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9화 (279/402)

미안해할 거 없네.

어둠이 내려앉은 마을. 마을 회관 앞의 평상에 강우가 누워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때, 마을 회관에서 박경선이 나왔다. 밤하늘을 감상하던 강우가 인기척을 느끼고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술기운이 조금 돌아 불그스름한 박경선이 보였다.

“아…. 어르신.”

강우가 뒤로 누웠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박경선이 강우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 손에 들린 수박 한 조각을 내밀었다.

“먹어봐. 서울에서 먹던 거랑은 다를 거야.”

“감사합니다.”

강우가 수박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박경선이 부드럽게 웃었다.

“강우야, 오늘 정말 고마웠다. 마을 사람들이 정말 즐거워했어.”

“저희도 즐거웠어요. 맛있는 것도 엄청 먹었고요.”

마을 사람들이 준비해준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강우 가족을 위해 정성을 다한 음식들이었으니 당연히 그랬다. 강우는 음식을 먹으며 마을 사람들의 따듯한 정을 느꼈다.

“다행이구나. 처음 와서 이곳이 어색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어색하기는요. 할아버지의 고향이면 제 고향이기도 하죠.”

박경선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어느 날 전쟁에 끌려갔다던 재봉이 나타났던 날을 말이야. 일본으로 유학하러 갔던 재봉이 독립군이 되어 나타날 줄 마을 사람들 그 누구도 알지 못했어.”

“그랬군요.”

강우가 눈을 빛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또 새로웠다.

“그래, 그렇게 재봉이 다녀간 이후 진식 어르신께서는 독립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하셨어. 그 일에는 박씨 가문의 모두가 동참했어. 특히 돌아가신 안주인 마님이 아주 대단한 활약을 하셨지.”

“증조할머니께서요?”

박경선이 옛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말 대단한 분이셨어.”

“그랬군요.”

“그래, 그렇게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지원하고 자식까지 독립운동을 하니 일제가 좋게 볼 리가 없었지. 결국, 어르신도 순사 놈들에게 몇 번이나 끌려갔는지 몰라. 하지만 어르신이 가진 지역의 명성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어.”

박경선이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순사들이 강우의 증조할아버지에게 부렸던 행패를 떠올리면 지금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결국, 일제 놈들의 행패가 심해지자 어르신은 결단을 내리셨지. 가산을 모두 정리하고 터전을 옮기기로 말이야. 일은 순식간에 처리가 됐지. 어르신이 가지고 있던 땅이며 가택들을 노리던 사람들이 워낙 많았으니까. 어르신은 가산을 정리하기 전 답전 일부는 소작농들에게 그냥 주시기도 했어. 참 대단하고 고마우신 분이었지.”

강우의 증조할아버지는 정리한 가산을 가지고 가족이 새로 머물 곳을 찾아 나섰다. 바로 그곳이 지금의 동림동이었다. 그 당시 지금의 마을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고 했다. 증조할아버지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셨다고 했다.

“어르신이 마을을 떠나시던 날 많은 사람이 어르신을 따라나섰지. 어르신은 따라나서는 사람들을 내치지 않으셨어. 오히려 긴 여정 동안 돌봐주고 감싸주셨어. 결국, 우리는 어르신과 함께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됐어. 이 마을은 어르신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마을이지.”

“그런 유례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강우가 탄성을 뱉어냈다. 지금 와있는 이곳은 단지 선묘가 있는 곳이 아니었다. 증조할아버지와 가족들이 일구어낸 삶의 터전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지원한 것이었다.

“그런 것들이 전부 알려지지 않은 건 참 안타까운 일이야.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

박경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박씨 가문이 겪어야 했던 일들에 비해 너무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강우가 그런 박경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이제 하나하나 밝혀나가고 있으니까요.”

“그래, 나도 잘 알고 있지. 강우 네가 잊힌 독립운동가분들의 공로를 밝혀내고 있는 것 말이야.”

박경선이 강우를 보며 대견해했다. 강우는 옛 광복군 사령부터에서 발굴한 장부로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분들의 신원복원 사업도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성과를 거두고도 있었다. 강우가 보훈처를 상대로 재심사 요청을 진행한 몇몇 분들에게 좋은 소식이 곧 있을 것이라 했다.

“원래 해야 했던 일이니까요. 그리고 마을 분들에게도 감사하고 있어요.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실 때 마을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다고 했어요.”

“흠흠…. 우리가 뭐 한 게 있나…. 그저 재봉의 행방에 관해 물으면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었지.”

박경선이 조금 부끄러운 듯 말했다. 하지만 강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행동 역시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할아버지는 정말 1급 수배자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마을에는 정말 많이 안 남아 계시네요?”

“시골이 다 그렇지. 장성한 자식들은 전부 도시에 나가서 먹고살기 바쁘고 남아있는 늙은이들이나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는 거 아니겠니?”

박경선의 얼굴에 쓸쓸함이 스쳐 지나갔다. 박경선의 슬하에도 자식이 여럿 있다고 했다.

“자주들 내려오고는 하나요?”

“뭐…. 사는 게 다들 힘들고 바쁘니….”

박경선이 말끝을 흐렸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침체하며 수많은 중산층의 몰락이 있었다. 그리고 서민들은 더욱더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죠. 다들 힘들죠.”

강우가 마을을 쓱 둘러보았다. 그리고 결심을 내렸다.

“어르신, 제가 마을을 좀 바꿔 놓고 싶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이 마을은 증조할아버지의 손길이 닿아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막내 할아버지가 살던 곳이고요. 오늘 마을을 자세히 둘러봤어요. 손봐야 할 곳이 많더라고요.”

