많이 먹는 거 알고 계시죠?”
“하하…. 그렇습니까?”
송경식이 먹으면 얼마나 먹겠나 싶었다. 그런 송경식을 보며 이재원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송경식의 지갑이 제대로 털리겠다 싶었다.
“박강우 부사장.”
그때, 일단의 무리가 강우에게 다가왔다. 강우가 힐끗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살짝 미간을 좁혔다. 강우에게 다가온 일단의 무리 중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바로 광복회에서 쫓겨난 나창식이었다. 그 주위에는 여러 사학재단의 이사장들도 함께였다.
“안녕하십니까.”
강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나창식 이사가 입꼬리를 스르륵 올렸다.
“그동안 이런 자리에는 나타나지도 않고 숨어있더니 오늘은 어찌 자리를 했구먼?”
“숨어있었다고요? 제가요?”
강우가 픽 웃었다. 그 모습에 나창식 이사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강우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묘한 기운이 있었다. 그 기운은 묘하게 나창식의 기분을 건드렸다.
“당연하지. 그 말도 안 되는 친일 명부인가 뭔가를 출간해 사회 분열을 초래하고 있으니 무서웠겠지.”
나창식 이사의 말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강우가 서늘한 눈빛을 지었다.
“무서운 건 당신들이겠죠. 과거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숨어있던 적이 없습니다. 제가 왜 숨어있습니까? 전 당당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고 당신들보다 훨씬 당당한 방법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강우의 말에 나창식이 발끈하려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그런 나창식을 만류했다. 보는 눈이 많은 연회장이니 체면을 차리려는 것이었다.
“그래, 어디 두고 보자고. 재단에서 쓸데없는 일들을 추진하나 본데. 법은 항상 우리 편이니까 말이야.”
나창식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강우가 태연하게 답했다. 나창식과 이사장들이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이재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강우가 큰마음을 먹고 나온 자리였다. 그런데 시작부터 하루살이가 꼬인다는 생각에 말이다.
“강우야, 그냥 지금 나갈까?”
이재원의 말에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형은 주최자인데 어디를 가요. 있어야죠.”
“하아….”
송경식이 샴페인을 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강우가 힐끗 바라보니 얼굴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송경식이 씩씩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이를 먹으려면 곱게 먹을 것이지. 다 늙어서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송경식의 반응에 강우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재벌가 중에 독립운동에 대해 호의적인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창업주가 독립운동가이거나 후손인 곳 몇 곳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강우의 시선을 받은 송경식이 화를 삭이며 말했다.
“하아…. 정말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끔찍합니다. 아 물론 정말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오늘 든든한 동료 한 명이 더 생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연회는 이어졌다. 강우의 주변으로는 정말 엄청난 인원들이 몰려들었다. 강우와 말 한마디 섞어보려는 기업인들과 문화계 종사자들 그리고 언론사 관계자들까지 몰려들었다.
“줄이라도 세워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러다가 부사장님 압사하겠습니다.”
송경식이 그 엄청난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강우를 만나겠다고 정말 여기저기서 몰려온 듯했다. 심지어 문화인의 밤이라는 주제에 안 맞는 기업인들도 잔뜩이었다.
“아니 저 사람들 자기들 사업 이야기는 왜 자문하는 겁니까? 어어? 저거!”
송경민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탄식했다. 이재원이 씩 웃었다.
“강우가, 얼마나 힘이 센데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런 자리에 안 나오고 뺀 대가라고 생각하렵니다.”
“네?”
송경식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박강우 부사장님,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누군가가 강우를 향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강우가 말을 걸어 온 사람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네, 당연히 시간을 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