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한 게 나쁘지는 않죠.
마사토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마사토의 앞에는 강우와 아버지가 앉아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SJ 그룹의 중국 사업 총판권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야?”
“네, 그런 셈이죠.”
강우의 확답에 마사토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그래서 사원 모집 공고를 내라고 했던 거구나. 그것도 경력직으로.”
“네, SJ 그룹 중국 진출을 위해 제가 생각한 준비 시간은 약 1년 남짓이에요. 1년 남짓 안에 시장 조사 및 사업 세부 계획을 마무리하고 시작할 생각이에요.”
강우의 말에 마사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양 무역이었다. 다만 효율적인 업무체계가 잡힌 동양 무역은 능히 업무를 감당해 나가고 있었다. 인원보충만 이루어진다면 중국 사업 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중국에 있는 현지법인이 있기에 말이다.
“SJ 그룹 쪽에서 좋은 선택을 했구나. 중국 진출하는데 우리만 한 파트너가 없지.”
“마사토, 자신감이 대단한데?”
마사토와 아버지가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아버지도 마사토도 동양 무역을 성장시켜가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원래 이런 성격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원래 근심걱정이 많은 성격이었지.”
“그럼 잘 알고 있지. 일본에서 다니던 도쿄 스파이시 그만둘 때 기억나?”
아버지의 기습 질문에 마사토가 헛기침했다. 아버지가 짧게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 그만둬도 되는 건지 나한테 한 백 번은 물어본 거 같은데….”
“백 번밖에 안 물어봤다고? 이거 너무 신중하지 못했군.”
마사토의 말에 강우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뒷이야기가 있는 줄은 몰랐다.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친구가 이제 한국에서 살면서 많이 대담해졌지. 예전에는 정말 신중함 그 자체였다고.”
“신중한 게 나쁘지는 않죠.”
“흠흠…. 그렇긴 하지.”
아버지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평소 성격이 급한 편에 속하는 아버지였다. 물론, 강우가 가진 미래 기억보다는 느긋해지신 편이었다. 아마 넉넉해진 환경 덕분에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강우가 송진태 회장에게 주었던 사업계획서를 꺼냈다.
“송 회장님이 허락한 거나 다름없으니 이제 이 문서를 복사해서 중국 담당 부서에 전해주세요.”
“그래, 알겠다.”
마사토가 서류를 챙겼다. 동양 무역에는 중국 현지법인과의 업무 진행을 위한 전담부서가 있었다. 이번에 충원될 인원들도 모두 그 부서에서 일할 사람들이었다.
“그럼 조만간 중국에 한번 들어갔다가 나와야겠구나.”
아버지가 중국 출장을 언급했다. 강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의 의견에 공감했다. 그동안 너무 유능한 진남식 덕분에 중국 출장을 가지 않았던 강우와 아버지였다. 회사 규모가 나날이 커지고 있음에도 진남식은 믿을 만했고, 법인을 잘 이끌고 있었다. 현재는 중국 법인의 부사장직에 올랐을 만큼 사업성과도 뛰어났다.
“저 드라마 촬영하는 거 한번 방문하기로 해서요. 그거 들렀다가 바로 중국으로 가요.”
“그래, 그럼 일정 잡아 놓을게.”
마사토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번 중국 출장은 나도 가고 싶은데?”
강우와 아버지가 마사토를 바라보았다. 마사토가 어깨를 으쓱했다.
“중국 현지법인 상황을 둘러봐야 나도 돌아가는 걸 알 수 있으니까. 절대! 셋이 같이 가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라고?”
이제는 한국어로 농담을 할 정도로 자유 자유재로 구사하는 마사토였다. 강우와 아버지가 동시에 씩 웃었다.
“당연하지. 이건 엄연히 업무니까.”
“그렇죠.”
마사토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물론, 평소 가정적인 마사토였다. 하지만 남자에게 한 번쯤의 일탈은 필요한 것일 수도 있었다. 물론, 일탈이 아닌 출장이라고 되뇌는 마사토였다. 그렇게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마사토의 수뇌부 회의가 끝났다.
“오늘 점심은 칼국수니까 두 사람 어디로 새지 말고 기다려.”
