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3화 (273/402)

이건 술이 아니야.

덜컥.

문이 열리고 강우와 이지용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짐을 잔뜩 들고 있었다.

“어머! 빨리 들어들 와 무겁겠다.”

집에 있던 어머니가 두 사람의 짐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셨다. 강우와 이지용이 신발을 벗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실 한쪽에 짐을 내려놓았다.

“할아버지랑 작은할아버지는?”

“아…. 잠깐 앞에 산책하러 가셨어요. 짐 정리도 하고 해야 하니까요.”

강우가 이지용을 바라보았다.

“지용아, 돕는 김에 끝까지 돕고 가라. 끝나고 밥도 먹고 가고.”

“어, 나 잠깐 일 처리할 게 있어서. 나갔다가 저녁에 올게.”

이지용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두 사람은 거실에 놓인 짐을 다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에 가져다 놓을 것과 따로 보관할 것을 분류했다. 장정 둘이 나서자 순식간에 짐이 정리됐다. 특히 강우의 정리정돈 솜씨는 일품이었다.

“여기가 원장님이 쓰실 방이지?”

이지용이 문이 열려있는 방을 가리켰다. 방 안은 텅 비어있었다. 최준이 쓰던 방이었는데 이사를 나가시면서 짐을 모두 가지고 간 상태였다.

“어, 저기다 정리하면 되겠다.”

강우와 이지용이 막내 할아버지의 옷가지를 방으로 옮겼다. 강우가 방 안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음…. 필요한 것들을 채워놓아야겠네.’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가 오면 백화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막내 할아버지에게는 정말 해드리고 싶은 게 많았다. 이윽고 방 정리가 어느 정도 되었다.

덜컥.

때마침 문이 열리고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멈아, 우리 왔다.”

우리라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긴 세월 잃어버렸던 혈육을 집으로 데리고 온 그 심정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버님! 작은아버님!”

어머니가 밝은 목소리로 두 분을 반겼다. 강우와 이지용도 방 밖으로 나와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뒤쪽으로 막내 할아버지가 어색한 듯 서 계셨다.

“막내야, 여기가 우리 집이다. 그리고 이제 네 집이기도 하고.”

“네, 형님.”

할아버지가 막내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막내 할아버지의 얼굴에 진한 회한이 서렸다. 문득 광주에 있는 적막하고 외로움이 사무치던 집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집도 집이었다. 자신을 온전히 담아주던 작은 공간이었다.

‘조만간 정리하러 가야겠어.’

막내 할아버지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밀려드는 회한을 떨쳐냈다. 그리고 홀가분한 미소를 지었다.

“집이 참 좋네요. 형님.”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으셨다. 어머니도 강우도 밝게 웃었다. 막내 할아버지가 돌아오면서 강우 가족의 비어있던 자리가 채워졌다.

* * *

강우와 할아버지 그리고 막내 할아버지가 동네 근처에 있는 백화점에 나타났다. 집에 짐을 풀자마자 강우가 모시고 나온 것이다. 이지용은 급한 일이 있다며 집으로 갔다. 강우가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했고, 일을 처리하고 돌아온다고 했다.

“허허…. 강우야, 정말 필요한 게 없다니까.”

“왜 필요한 게 없으세요. 옷도 사야 하고 신발도 사야 하고 할아버지 방에 놓을 텔레비전이랑 선풍기도 사야 하고요. 일단 쇼핑을 하다 보면 계속 필요한 게 있을 거예요.”

강우가 안 들어가겠다는 막내 할아버지를 뒤에서 밀었다. 막내 할아버지가 ‘어어.’ 하며 백화점 안으로 골인했다. 할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며 또 흐뭇하게 웃었다. 인생의 황혼에서 만난 혈육에게는 해주고 싶은 것이 많았다.

‘아니 내 살점을 뜯어 피부병을 고칠 수 있다면 그것도 마다할 이유가 없지.’

할아버지가 먼저 들어간 두 사람을 따라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여름을 맞이해 백화점으로 피서를 온 사람들도 많았다.

“시원하고 좋구먼.”

할아버지도 부채질을 멈췄다. 저 앞쪽으로 강우와 막내 할아버지가 걸어가고 있었다.

“작은할아버지, 오늘 살 게 많으니까 천천히 둘러보고 가요.”

“허허….”

막내 할아버지가 탄성을 뱉어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눈에 보아도 비싼 것들투성이였다.

