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막내가 이제 다 컸네.
다음 날. 강우네 집이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다. 백화점에서 도착한 물건들이 막내 할아버지 방에 놓이고 있었다. 물건들 도착은 어제저녁에 했지만, 가족 파티 때문에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막내 할아버지는 점점 채워지는 방을 보며 감회에 젖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막내야,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만 해라. 이 형님이 다 사주마.”
“네, 형님. 저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막내 할아버지의 말은 사실이었다. 방 안에 채워지는 물건들을 보며 지나간 세월도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방 안에서 강우와 아버지가 나왔다.
“정리 끝났습니다. 한번 들어가 보세요.”
강우의 말에 막내 할아버지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주방을 지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방을 확인한 막내 할아버지가 짧게 탄성을 뱉어냈다.
“좋구나.”
혼자 쓰기에는 딱 좋은 방이었다. 한쪽으로 놓인 옷장에는 백화점에서 사들인 옷들이 가득 차 있었다. 적당한 크기의 텔레비전도 있었고, 한쪽에는 더위를 식혀줄 선풍기도 있었다. 방구석에는 강우가 특별히 신경 써서 산 침구류가 놓여있었다. 무엇보다 좋은 건 눅눅한 옛집과는 달리 산뜻한 공기였다.
“한번 올라가 보세요.”
강우가 이불을 펼치며 말했다. 막내 할아버지가 이불 위에 앉았다.
“정말 편하구나. 고맙다 강우야.”
“불편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그래, 알겠어.”
막내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슬쩍 다가와 막내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텔레비전을 켰다.
“우리 막내 방에서 당분간 지내야겠구나.”
“네, 형님.”
두 분 할아버지를 보며 씩 웃은 강우가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함께 거실로 향했다.
“아버지.”
강우가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가 강우를 바라보았다.
“응, 아들. 왜?”
“우리 이사할까요?”
아버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사?”
“네, 어제 다 모이니까 집이 좁아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더 넓은 집으로 이사했으면 해요.”
아버지가 어제를 떠올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온 가족이 다 모이니 좁아 보이는 것은 맞았다.
“음…. 나야 강우 네가 그렇다고 하면 언제나 찬성이지. 그런데 생각해 놓은 곳은 있고?”
“재원이 형이 그러는데 회장님 사시는 쪽에 집 매물이 많이 나왔다고 해요.”
아버지가 화들짝 놀랐다. 이철금 회장이 사는 곳이라면 분명 한남동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여러 재벌가의 자택들이 몰려있는 곳이었다. 가격은 물론이고, 쉽게 집을 구하기도 힘든 곳이었다.
“한남동으로 이사를 하자는 거야?”
“뭐 꼭 거기로 가자는 건 아니고요. 일단 가서 집을 보고 마음에 들면 계약하는 거죠. 거기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곳들도 들러보고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의 말이라면 항상 따르는 게 이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긴…. 집이 넓으면 좋기는 하지.”
“그럼 아버지가 가족들한테도 이야기해주세요. 집은 저랑 엄마랑 보고 올게요.”
“알겠어.”
강우와 아버지의 대화가 끝났다.
“아빠~ 형아~”
마침 강용이가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나왔다. 강우와 아버지가 강용이를 보며 동시에 부드럽게 웃었다.
“우리 이사 가?”
대화 내용을 들었는지 강용이가 물었다.
“아직 결정된 건 아니고.”
“난 괜찮아요. 전학 가도. 가족 모두가 편한 게 먼저예요.”
강용이의 말에 강우와 아버지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자라버린 강용이가 제법 어른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 막내가 이제 다 컸네.”
아버지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강용이가 씩 웃으며 콧잔등을 훔쳤다.
“뭐…. 제가 전학을 가면 남아있는 애들이 슬퍼하겠지만요.”
“뭐?”
아버지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강용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다니고 있는 중학교에서 강용이의 인기와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일단 게임을 잘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거기다가 간혹 강용이를 보러 놀러 오는 최강의 존재가 있었다.
