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1화 (271/402)

어서들 오거라.

슬픔이 지나간 병실 안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는 서로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특히 할아버지는 강우에게 부탁해 집에서 짐을 가져다 달라고 할 정도였다.

“정말 아프지 않아?”

“네, 형님. 괜찮아요.”

할아버지가 막내 할아버지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막내 할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하니 어렸을 적 기억이 전부 밀려들었다. 그리고 가족들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했는지도 기억했다. 그 화목했던 기억을 찾은 것만으로도 막내 할아버지는 참 행복했다.

“이것도 좀 먹어봐.”

할아버지가 막내 할아버지에게 전복죽을 내밀었다. 막내 할아버지를 위해 강우가 급하게 사 온 것이었다. 물론, 병원식이 나오지만, 맛이 없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네, 형님.”

막내 할아버지가 전복죽을 먹었다. 홀가분한 표정의 막내 할아버지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강우가 그 모습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한평생을 떨어져 지냈던 두 형제가 서로를 알아보는 데에는 일각이면 충분했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병실 문을 노크했다.

“네, 들어오세요.”

강우가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바로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의 유전자 검사를 위해 관계자들이 온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유전자 검사를 위해 잠시 샘플 채취가 있겠습니다.”

두 사람은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의 모발과 손톱을 채취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검사자가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진도 찍었다.

“그럼 이른 시일 내에 검사 결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직원들이 나가자 할아버지가 막내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결과는 볼 것도 없어. 너는 내 동생이 확실해.”

“그럼요 형님. 이제 전부 기억납니다. 아주 또렷이요.”

늦둥이로 태어난 막내 할아버지였다. 어느새 할아버지에게 동생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강우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사실 막내 할아버지의 기억이 돌아온 이상 유전자 검사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히려 할아버지가 검사하자고 했다.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막내 할아버지의 마음을 더 편하게 해주고 싶다고 하셨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는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지나간 세월만큼 서로 몰랐던 일들이 많았다.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는 때로는 웃고 또 울기도 했다. 특히 가족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막내 할아버지는 한동안 울었다.

“형님, 누이들은 잘 묻어 주었습니까?”

“그래, 막내야. 걱정하지 말아라. 마을 사람들이 유해를 수습해 놓았더구나.”

막내 할아버지가 고개를 푹 떨궜다. 세상에 남은 형제가 할아버지뿐이라는 사실에 너무나도 슬펐다. 전쟁의 상처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커다란 흉터를 남긴 것이다.

“형님, 아버지를 뵈러 가고 싶어요.”

“그래, 몸이 나아지면 한번 인사드리러 가자꾸나.”

할아버지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선묘에 갈 때 강우 너도 같이 가자꾸나.”

“네, 할아버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증조할아버지의 묘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선묘는 물론이고 증조할아버지와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는 잘해주지 않았던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에게 가족은 아픔이고 상실감이었다. 긴 세월이 흐르며 그저 가슴에 묻었었다.

“형님, 그거 아십니까? 강우가 처음 나를 만나러 왔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분명 처음 보는 사이인데 이상하게도 정이 가고 어색하지가 않았어요. 아니, 마치 오랜 시간 기다렸던 귀인이 나타난 듯 설레고 흥분됐어요.”

“그래, 우리 강우가 귀인이다.”

할아버지가 강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따듯한 손길에 강우의 마음이 푸근해졌다.

“형님, 아버지는 참 좋은 분이셨어요. 그렇죠?”

막내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떠올리며 물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참 좋은 분이셨지. 마을에 남아있는 옛날 사람들이 우리 가족의 묘를 돌봐주고 있더구나.”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강우에게는 증조할아버지는 동림동의 지주였다. 근방 일대의 땅이 대부분 증조할아버지의 것일 정도였다. 심지어 그곳이 오래 자리를 잡고 살던 고향이 아니었음에도 그 정도였다. 증조할아버지는 자식들이 독립운동을 하며 고향에서 깊은 시골로 터를 옮겼었다.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아버지가 마을 사람들에게 워낙 잘해주지 않았더냐.”