회의실을 나가며 마사토가 선언하듯 말했다.
“그러지 말고 저기 위에 새로 생긴 김치찌갯집은 어때?”
얼마 전 생긴 김치찌개 집이 있었다. 양은냄비에 나오는 김치찌개는 정말 맛있었다. 벌써 명동 근처의 직장인들에게 입소문을 타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좋아, 오늘 점심은 김치찌개로 하지.”
마사토와 아버지가 입맛을 다시며 강우가 사용하는 부사장실에서 나갔다. 혼자 남은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직장인에게 점심 식사야말로 생사가 달린 문제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가서 라면도 잔뜩 추가해야겠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강우가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중국 진출 건으로 가장 바빠질 사람이 바로 강우였다.
* * *
SJ 그룹에서의 결과는 그날 저녁 바로 나왔다. 부사장실에 앉은 강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통화 상대방은 SJ 그룹의 송경호 사장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조만간 뵙겠습니다.”
통화가 끝나고 강우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부사장실에 있는 창문 너머는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강우는 점심을 먹고 들어와서는 한동안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업무에 집중했다. 먼저 SJ 그룹 산하에 있는 식품 프랜차이즈 업체들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했다.
‘SJ 그룹 산하의 식품 사업부는 SJ 푸드빌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분리된 상태지.’
SJ 푸드빌은 외식 사업부와 생활 식품 사업부 그리고 각종 원자재 사업부로 나눌 수 있었다. SJ 그룹의 모태가 식품 사업부였던 만큼 그 규모도 상당했다. 국내 시장의 가장 큰 식품회사를 꼽으라면 SJ 그룹을 빼놓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SJ 푸드빌이 중국 시장 진출에 사활을 걸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대한민국의 내수시장은 한계가 명확하다.’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땅덩어리는 안정적 내수를 확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인구수를 낳았다. 현재 대한민국의 인구수는 약 4,800만 명.
‘경제학적으로 인구수 1억이 넘어야. 수출에 의존하지 않는 내수시장을 보유할 수 있다고들 하지.’
그런 이유로 한국의 대기업들은 늘 해외시장 진출을 꿈꾸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외국과 비교해 산업화가 늦게 이루어진 나라였다. 흔히 말하는 한강의 기적으로 급격한 산업화를 이루었지만, 내실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대한민국이 세계적 경제 대국들과 해외시장에서 경쟁하는 것도 참 대단한 일이었다.
‘참 대단한 국민과 나라이긴 하지.’
강우는 대한민국의 문화와 음식을 꼭 세계에 널리 알리겠다고 다짐했다. 강우가 다시 잘 정리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일단 현지화에 성공하려면 현지인들의 입맛을 공략하는 동시에 천천히 한국의 맛에 길들여가야 한다.’
특히 중국은 세계적으로도 미식의 나라였다. 흔히 중국 사람들이 네발 달린 것은 의자 빼고 다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음식문화가 다양한 곳에서 한국 음식으로 성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한국과 중국은 음식 문화적으로도 겹치는 부분이 많으니까.’
하지만 강우는 자신 있었다. 이미 일본에서도 현지화를 진행하며 점점 한국의 맛으로 일본인들을 길들인 경험이 있었다. 동양 무역이 가진 노하우와 중국 법인의 막강한 자금력 그리고 SJ 그룹이 오랜 시간 쌓아온 인프라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다.
사라락. 사라락.
강우는 차근차근 업무를 해나갔다. 조만간 SJ 그룹에 방문해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기로 했다. 대진 그룹이 아닌 동양 무역의 부사장으로서 말이다. 어려울 건 없었다. 강우는 미래의 기억과 현재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SJ 푸드빌의 장점과 문제점을 모두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똑똑.
그렇게 한참 업무에 집중하던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마사토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업무에 잔뜩 집중한 강우의 모습에 마사토가 살짝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강우야.”
완전 집중 상태에 빠져있던 강우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마사토를 확인하고 서류를 ‘탁’하고 덮었다.
“네?”
“잠깐 들어가도 될까?”
“아…. 앉으세요.”