“요한이 형만 있으면 어디로 전학 가도 문제없어요.”
“뭐?”
이번에는 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강용이가 씩 웃으며 현관을 나섰다.
“그럼 당분간은 전학 갈 수도 있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다녀오겠습니다.”
강용이가 바람처럼 현관을 나섰다. 강우와 아버지가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픽 웃었다.
“그래도 강용이가 사춘기 없이 잘 크는 거 같지?”
“네, 그런 거 같아요. 대신….”
연애는 하더라고요라고 말하라던 강우가 입을 꾹 닫았다. 동생의 프라이버시는 지켜주고 싶었다.
“대신 이번에는 전학 가면 고등학교 졸업까지는 자리 잡고 있어야겠어요.”
“그래, 그래야지.”
아버지가 집을 쓱 둘러보았다. 이곳에 이사 오면서 정말 좋은 일이 많았다. 회사는 나날이 번창했다. 큰집과의 소원했던 관계도 회복했다. 그리고 막내 할아버지를 찾았다. 참 좋은 추억과 기억이 많은 곳이었다. 하지만 다음 이사할 집에서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럼 저 씻고 나갔다 올게요.”
“그럼 집은 언제 보러 가게?”
“아무래도 주말에 보는 게 좋겠죠?”
“그래, 그럼 엄마 모시고 주말에 다녀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강우와 아버지는 나갈 채비를 했다. 아버지는 동양 무역으로 향했고, 강우는 대진 그룹 본사로 향했다.
* * *
사라락.
사무실에 앉은 강우가 엄청난 양의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지금 검토하는 서류는 며칠 후 있을 대진 그룹과 SJ 그룹의 업무 협약서 최종 합의 서류였다.
“음….”
강우가 침음성을 뱉어냈다. 강우 앞쪽에 바짝 긴장한 채 서 있던 실무진들이 움찔했다. 수십 명이 넘는 엘리트들이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검토하고 검토한 협약 내용이었다. 자신들이 결정하는 글자 하나 문구 하나에 대진 그룹의 사업에 커다란 영향이 갈 것이었다. 그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의 양도 엄청났다.
“좋네요. 완벽해요.”
강우의 말에 실무진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몇몇 사람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그동안 강우에게 점검을 받으며 몇 번의 수정을 거쳤는지 몰랐다. 정말 놀랍게도 강우는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붙잡은 서류들의 오류와 잘못된 부분을 단번에 찾아내고는 했다.
“부사장님, 감사합니다.”
“고생들 하셨어요. 오늘 팀원들 데리고 회식들 하세요. 제가 총무팀에 지시해 놓겠습니다.”
강우의 말이 끝나자 실무진들이 찔끔 눈물을 흘렸다. 서류를 점검받는 기간 내내 강우는 괴물 같은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런 강우를 보며 얼마나 놀랍고 또 한편으로는 위축됐는지 몰랐다. 물론, 강우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우리는 며칠을 끙끙대던 문구 하나 내용 하나를 단번에 해결해 버리시니….’
실무진 대표가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생 많았어요.”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실무진 한 명 한 명을 격려해 주었다. 고된 일을 치렀으니 강우는 후한 보상을 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건 재원이 형을 통해 말하는 게 좋겠어.’
이윽고 실무진들이 부사장실에서 나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이재원이 들어왔다.
“오케이 떨어졌다며?”
“네, 사실 마지막 점검이었죠. 진작에 오케이는 떨어진 거고요.”
강우의 말에 이재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강우가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정말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고 깔끔했다. 몇 번의 확인을 거치고 또 거치는지 회의와 수정에 익숙한 대진 그룹의 실무진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럼 이제 날짜만 잡으면 되는데 말이야.”
“제가 원하는 날이 있기는 해요.”
강우의 말에 이재원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어떤 날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언제가 좋을까? 8월 14일? 아니면 16일?”
“14일이 좋겠어요.”