할아버지의 말대로였다. 증조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에게 참 많이 베풀며 사셨다고 했다. 가뭄이 들면 곳간을 열어 마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베풀었다. 풍년이 들면 크게 잔치를 벌여 마을 사람들과 기쁨을 함께 즐기기도 했다.

“맞아요. 기억납니다. 참 즐거운 시절이었죠….”

막내 할아버지가 기억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늦둥이로 태어나 가족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정말 행복한 시절이었다.

“아우야, 앞으로도 참 좋은 시절이 많이 남아있단다. 빨리 건강부터 회복해.”

“네, 형님. 이제 입맛도 돌고 살고 싶은 의욕이 생겼어요. 저 꼭 건강해질 겁니다. 그래서 형님이랑 우리 강우랑 행복하게 살 겁니다.”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었다.

똑똑.

그때, 병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우가 문으로 다가가 열었다.

“형아!”

양손에 꽃바구니와 과일 바구니를 든 강용이가 밝게 웃고 있었다. 강용이 옆에는 예쁘게 차려입은 어머니와 이나은이 있었다.

“아들.”

어머니가 강우를 보고 활짝 웃었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장하고 예쁜 장남이었다. 이나은도 강우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막내 할아버지의 일을 강우에게 듣고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랐다.

“역시 내 남자 친구가 최고야.”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슬쩍 문 옆으로 비켜섰다. 어머니와 이나은 그리고 강용이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막내 할아버지가 세 사람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들 오거라.”

처음 봤지만, 대함에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가족이라는 존재는 그런 느낌으로 막내 할아버지에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박강용입니다.”

먼저 박씨 가문의 마스코트 강용이가 꾸벅 인사를 했다. 중학생이 되었지만, 아직도 앳된 강용이의 모습에 막내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반갑다. 네가 우리 집 막둥이 강용이구나.”

“이거 할아버지 드리려고 샀어요.”

강용이가 꽃바구니를 내밀었다. 막내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바구니를 받았다. 강용이가 콧잔등을 훔치며 자랑스러워했다.

“제가 용돈 모은 거로 산 거예요. 저 잘했죠?”

“하하! 그래 잘했다. 고맙고.”

막내 할아버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순간 자신도 놀랐다. 이렇게 밝은 웃음을 터트릴 수 있는지 긴 세월 동안 자신도 몰랐다. 강용이가 강우를 보며 씩 웃었다. 마치 칭찬해 달라는 듯한 표정에 강우가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헤헤….”

강용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과일 바구니를 냉장고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막내 할아버지를 향해 인사드렸다.

“막내 아버님, 안녕하세요.”

“오오! 그래, 둘째 며늘아기구나. 만나서 정말 반갑다.”

어머니가 싱긋 웃었다.

“아버님이 정말 많이 그리워하셨어요. 이렇게 돌아오셔서 정말 감사해요.”

돌아왔다는 말에 또 고맙다는 말에 막내 할아버지가 잠시 침묵했다. 다시 차오르는 감정을 정리하는 것이다. 아마 한동안은 이러리라 생각했다. 닫힌 병실 문이 열리고 가족이 한 명 한 명 들어올 때마다 그리고 넓은 1인실 병실이 가족들로 채워질 때마다 말이다.

“고맙다….”

막내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어머니가 그런 막내 할아버지를 보며 오히려 밝게 웃었다.

“어서 퇴원하시고 우리 집으로 가세요. 제가 맛있는 음식 매일 만들어 드릴게요.”

“아우야, 우리 어멈 음식 솜씨가 아주 좋아.”

할아버지가 자랑하듯 말했다. 강용이도 할아버지의 말을 거들었다.

“정말이에요 할아버지. 우리 엄마 음식 솜씨 진짜 좋아요. 빨리 집으로 가요.”

