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3화 (283/402)

영화랑 드라마.

매에엠. 메에엠.

늦은 밤이었지만, 매미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강우와 이나은은 손을 잡은 채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강우 집에서 저녁을 먹고 한참이나 있던 이나은을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아~ 좋다. 이런 한가한 기분 정말 오랜만이야.”

이나은이 강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오늘 이나은의 표정은 근래 들어 가장 밝아 보였다. 강우가 그런 이나은을 보며 헤벌쭉 웃었다.

‘예쁘다.’

강우가 헤벌쭉 웃자 이나은이 킥하고 웃었다.

“너는 내가 그렇게 좋아?”

“어? 당연하지.”

강우의 사뭇 진지한 표정에 이나은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나은의 기분이 한껏 좋아지자 강우가 슬쩍 물었다.

“아까 차에서 부재중 전화 엄청 오던데 연락은 해봤어?”

“응, 부장님 전화.”

대진 엔터테인먼트를 이끄는 김성현 부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한창 바쁜 이나은에게 김성현 부장의 전화였다. 분명 중요한 스케줄이 생긴 게 아닐까 싶었다.

“무슨 일은 아니고 나 차기작 때문에 전화하셨더라고.”

“차기작? 영화? 드라마?”

강우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현재 이나은을 잡기 위한 충무로와 방송국 간의 경쟁은 치열했다. 떠오르는 차세대 주연배우로 주목받고 있는 이나은이었다. 강우가 알고 있는 기억 속 미래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더 높이 인기를 얻어가고 있었다.

“응, 영화랑 드라마.”

“그래? 이야~ 우리 여자친구 대박이네. 이대로 쭉쭉 나가서 시상식에서 상도 받고 할리우드도 진출하자!”

넘치는 강우의 의욕에 이나은이 킥하고 웃었다. 하지만 이내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잘 모르겠어.”

이나은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순간, 살짝 가라앉은 이나은의 분위기에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무슨 작품 할지 고민 중이야?”

“음….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 다른 고민도 있어.”

이나은이 걸음을 멈추고 강우를 바라보았다. 진지한 그 표정에 강우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말해 봐. 무슨 고민인데.”

“우리 잠깐 앉을까?”

이나은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주변에는 공원이 있었다. 늦은 여름밤 더위를 피해 제법 많은 사람이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이나은이 한쪽에 있는 벤치를 발견했다. 이나은이 손을 뻗어 강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벤치 쪽으로 데리고 갔다. 강우와 이나은이 벤치에 앉았다.

“강우야.”

이나은이 강우를 불렀다.

“응, 말해 듣고 있어.”

강우가 몸을 틀어 이나은 쪽으로 더 가까이 붙었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강우의 체취에 이나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제 제법 연애 기간이 긴 두 사람이었지만, 이나은은 강우를 만날 때마다 늘 새롭고 설렜다.

“나 사실 요즘 조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얼마 전부터 스케줄도 취소했었고.”

“많이 피곤해?”

대부분의 인기 연예인들이 그렇듯 이나은 역시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했었다. 물론 대진 엔터테인먼트가 소속 연예인을 마구잡이로 굴리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대형 기획사들과는 달리 대진 엔터는 소속 연예인의 의사를 가장 존중해 주는 곳이었다.

“아니, 내가 다 하고 싶어서 했던 일인데 뭐….”

“원래 사람이 흥이 나서 막 일할 때는 모르다가 어느 순간 번아웃이 오기는 하지.”

강우의 말에 이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인 데뷔 이후로 참 순탄한 길을 걸어온 자신이었다. 무명기간이랄 것도 없이 인기를 얻었고, 과분할 만큼의 사랑도 받았다. 한동안은 사랑을 받고 높아져 가는 자신의 위치에 얼떨떨하기도 했다.

“그런가?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무언가 의욕이 생기지를 않아….”

강우가 이나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이나은이 가진 재능은 참 빛이 나는 것이었다. 어디를 가나 군계일학이라 할만한 미모와 연기에 대한 타고난 재능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미래의 기억 속 나은이는 유명해지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었지. 아니 오래 걸렸다기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까.’

미래의 기억 속 이나은과 지금의 이나은이 다른 것은 없었다. 다만 미래의 기억 속에서 이나은은 잠시 연예계에서 활동을 중지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도 병이 생겼다는 둥 재벌가에 시집을 간다는 둥 참 이야기가 많았었는데….’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 강우의 앞에는 화려한 조명 속 인기배우 이나은은 없었다. 다만 죽쳐진 어깨만큼이나 지쳐 보이는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있을 뿐이었다.

“많이 힘들어?”

강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나은에게 물었다. 이나은의 축져진 어깨가 살짝 떨렸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강우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어주는 존재였다. 이나은이 강우를 바라보았다. 오늘만큼은 조금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응, 힘들어. 그냥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도 힘들고, 나한테 쏟아지는 기대감도 부담스럽고 무엇보다 혹시 내 직업 때문에 강우 너랑 잘못될까 봐도 힘들어.”

“나은아,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어떤 직업을 가져도 중요한 건 우리 둘의 마음이야.”

이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나은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예계에 대해 알아갈수록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군다나 훨씬 옛날 일이기는 했지만, 이철금 회장과 김세아의 일도 자세히 알고 있는 이나은이었다.

