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1화 (261/402)

어떠세요? 대단하죠?

연회와는 어울리지 않은 캐쥬얼한 복장을 중년 남성이었다. 지적으로 생긴 얼굴에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안경 너머 보이는 눈빛은 형형히 살아있었다.

“반갑습니다. 윤석민 작가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박강우입니다.”

강우가 눈을 빛내며 손을 내밀었다. 윤석민 작가가 부드럽게 웃으며 강우의 손을 잡았다. 강우가 악수하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참 만나보고 싶었는데 오늘 이렇게 보네요.”

“저를요?”

윤석민 작가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오늘 초대장을 받았을 때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문화인의 밤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은 초대받을만한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네, 출간하신 책은 잘 봤습니다.”

“아….”

윤석민 작가가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젊었을 적 출간했던 역사책이 있었다. 밀리언셀러를 달성한 그 책은 논란이 있기도 했다. 윤석민 작가는 논란을 인정했고, 늘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모임은 어떠세요?”

“음…. 좀 어색하긴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워낙 쟁쟁하신 분들이 많아서요.”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눈앞의 남성 역시 곧 쟁쟁한 인물이 될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이제 곧 대선을 앞두고 있었다. 눈앞의 남성은 곧 절필을 결심하고 정치판에 뛰어들게 될 것이었다. 아마 지금쯤부터 깊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문화인의 밤이니까요. 작가님 말고도 다른 문화계 분들도 많이 오셨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고 즐겁게 있다가 가주시면 감사하죠.”

“그런가요? 이거 부사장님 말을 듣고 나니까 자신감이 막 생깁니다?”

특유의 위트 넘치는 표정과 말투에 강우가 씩 웃었다.

“윤 작가님이 자신감 하나는 끝내주시는 분이죠.”

“어? 저를 잘 아시네요.”

강우와 윤석민 작가는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었다. 과연 윤석민 작가는 다방면으로 박식한 인물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과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조목조목 의견을 말했다. 강우는 그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었다.

‘다음 대선에서 대통령이 될 분과 아주 가까운 관계인 분이지.’

강우는 미래 기억으로 차기 대통령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다. 다음 정권 때야말로 지금 강우가 추진하는 것들에 탄력을 받을 기회였다.

‘다만 다음 대통령은 지지율이 금세 추락하고 만다. 그리고….’

차기 대통령이 추진하던 많은 것들이 그대로 사장되고 만다. 강우는 이번 정권에서 반드시 해내야 할 것이 있었다. 그다음의 미래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 문제를 청산하는 건 절대 개인이나 기업 또는 단체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반드시 정부의 정책과 맞물려야 하니까.’

지금 한쪽에서 웃으며 대화를 하는 무리를 보며 강우가 서늘한 눈빛을 했다. 지금껏 쌓아온 자신들의 카르텔과 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저들은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마치 안전한 성벽 안에 있는 느낌일 것이었다.

‘그 성벽을 내가 무너트려 주마.’

강우의 서늘한 눈빛을 본 윤석민 작가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거칠었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또 달랐다. 금세 평정심을 찾고 담담한 모습을 보이는 강우였다.

“부사장님, 제가 명한 하나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당연하죠. 저도 제 명함을 드리겠습니다.”

강우가 품에서 명함집을 꺼냈다. 그리고 몇 개의 명함 중 한 개를 꺼내 들었다. 윤석민 작가도 명함을 꺼내 강우에게 주었다.

-작가 윤석민.-

심플하게 적힌 명함 아래쪽으로는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강우도 윤석민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사단법인 광복 이사장 박강우.-

윤석민이 명함을 확인하고는 눈을 빛냈다. 영리한 윤석민은 그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다.

“명함 잘 받았습니다. 조만간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꼭 연락하세요.”

윤석민 작가가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그렇게 한참 손님들과 대화를 나눈 강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같이 참석하기로 한 김광일을 찾는 것이었다. 강우의 동양 무역 스케줄 때문에 따로 오기로 했었다.

‘아…. 저기 계시네.’

김광일은 한쪽에서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있었다. 김광일의 주변에는 많은 언론사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다. 김광일이 재단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언론사들과의 관계가 크게 달라졌다. 오랜 기자 생활을 통해 넓혀 놓은 인맥은 정말 대단했다.

‘독립신문의 창간도 김 기자님이 없었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지.’

그 순간, 강우와 김광일의 시선이 마주쳤다. 김광일이 손을 들어 강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같이 대화를 나누던 언론사 관계자들도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이윽고 문화인의 밤 행사의 본격적인 시작이 알려졌다.

-여러분. 오늘 대진 그룹이 주최하는 문화인의 밤 행사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의 MC를 맡은 것은 아나운서 출신의 유명 MC였다. MC의 말과 함께 은은히 흐르던 음악이 멈췄다. 그리고 환하게 밝혀져 있던 조명도 조금 어두워졌다.