“집으로?”

막내 할아버지가 순간, 광주에 있는 집을 떠올렸다. 짙은 외로움이 고개를 들려 했다. 그러자 강용이가 막내 할아버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네, 집으로요. 이제 우리랑 같이 살아요.”

막내 할아버지가 말을 잇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그래. 이제 나랑 같이 살아야지.”

“네, 형님.”

마지막으로 이나은이 막내 할아버지에게 공손히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님, 안녕하세요. 이나은이라고 합니다.”

“아이고~ 텔레비전에서 보던 것보다 실물이 훨씬 예쁘구나.”

막내 할아버지는 이나은도 단번에 알아보았다. 잘 알려진 스타이니 그럴만했다. 이나은이 조금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감사합니다. 어서 빨리 나으세요.”

이나은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막내 할아버지가 강우와 이나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허허…. 그럼 그럼. 우리 나은이가 얼굴만 이쁜 게 아니야 마음씨가 얼마나 착하고 곱다고.”

할아버지의 칭찬에 이나은이 더욱 얼굴을 붉혔다. 강우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친구가 막내 할아버지에게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자자 그러지들 말고 앉아.”

막내 할아버지가 자리를 권했다. 어머니와 이나은 그리고 강용이가 병상 맞은편에 앉았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막내 할아버지 곁을 지켰다. 강우도 한쪽에 앉았다. 막내 할아버지가 쓰는 특실은 참 넓고 좋았다.

“과일 깎아 드릴게요.”

“어머니, 제가 할게요.”

“같이해.”

어머니와 이나은이 사 온 과일 바구니의 포장을 풀었다. 어머니와 이나은이 나서자 과일들이 껍질을 벗고 영롱한 자태들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강용이가 재빨리 가장 맛있어 보이는 멜론을 포크로 찍었다. 그리고 막내 할아버지를 향해 다가갔다.

“할아버지, 제가 먹여 드릴게요. 아~”

“어?”

막내 할아버지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용이의 훅 들어오는 애교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녀석 그래 아~”

강용이가 씩 웃으며 막내 할아버지의 입에 멜론을 먹여 드렸다. 그리고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힘들면 말만 하세요. 제가 항상 도와드릴게요. 먹여 드리는 것도 문제없어요.”

“그래그래.”

할아버지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역시 박 씨 집 안 분위기 메이커는 강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 과일을 먹으며 웃음꽃이 피던 순간이었다.

“작은아버지!”

문이 벌컥 열리며 큰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큰집 식구들도 모두 함께였다. 큰어머니와 박선영은 재단에서 오는 길이었다. 마지막으로 박지영은 공부하다 말고 황급히 달려오는 길이었다.

“안녕하세요.”

큰집 식구들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각자의 손에는 막내 할아버지에게 드릴 선물들이 들려있었다.

“작은아버지, 여기는 제 딸들입니다. 이름이 선영, 지영입니다.”

“박선영, 박지영???”

막내 할아버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손녀들의 이름이 죽은 누이들의 이름과 같았다.

“그래, 첫째가 딸들 이름을 우리 누이들 이름과 똑같이 지었어.”

“아…. 그랬군요. 참 좋은 이름입니다.”

막내 할아버지가 큰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정립이라 그랬지? 돌아가신 큰형님을 똑 닮았구나. 그래, 반갑다.”

“네, 작은아버지.”

막내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큰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반갑다. 큰며느리구나.”

“네, 작은아버님.”

막내 할아버지가 큰집 식구들을 반겼다. 순식간에 가득 찬 병실을 바라보며 막내 할아버지가 눈시울을 붉혔다. 시끌벅적한 병실 안에 금세 가족의 온기가 가득 찼다. 지금 이 모습이 정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맞는지. 아니 꿈은 아닐지. 꿈이 아니라면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게 가족이구나.’

막내 할아버지가 가슴속으로 가족을 찾게 해줌을 또 감사하고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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