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잊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연회장을 나와 한적한 장소에 강우와 송진태 그리고 송경호가 자리했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송진태는 차오르는 격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기사를 접하고는 정말 매우 놀라셨습니다.”
송경호가 얼마 전 났던 기사를 언급했다. 기사의 내용은 할아버지가 막냇동생을 찾은 것에 관한 이야기였다. 할아버지에 관한 기사는 사단법인 광복의 언론팀에서 다루었었다. 그 기사가 나간 이후 다른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였었다.
“아…. 그러셨군요.”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정말 평범한 가족사가 아니었다. 사단법인 광복에서 현재 할아버지와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근현대사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을 정도였다.
“박재봉 유공자님의 아버지이자 박강우 부사장의 증조부께서는 내게 큰 은인이시네.”
송진태가 감았던 눈을 뜨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젊은 시절 광주에 사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네. 가난한 삶을 살던 나는 무작정 광주 시내로 향했지. 그곳에서 나는 상회의 짐꾼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어.”
송진태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강우가 그런 송진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찌 재벌가의 회장 자리까지 왔는지 말이다.
“하지만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상회의 일꾼이 되었다고 달라지는 건 없더군. 일은 늘 고됐고, 삶은 빡빡했지. 그러던 어느 날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은인을 만났지. 그분이 바로 박진식 어르신이었지.”
“......”
강우는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조금 전 악수를 하며 받아들인 기억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았다. 하지만 기억의 파편은 그 후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전에 끊겼었다.
“나는 그분의 도움으로 글도 배우고 셈을 하는 법도 배웠네. 그리고 장부를 기록하는 법도 배웠고, 상회를 운영하는 지식을 배울 수 있었지. 그분은 나를 그저 한 명의 일꾼이 아닌 부하직원으로 아끼고 미래를 열어주셨어. 나는 그분 밑에서 일하며 지금의 아내도 만나 결혼을 했지.”
송진태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물심양면으로 자신을 돌봐주던 은사 같은 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이내 슬픈 표정이 되었다.
“한동안 나는 그분 밑에서 열심히 일했어. 하지만 가난의 고리는 정말 지독하더군. 내가 첫째인 경호를 낳았을 때 어르신은 나를 보며 안타까워하셨어. 그리고 내게 제안을 하나 하셨지.”
“제안이요?”
강우의 눈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기억의 뒷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그분은 자신이 가진 자금 일부를 나에게 주셨어. 그리고 독립해서 나 혼자만의 상회를 꾸려보라 하셨지.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일종의 지점이라고 봐야겠지. 나는 그분의 도움을 받아 광주 시내를 떠나 서울로 상경을 했네. 무릇 사내라면 한양으로 가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그러셨군요.”
“서울로 올라온 나는 작은 상회를 열었네. 배운 게 미곡상회의 일이니 작은 미곡 상회를 열어 장사를 시작했지. 그러던 어느 날 전쟁이 터졌네….”
한국전쟁이 터졌다는 말에 강우의 얼굴이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송진태 역시 침음성을 흘렸다.
“나는 전쟁이 그리 오래갈 거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혹여 전쟁이 난다고 해도 같은 민족이니 무슨 일이야 있겠나 싶었지. 하지만 북한군들은 정말 잔인했어. 결국, 상회를 포기하고 숨어들 수밖에 없었지.”
“저도 아버지와 피난을 다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송경호도 전쟁의 기억을 떠올렸다. 송진태가 송경호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때, 너는 아주 어렸으니 잘 기억이 안 날 게다. 우리가 얼마나 힘든 시기를 겪었는지.”
“네, 아버지.”
송진태가 다시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피난을 다니다 전쟁이 끝났네.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 다행히도 상회를 되찾을 수 있었어. 전쟁이 끝나고 나니 모든 것이 새로운 출발점이었어. 나는 빠르게 자리를 잡았고, 서서히 상회를 번창시켜나갔지. 그러던 어느 날 광주에서 올라온 고향 친구를 통해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네….”
송진태가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강우 가족에게 큰 아픔일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도 될까 생각했다. 하지만 강우의 표정은 담담했다. 막내 할아버지를 찾으며 이미 모두 털어낸 아픔이었다.
“맞습니다. 제 증조부님과 증조모님 그리고 할아버지의 고모할머님들이 모두 북한군에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으음….”
송진태가 침음성을 흘렸다. 송경호도 안타까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한달음에 광주로 내려갔네. 사장님에게 남은 자식들이 있음을 알았고,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찾으려 했었지. 하지만 사장님의 자제분들을 찾을 수가 없었네.”
그럴 만도 했다. 막내 할아버지는 실종이 됐고, 홀로 남은 할아버지께서는 서울로 상경을 해 사업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광주에서 아무리 할아버지를 찾아 헤맨들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송진태 회장이 강우를 만나러 온 것이 이해됐다.
‘막내 할아버지 이야기가 기사화되면서 증조할아버지와 가족들의 이야기도 같이 기사화됐지. 송진태 회장님은 그 소식을 듣고 나를 만나러 오신 거고.’
강우의 생각대로였다. 그리고 이제야 송경식이 독립운동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 이해됐다. 송진태의 은인이 증조할아버지였고, 증조할아버지와 자손들이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할아버지께서는 서울에서 사업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업에 실패하시고는 늘 은둔하듯 지내셨습니다.”
“잘 알고 있네. 지금 박재봉 유공자님의 사연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다만 가까이 두고도 긴 세월 도움을 주지 못한 내가 돌아가신 어르신께 너무 죄스러울 뿐이지….”