-먼저 오늘 참석하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오늘 모임의 주최 측인 대진 출판사의 이재우 사장님께서 인사를 드린다고 하십니다.-

MC의 말이 끝나자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이재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행사에 참여해주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진 출판사의 이재우 사장입니다.-

이재우가 정중히 인사를 했다. 연회장에 이재우를 맞이하는 박수 소리가 가득 찼다. 이재우가 정중히 굽혔던 허리를 피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먼저 오늘 드디어 어렵게 이 자리에 모신 분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주 보는 저보다 그분의 말로 오늘 행사를 시작하는 게 더 좋을 거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재우의 말이 끝나자 주변의 시선이 대번에 강우에게 몰렸다. 이재우에게 그러지 말라고 엑스 자를 표하던 강우가 움찔하며 팔을 내렸다. 그리고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진짜 재우 형님이 이럴 줄.”

“강우야, 잘하고 와.”

이재원이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송경식도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연회장 구석 쪽에 있던 강우가 앞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회장을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반으로 갈라졌다. 걸음을 옮기는 강우에게 호의적인 시선과 적대적인 시선이 뒤엉켜 쏟아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잔뜩 긴장할만했지만, 강우는 태연했다. 고작 이 정도로 긴장할만한 강우가 아니었다.

-자! 대진 그룹의 박강우 부사장님을 모셨습니다.-

MC 강우를 중앙으로 안내했다. 이재우가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 강우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마음껏 해라. 네 뒤에는 우리가 있으니까.”

“네, 형님.”

강우가 이재우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전방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사단법인 광복 이사장인 박강우입니다.-

강우는 자신을 사단법인 광복의 이사장이라 먼저 소개했다. 다른 직함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었다. 물론, 강우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다른 직함들을 사람들이 모를 리도 없었고 말이다. 강우의 이런 자기소개에 곳곳에서 불편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문화는 그 나라의 심장이고 생명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는 그 민족의 상징이고 첫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우의 말에 사람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묵직한 목소리에서 울리는 메시지가 가슴을 자극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민족이 나라를 잃었을 때도 침략자들은 가장 먼저 문화를 말살하려 했습니다. 그 민족의 정체성을 지우고 자신들의 문화를 강조했습니다. 그건 오랜 역사 속에서 항상 자행되어온 일이었습니다. 특히 일제에 의해 민족의 정기가 말살되던 때에는 그 강도가 더욱더 심했습니다.-

불편함을 띄던 몇몇 사람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대놓고 언급을 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일제가 저지른 온갖 한민족의 문화 말살 정책은 이미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었다. 그저 불편함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굴을 붉힐 뿐이었다. 반면 이재원은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빛냈다. 이런 모임에 첫 등장부터 화끈한 강우였다.

“어떠세요? 대단하죠?”

이재원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와…. 부사장님이 정말 화끈하십니다.”

송경식도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거침없이 행동하는 강우를 보며 더욱 호감을 느끼고 호기심을 가졌다. 강우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강우가 김구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읊었다. 그 말을 들은 연회장의 사람들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놀라움을 느꼈다. 이제껏 흔히 말하는 기득권이라 불리는 사람 중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은 그런 말들이었다. 그런데 오늘 강우가 그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잠들어 있던 민족의 진정한 영웅들을 깨우려 하고 있었다.

-김구 선생님의 바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저는 부족하나마 그 유지를 이어받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여러분 문화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것입니다. 문화의 힘은 세계 곳곳에 대한민국을 알리고 씨앗을 뿌릴 것입니다. 대진 그룹은 올바른 문화산업을 주도하고 제대로 된 역사관과 올바른 교육 속에서 문화가 꽃피우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로 뻗어나가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 관계자분의 많은 격려와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강우가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던 연회장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박강우! 박강우!”

이재우가 강우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강우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강우야, 역시 너는 대단한 놈이다.”

“나머지 행사 잘 부탁드려요.”

“그래, 이제 내가 알아서 하마.”

강우가 마이크를 이재우에게 넘겼다. 그리고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연회장을 보며 씩 웃었다. 한쪽에 있던 나창식을 비롯한 일단의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다른 의미로 잔뜩 흥분해 있는 그들을 보며 강우가 조용히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런 강우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MC를 이재우가 툭 하고 쳤다.

-아아! 여러분 박강우 부사장님의 훌륭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문화의 밤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MC의 말과 함께 오늘 준비된 여러 가지 공연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자리로 돌아온 강우가 이재원의 옆에 앉았다. 이재원과 송경식의 뜨거운 시선에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런 모임 대단한 거 없네요.”

강우의 말에 이재원과 송경식이 픽하고 웃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빨리 끝나고 삼겹살에 소주나 먹으러 갔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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