“그래, 막내야. 거절하지 말고 오늘 사고 싶은 거 다 사거라.”

“네, 형님. 그런데 제가 이렇게 돈 쓰는 거에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막내 할아버지의 말에 강우의 가슴 한쪽이 저렸다. 긴 세월 고생을 하고 살아온 막내 할아버지는 자신에게도 인색해져 있었다. 강우는 그게 싫었다.

“일단 시계부터 하나 사죠.”

“시계??”

막내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계가 갑작스럽게 왜 필요하나 싶었다. 하지만 강우가 이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바꿔드릴 테다.’

강우는 막내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인색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평소라면 생각지도 않았을 것들도 사려 했다.

“이것도 한번 차보세요. 이것도요.”

강우와 막내 할아버지는 시계 매장을 계속 돌아다녔다. 강우가 나타날 때마다 직원들이 잔뜩 긴장했다. 강우야 이미 잘 알려진 유명인사였고, 더군다나 이 백화점의 VIP였다. 강우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이 집중됐다. 이윽고 강우가 황금색으로 빛나는 시계 매장 앞에 도착했다.

“역시 여기 시계가 가장 예쁠 거 같아요.”

유명 브랜드인 만큼 막내 할아버지도 단번에 알아보았다. 화들짝 놀라며 강우의 소매를 잡았다.

“강우야, 이런 건 없어도 되는 건데.”

“아니에요. 이건 제가 그동안 못 사드린 생신 선물을 한 번에 몰아서 사드리는 거로 생각해주세요.”

강우는 막무가내였다. 막내 할아버지에게만큼은 그러고 싶었다. 강우가 막내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매장 직원이 친절한 미소로 강우와 막내 할아버지를 반겼다. 그 뒤를 이어 할아버지도 매장에 들어왔다. 강우는 오늘 제대로 지갑을 열 작정을 했다.

“여기 계시는 제 할아버지 두 분이 쓰실만한 시계로 부탁드립니다.”

“네, 그럼 제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매장 직원이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권했다. 두 분이 자리에 앉자 직원이 제품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품 안내를 친절히 들은 두 분은 몇몇 시계를 차보기도 했다. 이윽고 할아버지가 시계 하나를 골랐다.

“막내야, 이걸로 같이하는 게 어떻겠니?”

“네, 형님. 그런데 너무 비싼 거 아닌지….”

할아버지는 막내 할아버지와 똑같은 모양의 시계를 골랐다. 막내 할아버지는 가격을 보고 헛숨을 들이 삼켰다. 강우가 재빨리 나섰다.

“계산해 주세요.”

“네, 고객님. 잠시 앉아서 기다려 주시면 계산과 제품 포장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직원이 공손한 태도로 강우 일행을 대했다. 특히 할아버지를 알아보고는 더욱 그랬다. 이윽고 매장을 나서는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의 손목에는 강우가 사드린 시계가 차여져 있었다.

“허허…. 내가 우리 막내 때문에 덩달아 좋은 시계를 샀구나.”

“형님….”

막내 할아버지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가 들었어도 할아버지 앞에서는 막내였을 뿐이었다. 특히 나이 차이가 크게 나서 더욱더 그랬다. 두 분이 좋아하시는 모습에 강우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아직 쇼핑 안 끝났습니다.”

유명한 월드컵 대한민국 팀 감독의 말처럼 강우는 아직 배가 고팠다. 막내 할아버지에게 더 많은 것을 해드리고 싶은 욕심에 말이다. 강우가 백화점 한쪽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가리켰다.

“다음은 옷 보러 가요.”

강우가 막내 할아버지와 함께 의류 코너가 있는 층으로 향했다. 역시 가장 비싼 것을 사드린 결과일까? 막내 할아버지는 더는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셨다. 강우 가족이 돈이 많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뭐든지 직접 겪어봐야 실감이 나는 것이었다.

“음…. 어디 보자. 일단 평상복부터 사요.”

“그…. 그래.”

강우가 첫 매장에 들어갔다. 중장년층을 위한 브랜드 매장이었다. 강우는 옷을 계절별로 사드릴 생각이었다. 광주에 있던 집에서 병원행 짐을 쌌던 강우였다. 막내 할아버지의 옷가지가 단벌 신사라는 말이 모자랄 정도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정도만 사도 될 거 같구나.”

평상복을 잔뜩 산 막내 할아버지가 그만 사자며 강우를 말렸다. 강우의 양손에는 벌써 쇼핑백이 잔뜩 들려있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아직이요. 꼭 사야 할 게 있어요. 할아버지도요.”