박경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젊은 사람들이 떠나가며 마을은 점점 늙어가고 있었다. 집을 보수할 사람도 허물어져 가는 농사 시설을 관리할 사람도 없었다.

“부담 갖지는 마세요.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이 마을은 제게도 소중하고 중요한 곳이니까요. 그냥….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요.”

“......”

박경선이 멍한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강우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벌어지는 일들도 평범하지 않다는 것도 말이다.

“일단 낡은 집들부터 전부 다 수리할 거예요. 그리고 마을 공동 창고도 새로 짓고요 농기구들도 새로 들일게요. 그리고 농사에 필요한 기계들도 전부 사드릴게요. 마을 회관도 더 크고 더 좋게 새로 짓고요. 마을로 들어오는 길도 정비할게요.”

“가…. 강우야.”

박경선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강우는 그야말로 마을 그 자체를 바꿔 놓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우의 결심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마을 사람들의 자제분들이 이곳에 돌아왔을 때 잘 쉬고 뿌듯한 곳이 되었으면 해요. 제가 앞으로 신경 많이 쓸게요. 마을도 마을 사람들도요.”

박경선이 울컥하는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존경하는 어르신을 따라 이곳에 정착한 세월이 정말 길었다. 그리고 이 마을을 이루며 기쁨도 슬픔도 같이했다.

“미안하다. 우리는…. 우리는 어르신과 가족들을 지켜드리지 못했어…. 그런데 우리가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박경선이 고개를 푹 떨궜다. 아직도 강우의 증조할아버지와 가족들이 죽임을 당하던 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가장 존경하던 분과 가족들의 죽음 앞에 무기력하고 참담했다.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전쟁은 그런 거니까요.”

“미안하다.”

그때였다.

“미안해할 거 없네.”

마을 회관에서 할아버지가 나오셨다. 기분 좋게 약주를 한잔하신 할아버지의 얼굴은 불그스레했다. 할아버지가 박경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오랜 시간 사죄하며 살아들 왔지 않은가. 그리고 내가 신경 쓰지 못한 우리 가족들을 돌봐주었고.”

“이보게….”

할아버지가 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우야, 잘 생각했다. 역시 너는 항상 옳은 선택을 하는구나. 고맙다.”

“아니에요. 여기가 우리의 뿌리라면 잘 가꿔야죠.”

강우가 멋쩍게 웃었다. 할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마을이 시끌시끌했다. 강우 가족이 떠난다는 소식에 마을 사람 전부가 배웅을 나온 것이다.

“어르신, 그럼 연락 드리겠습니다. 다시 찾아올 때까지 건강하세요.”

강우가 박경선을 보며 말했다. 마을의 이장을 맡은 박경선과는 앞으로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래, 강우야. 할아버지 잘 모시고 올라가거라.”

“네, 그럼.”

강우와 박경선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가족들도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단지 하룻밤이었지만, 강우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부쩍 친해져 있었다. 특히 강용이가 가장 인기가 있었다.

“우리 막둥이 서울 가서 공부 열심히 해.”

“건강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마을 사람들은 그새 강용이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었다. 누구는 도시에 나간 자식의 어릴 적을 또 누구는 매일 보고 싶은 손주들을 떠올렸다.

“네, 이번 명절 때도 또 올 거예요. 다들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강용이가 꾸벅 인사를 했다. 마을 사람들이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석별의 정을 한참이나 나누었다. 마을 사람들은 강우 가족이 떠나는 것을 정말 아쉬워했다. 하루를 더 머물고 가라고 붙잡기도 했다. 하지만 박경선이 나서서 말렸다.

“에끼~ 이 사람들아. 강우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다음에 또 온다고 하니까 그만들 보내줘.”

박경선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물러났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꾸벅 인사했다.

“그럼 또 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가족 모두가 미니버스에 올라탔다.

“다들 안전띠 매주세요. 출발하겠습니다.”

버스 기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강우 가족들이 모두 안전띠를 맸다. 강우가 버스 기사를 향해 말했다.

“출발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창문을 열고 마을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특히 강용이는 크게 소리쳤다.

“안녕히 계세요!!”

마을 사람들도 손을 흔들며 강우 가족을 배웅했다. 버스가 마을을 벗어나는 순간까지 마을 사람들은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가족들 모두가 고개를 돌려 멀어져가는 마을의 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았다. 처음 오는 고향은 이상하리만큼 따듯하고 정다웠다.

“강우야.”

마을에서 벗어나자 할아버지가 강우를 불렀다.

“네, 할아버지.”

“내가 죽거든 이곳 부모님 옆에 묻어다오. 그리고 이 마을을 사람들을 부탁한다. 강우 너라면 이 할아비가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겠구나.”

할아버지가 강우의 손을 따듯이 잡아주었다. 강우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결혼하고 손주 낳고 손주가 결혼할 때까지 사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강우의 말이 끝나자 옆에서 듣고 있던 강용이가 끼어들었다.

“할아버지, 나도요.”

강용이의 말에 짐짓 무거웠던 할아버지의 표정이 풀렸다.

“예끼! 이놈아 내가 그럼 백 살도 넘게 살아야 하는데?”

“백 살 넘게 사시면 되죠.”

강용이가 씩 웃으며 콧잔등을 훔쳤다. 할아버지가 그런 강용이를 보며 말없이 웃으셨다. 마을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막내 할아버지도 말을 거들었다.

“형님, 이제야 만났는데 앞으로 백 년은 더 같이 저랑 있어 주셔야 합니다.”

“허…. 거참….”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미니버스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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