송진태 회장이 긴 숨을 뱉어냈다. 박진식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자리를 잡은 송진태는 다시 운명적인 사업파트너를 만나게 됐다. 현재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을 이룬 사람이었다. 송진태는 그 사람과 함께 현재 SJ의 모태가 되는 회사를 세웠고, 키워왔다. 그리고 나중에 이르러서는 SJ 그룹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전의 이야기까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어. 송진태 회장님이 증조할아버지의 사원이었다니….’
강우가 새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안타까움도 느꼈다. 기구하고 기구한 가문의 역사에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에게 떳떳한 가문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 시절에 어떻게 사람을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저희 막내 할아버지를 찾는 데도 그렇게 긴 세월이 필요했으니까요.”
강우의 말에 송진태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 가족의 사연을 잘 알기에 지금 눈앞의 청년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사장님의 자손답군. 자네가 이루어낸 모든 것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어.”
“회장님도 이루어내신 일입니다.”
강우의 말에 송진태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 시절에는 조금만 더 알고 조금 운이 좋았더라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였지. 지금과는 다른 시대였어….”
“아버지, 그래도 아버지가 해내신 일들은 저는 옆에서 봐왔습니다.”
송경호가 송진태 회장의 팔을 잡아주었다. 송진태 회장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강우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제라도 이렇게 은인이신 사장님의 후손들을 찾았으니 그리고 그 후손이 위태로운 우리 회사를 이렇게 살려주니 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송진태가 송경호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동의를 구하는 시선이었다. 송경호가 고개를 끄덕했다.
“아버지, 저도 은혜를 잊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송진태가 강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대진 그룹의 부사장으로 있는 것 말고도 다른 회사를 일구고 있다고 들었네. 동양 무역이라는 회사라고 하더군.”
“맞습니다. 그 회사는 온전히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저의 힘으로 이룬 곳입니다.”
“마침 동양 무역의 주요 사업이 식품 쪽이라고 들었네.”
“네.”
송진태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선언하듯 입을 열었다.
“우리 SJ 그룹이 문화산업에 진출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지. 하지만 식품 쪽으로는 그 역사도 길고 규모도 제법 된다네. 앞으로 우리 SJ 그룹의 식품 사업부는 동양 무역과 함께 일을 해보고 싶네. 어찌 생각하는가?”
강우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SJ 그룹의 식품 사업부는 규모가 큰 곳이었다. 그리고 마침 강우는 동양 무역의 사업 영역확장을 계획하고 있었다. SJ 그룹이 물심양면으로 돕겠다고 하는데 거절할 이유야 없었다.
“우리 가족의 회사를 도와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강우의 허락에 송진태 회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송경호도 한시름 놓았다는 듯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 가족의 사연을 알고 나서 밤잠을 설치던 송진태 회장이었다. 자신이 성공해 호의호식을 하는 동안 은인의 가족들이 그리 고생을 했다고 하니 말이다.
“고맙네. 고마워. 이제야 내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겠어.”
“증조할아버지께서도 하늘에서 기뻐하고 계실 겁니다.”
송진태가 눈시울을 붉혔다. 박진식은 자신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또 다른 아버지라고 생각한 존재였다.
“그리고 자네가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일제에 피해를 본 사람들을 돕고 있다고도 들었네. 우리 SJ 그룹도 그 일에 동참하겠네.”
“감사합니다.”
강우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SJ 그룹이라는 강력한 아군이 또 생겼으니 말이다. 이제 강우가 생각하고 원하는 일들이 더욱더 단단해진 아군들을 얻은 것이다. 강우가 마음속으로 증조할아버지에게 감사했다.
‘올바르게 사신 분들이었다. 누구보다 나라를 위하신 분들이었고. 이제야 그 보상을 받는 건가….’
강우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송진태와 송경호는 그런 강우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윽고 최 비서가 나타났다. 송진태 회장과 송경호에게 인사를 한 최 비서가 강우에게 말했다.
“부사장님, 기자회견을 하실 시간입니다.”
오늘 기자회견은 강우가 하기로 했다. 이재원이 하려 했지만, 언론에서 강우와의 인터뷰를 강력하게 요청한 탓이었다. 강우가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강우의 말에 송진태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있었던 일 나와 사장님의 일 그리고 앞으로 있을 일들 모두를 말해도 좋네.”
“네, 감사합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기자회견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회장의 연회가 끝나고 준비된 기자회견장에는 기자들은 물론이고 방송국에서도 잔뜩 나와 있었다.
펑. 퍼펑.
강우가 등장하자 플래시가 사정없이 터지기 시작했다. 강우가 기자회견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기자들의 시선은 온통 강우를 향해 있었다. 강우가 회견장에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지금부터 대진 그룹과 SJ 그룹의 협약식에 관한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최 비서의 선언과 함께 기자들의 질문이 마구잡이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박강우 부사장님, 오늘 협약식으로 인해 앞으로 일어난 문화 산업계의 변화를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문화계 일각에서는 지나친 독과점 형태의 업무 협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오늘 있었던 협약식에 관한 질문과.
“박강우 부사장님, 현재 진행 중인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분들과 위안부 할머님들에 대한 소송대리를 사단법인 광복에서 맡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친일 명부를 계속해서 업데이트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한 사회적 파장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강우가 진행하고 있는 일들.
“얼마 전 박재봉 유공자님의 잃어버린 혈육을 찾았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현재 어떤 상황인지 설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강우 가족의 개인적인 사연들까지 참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강우가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
-오늘은 참 할 말이 많을 것 같군요. 질문해주신 분들의 차례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