“알지. 나도 잘 알아. 그런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어쩌면 내가 요즘 힘들어서 핑곗거리를 찾는 거일지도 모르고.”

“나은아, 나는 네가 얼마나 재능이 있고 연기를 사랑하는지 잘 알아. 지금은 갑자기 쏟아지는 것들 때문에 잠시 힘들 거야. 하지만 나는 네가 지금, 이 순간을 즐겼으면 좋겠어. 수많은 연예인 그리고 연예인 지망생들이 나은이 너를 부러워하고 있을 거야. 그리고 너는 그들에게 롤모델일거고. 나는 네가 자기 일을 사랑하고, 더 유명해졌으면 좋겠어.”

“정말?”

이나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예인 데뷔를 하기 전 강우는 이나은의 데뷔에 소극적이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그 당시도 이나은은 강우의 여자친구로 있는 것이 더 좋았었다. 하지만 데뷔를 하고 나서는 최선을 다해 도와준 강우였다.

“그럼, 그래서 나랑 같이 그 선한 영향력으로 세상을 바꾸어 나갔으면 좋겠어.”

“영향력….”

이나은이 강우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강우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나이의 강우는 참 많은 것들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이 닿고 인연이 닿는 곳마다 선한 영향력을 베풀었다. 힘든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올바르고 합당한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세상이 모른척하던 약자들을 위해 싸움을 서슴지 않았고, 모두가 쉬쉬해오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싸웠다.

“네가 힘이 들면 지금처럼 내가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게. 지치고 피곤하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피로회복제가 되어줄게. 그리고 고민이 있을 때는 같이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자. 바로 지금처럼.”

강우의 신뢰가 가득한 눈빛에 이나은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나은이 예의 그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나는 너 없으면 안 될 거 같아. 이렇게 멋진 남자가 어디서 내게 나타난 걸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명한 여자가 하늘에서 떨어진 걸까요 땅에서 솟아난 걸까요?”

마치 연기를 하듯 장난스러운 강우의 말투와 행동이었다.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마치 공주가 된 듯 연기했다.

“그럼 저에게 청혼해주시는 날은 언제일까요?”

“허락하신다면 언제든지.”

강우와 이나은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바탕 어리광을 부리고 난 이나은이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았다.

“강우야, 지켜봐 줘. 가장 높은 시상식에 올라가는 날 꼭 너에게 고맙다는 말은 먼저 할 거야. 그리고 정말….”

이나은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가 오늘은 더욱더 부끄러워지는 이나은이었다. 강우가 그런 이나은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거 나은이 부모님이 들으시면 엄청 섭섭해하시겠는데?”

“아…. 그러겠지?”

두 사람이 대화를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둑한 주변과는 달리 두 사람이 앉은 벤치는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벤치를 비추는 조명이 마치 무대처럼 이나은을 돋보이게 했다. 강우가 이나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 정말 예쁘다.”

“응?”

자신도 모르게 나온 강우의 말에 이나은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잠시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저…. 저기! 혹시 이나은 씨입니까?”

강우와 이나은이 화들짝 놀라며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특히 이나은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강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미쳤지 미쳤다며 중얼거렸다.

“네, 안녕하세요.”

이나은이 빠르게 부끄러움을 수습했다. 그리고 자신을 부른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라는 말이 정확했다. 강우와 이나은이 앉은 벤치의 앞쪽으로 기다란 줄이 생겨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두 분의 좋은 시간을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가장 앞줄에 서 있는 사람은 남성이었다. 이나은을 알아보고 찾아온 팬이 분명했다.

“사인을 받고 싶어서 왔는데 두 분이 너무 진지하게 대화 중이시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둘씩 줄을….”

남성이 말끝을 흐리며 뒤로 매고 있던 가방을 풀었다. 남성이 가방에서 팬과 종이를 꺼냈다.

“사인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나은이 싱긋 웃었다. 홀가분해진 이나은의 미소는 정말 아름다웠다. 남성이 잠시 멍하니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이나은이 남성의 손에 있는 펜과 종이를 가져와 사인해주었다.

“여기요.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나은의 말에 남성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강우를 살짝 보더니, 갈등의 빛을 떠올렸다. 남성이 이내 결심을 한 듯 강우에게도 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박강우 씨의 사인도….”

“아…. 네.”

강우가 이런 참 인정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사인을 해주었다. 남성이 조금은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네, 저도….”

남성이 이나은의 사인을 소중히 챙겼다. 강우의 사인은 아직 손에 들려있었다. 순간 다른 대접을 받을 자신의 사인에 강우가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저기요.”

사인을 받고 돌아가려던 남성을 그다음 사람이 불러세웠다. 남성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네?”

남성을 불러세운 또 다른 남성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저…. 펜과 종이 좀….”

“아…. 네.”

남성이 집어넣었던 펜과 종이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 장면을 보던 이나은이 킥하고 웃었다. 그리고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이렇게 좋은 일이구나.’

이나은이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강우를 바라보았다. 평생을 의지하고 싶은 든든한 그런 존재였다. 그렇게 처음 줄을 섰던 남성은 한동안 강우와 이나은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손에 들린 종이가 모두 바닥이 날 때까지 말이다.

“그래서 나은아.”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강우가 이나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손목을 어루만지던 이나은이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너한테 제의 들어온 영화랑 드라마 어떤 작품이야?”

“응 그게.”

이나은이 두 작품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강우가 씩 웃었다.

“나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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