열린 문틈 사이로 상체의 반만 나와 있던 마사토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마사토의 두 손에는 따듯한 커피가 들려있었다.
“커피 한잔하고 해라.”
“감사합니다.”
강우가 열린 문틈 사이로 텅 빈 사무실을 확인했다. 힐끗 벽시계를 바라보니 어느덧 퇴근 시간은 한참이나 지나있었다. 워라벨을 강조하는 동양 무역의 회사 분위기상 남아있는 직원들은 없었다.
후루룩.
강우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뜨끈한 아메리카노가 목을 타고 넘어가며 찌뿌둥했던 몸에 온기가 돌았다. 강우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굳은 몸을 풀었다.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아까 받은 서류 검토하고 부서별로 분류 작업하느라 좀 늦었다.”
“아직 시간 있는데 천천히 하시죠.”
강우가 마사토를 바라보았다. 마사토는 손에 쥔 커피를 이리저리 옮겨 잡고 있었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와는 달리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
강우의 말에 마사토가 입에 가져대던 커피를 벌컥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랐다.
“아뜨뜨….”
강우가 깜짝 놀라 부사장실에 있는 정수기에서 냉수를 떴다. 그리고 마사토에게 내밀며 맞은편에 앉았다.
“고맙다.”
마사토가 냉수를 벌컥 마시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강우는 마사토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마사토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강우야, 사실 상의할 게 있어서 찾아왔다.”
“말씀하세요.”
강우는 업무적으로 상의할 게 있나 싶었다. 하지만 또 마사토의 표정을 보니 그것보다는 심각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그리고 마사토가 꺼낸 이야기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실 재원이랑 미나 말이다.”
커피를 마시던 강우가 그대로 마사토를 바라보았다. 혹시 둘 사이에 문제가 생겼나 싶었다. 마사토가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 회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년 2월쯤에 재원이랑 미나의 약혼식을 하는 게 어떠냐고 하시더라.”
“네? 그럼 잘된 일 아니에요?”
강우가 내심 안도하며 물었다. 그러면 그렇지 미나 바라기 이재원이었다. 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길 리가 없었다. 그리고 미나 역시 이재원을 참 사랑했다.
“그래 잘 된 일이지. 그런데 말이야….”
마사토가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게 또 부모 된 처지에서는 생각이 많아지더라고. 재원이가 보통 집 자식이 아니잖아. 무려 재벌 집 2세야 그것도 후계자고. 더군다나 대진 그룹이 어디냐? 요새 가장 주목을 받고 화제를 몰고 다니는 기업 아니냐.”
“아….”
강우는 이제야 마사토가 걱정하는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마사토의 집안은 평범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마사토는 언론을 통해 재벌가에 시집을 가는 여자의 일생을 알고도 있었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이 너무 어려운 자리로 시집을 가는 것은 아닐지 걱정할 수 있었다.
“재원이야 걱정할 게 없다는 거 알고 있지. 미나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오는 놈이니까. 그런데 나는 미나가 평범하게 살았으면 하는 생각도 있어…. 물론, 내 욕심이겠지. 둘이 사랑하는데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일본인인 마사토였다. 한국과는 달리 더 서구적인 마인드를 가진 게 일본인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자식의 결정을 크게 터치 안 하고 응원해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마사토의 걱정처럼 말이다.
“음…. 아저씨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재원이 형은 다른 재벌 2세랑은 달라요. 자라온 환경도 그렇고요. 지금 후계자가 되고서도 사는 방식도 그렇고요. 그리고 미나라면 충분히 재원이 형이랑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강우의 확신에 찬 말에 마사토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어쩌면 강우에게 확답을 듣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만큼 강우를 만나고 지금까지 모든 것이 올바른 길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 고맙다. 강우, 네 말을 들으니까 안심이 되는구나.”
마사토가 긴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그때였다.
“별걸 다 걱정이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소주나 한잔하러 가자고.”
열린 문 사이로 아버지가 불쑥 들어왔다. 아마 강우와 마사토의 대화를 모두 들은 모양이다. 마사토가 멋쩍게 웃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남의 귀한 아들에게 걱정이나 끼치고.”
마사토의 말에 아버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익숙해서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