강우는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를 양복점으로 모시고 갔다. 양복점 앞에 도착하자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물었다.

“강우야, 내가 양복 입을 일이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이건 나중에 사자꾸나.”

“그래, 지금도 짐이 그렇게 많은데….”

강우가 두 분 할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증조할아버지 선묘에 인사드리러 가야죠. 그때 입으실 옷 맞추는 거예요.”

강우의 말에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가 작게 탄성을 뱉어냈다. 그리고 말없이 양복점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양복 맞추려고 왔습니다.”

나이가 지긋이 든 양복점 주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님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어떤 분 양복을 맞추실 생각이십니까?”

“여기 두 분입니다.”

강우가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를 가리켰다. 재단사가 두 분을 보더니, 감탄했다. 할아버지는 키도 크고 나이가 드셨음에도 정정해 보이셨다. 그리고 막내 할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와 똑 닮아있었다.

“체격들이 좋으셔서 양복이 아주 잘 어울리겠습니다. 제가 최고로 편한 양복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럼 잠시.”

재단사가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의 치수를 쟀다. 그다음은 원단을 골랐다. 강우는 역시 최고급 원단으로 해달라 부탁했다. 재단사는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원단을 추천했다. 그리고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들어 주겠다 했다.

“그럼 가봉할 때 뵙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려요.”

양복을 맞췄으니 다음은 구두를 살 차례였다. 강우는 할아버지들을 모시고 구두 판매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역시나 구두를 사드렸다. 막내 할아버지에게는 여러 켤레를 사드렸다. 계속되는 쇼핑에 막내 할아버지는 입을 멍하니 벌리고 놀라셨다.

“강우야, 평소에도 보통 이렇게 쇼핑을 많이 해?”

어느새 강우가 들고 있는 쇼핑백의 양이 엄청나졌다. 사실 그걸 전부 강우 혼자 들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가족들이 강우가 장사라고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지만 말이다.

“아니요. 그런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요.”

“....”

막내 할아버지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이제 작은할아버지 방에 넣을 가전제품 사고 집에 가요.”

“그래, 고맙다.”

강우와 할아버지들은 마지막으로 가전매장에 들렸다. 강우는 막내 할아버지 방에 놓아드릴 가전을 샀다. 그렇게 쇼핑이 마무리됐다. 강우가 산 물건들이 어찌나 많은지 백화점에서 전부 집으로 배송해 주겠다고 할 정도였다.

“출출하지 않으세요?”

폭풍 같은 쇼핑이 끝나자 강우는 허기를 느꼈다.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도 시장하신지 고개를 끄덕이셨다.

“시간도 점심시간이고 어디 가서 간단하게 밥이라도 먹자꾸나.”

할아버지가 간단한 점심을 제안했다. 오늘 저녁 집에서 가족 파티가 있을 예정이니 많이 먹지 말자고 하는 것이다.

“음…. 작은할아버지 뭐를 제일 좋아하세요?”

강우가 막내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막내 할아버지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건강을 되찾으며 입맛도 부쩍 좋아진 상태였다. 먹고 싶은 것도 많았고 먹는 양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고민하던 막내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게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이리 즐거움일 수도 있었던 건가?’

새삼 느껴지는 소소한 행복이었다. 막내 할아버지가 결심을 내렸다. 오늘 하루 부려보는 사치였으니 제대로 해보자 싶었다.

“감자탕. 감자탕이 먹고 싶구나. 형님이랑 소주도 한잔하고 싶고.”

목적지가 정해졌다. 강우와 두 분 할아버지는 백화점을 나왔다. 그리고 근처의 감자탕집으로 향했다. 강우는 무려 감자탕 ‘대짜’를 시켰다.

“강우야, 대짜리는 너무 많지 않을까?”

막내 할아버지가 물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제가 많이 먹을게요.”

“아..”

막내 할아버지가 알겠다는 듯했다. 강우가 엄청난 대식가라는 걸 깜빡한 것이다. 음식이 나오고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는 소주도 시켰다.

“그런데 진짜 술 드셔도 괜찮으세요?”

약을 먹고 있는 막내 할아버지였다. 강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막내 할아버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건 술이 아니야. 형님이랑 처음 마시는 약주지. 약주.”

할아버지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셨다. 강우도 씩 웃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의 잔에 술을 따라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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