강우의 말에 이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상관은 없었다. 사실 실무적인 합의는 전부 끝났고 이제는 각 그룹의 대표자가 업무 협약서에 사인하고 언론에 알리는 행사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래, 알겠어. 송 선배한테 말해 놓을게. 아마 선배도 그날이면 좋다고 할 거야.”
“네, 부탁드릴게요.”
업무 이야기가 끝나자 이재원이 슬쩍 물었다.
“집은 이사하기로 했어?”
“네, 이번 주말에 엄마 모시고 집 보러 가려고요.”
“오케이. 그럼 내가 그쪽 부동산 관계자한테 말해 놓을게.”
“고마워요.”
강우가 씩 웃었다. 그리고는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리고 토요일은 힘들 거 같고요. 일요일에 가는 거로 해주세요.”
“그래? 토요일은 어디 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토요일은 정말 중요한 날이었다.
“네, 광주에 가요.”
“아…. 그랬구나.”
이재원이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 가족은 모두가 모여 광주에 가기로 했다. 한동안 찾아가지 않던 선묘도 찾아가기로 했고, 막내 할아버지가 살던 집도 정리해야 했다.
“잘 다녀와라. 조심히.”
“네, 그럴게요.”
* * *
덜컥.
문이 열리고 잔뜩 상기된 표정의 강용이가 나타났다. 평소와는 다르게 어린이 정장으로 잘 차려입은 강용이었다.
“준비됐어요?”
강용이의 말이 끝나자 안방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왔다. 아버지와 어머니 역시 차분한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래, 강용아.”
아버지가 강용이에게 다가가 머리를 매만져 주었다. 중학생이 되어 짧게 자른 머리 때문에 이 대 팔 머리 스타일을 못 해주는 게 아버지는 참 아쉬웠다. 이윽고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도 방에서 나오셨다.
“아버님, 작은 아버님, 참 잘 어울리세요.”
두 분은 강우가 양복점에서 맞춘 양복을 입고 있었다. 할아버지야 워낙 키도 있으시고 체격도 있으셔서 잘 어울렸고, 막내 할아버지는 잘 차려입으니 완전히 딴사람 같았다.
“고맙구나. 강우가 맞춰준 양복이 이렇게 편할 수가 없어.”
“저도 너무 편합니다. 형님.”
두 할아버지가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할아버지는 막내 할아버지의 옷매무시를 잘 가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막내 할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막내야.”
할아버지가 조금 긴장된 목소리로 막내 할아버지를 불렀다.
“네, 형님.”
막내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긴장감을 느꼈다.
“나도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 어머니를 뵈러 가는구나.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외면하고 살았어. 이렇게 너를 다시 만나 인사를 드리러 가지만, 죄송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구나.”
“형님….”
막내 할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긴 세월 가족 모두를 잃고 선묘에 가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니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오늘은 막내 너를 데리고 가니 부모님도 누이들도 다 이해해주겠지?”
“네, 형님. 그게 가족이니까요.”
할아버지가 눈시울을 붉혔다. 긴 세월이 흘러 가족을 모두 잃고 자식들과의 관계도 단절됐던 할아버지였다. 부모님의 묘소에 찾아간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그게 너무 죄송스럽고 부끄러웠다.
“아버지, 오늘 이렇게 온 가족이 인사를 드리러 가니 분명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그리고 고모님들도 전부 좋아하실 겁니다.”
“그래그래.”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꼭 안아주었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강용이가 찔끔 눈물을 흘렸다. 이제 제법 커버린 강용이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다들 준비되셨죠.”
마지막으로 역시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은 강우가 준비를 마치고 방에서 나왔다. 순간 모든 가족의 시선이 강우를 향했다. 가족들의 눈빛에는 강우를 향한 신뢰가 가득 담겨있었다. 강우가 낮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보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은 좋은 날이었으면 해요. 다들 즐거운 마음으로 인사드리러 가요.”
가족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현관으로 다가가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 눈시울이 붉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자식….”
“형아.”
강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출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