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8화 (298/402)

저희 싸우러 가는 거 아닙니다.

스르륵.

SJ 그룹 본사 앞으로 강우를 태운 고급 세단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고급 세단 안에는 강우가 여유롭게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최 비서가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우가 그런 최 비서의 표정을 보고 픽 웃었다.

“저희 싸우러 가는 거 아닙니다.”

강우의 말에 최 비서의 표정이 한층 비장해졌다.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더 걱정이라고 사장님께서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SJ 그룹의 수많은 유혹에서도 부사장님을 지키라는 지령을 받았습니다.”

“유혹이요?”

강우가 픽 웃었다. 그러자 운전을 하던 정 기사도 사뭇 진지해졌다.

“부사장님, 운전은 제가 다른 그룹 기사들을 다 합쳐도 제일 잘합니다.”

“네?”

강우가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강우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니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우야, 나다.-

“네, 회장님.”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철금 회장이었다. 강우가 SJ 그룹에 방문한다고 하니 숫제 양아들까지 삼겠다며 난리였다. 하지만 강우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자 이철금 회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고. 송 회장님이 이상한 소리 해도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 알겠지?-

“네, 걱정하지 마세요.”

강우의 말에 이철금 회장이 이제야 안심을 했다. 본인도 민망했는지 짧게 헛기침을 한 이철금 회장이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래, 잘하고 오고.-

“네.”

통화가 끝나고 강우가 차에서 내렸다. 최 비서도 전투에 돌입하는 병사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SJ 그룹 본사 건물 앞쪽에는 송경식 부사장과 직원 몇 명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박 부사장, SJ 그룹에 방문한 걸 환영해.”

강우의 SJ 그룹 본사 첫 방문을 축하하며 송경식이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원하고 원하던 강우의 SJ 첫 방문이 아니던가.

“잘 지내셨죠?”

“그럼.”

지난번 협약식 이후로는 서로 바빠져 한동안 만남이 뜸했었다.

“오늘 미팅 끝내고 삼겹살에 소주 어때?”

“좋죠.”

잔뜩 긴장한 직원들과 달리 강우와 송경식은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부사장님, 환영합니다.”

대기하고 있던 송경식 부사장의 비서가 강우에게 꽃다발까지 전해주었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꽃다발을 받았다.

“이렇게 환영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강우의 말에 꽃다발을 전해준 비서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훤칠한 키에 남자다운 외모 그리고 목소리까지 낮은 저음의 강우였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심정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살짝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강우의 연인이 누구인지 이미 전 국민이 다 알고 있지 않던가.

“박강우 부사장님, 본사 방문을 다시 한번 환영합니다.”

마지막 멘트를 끝으로 임무를 다한 비서가 다시 송경식의 뒤쪽으로 섰다. 송경식이 강우의 어깨를 두들기며 부드럽게 웃었다.

“자 그럼 안으로 들어가자. 회의 준비는 다 끝내 놨다.”

“네, 형님.”

강우와 송경식이 본사 로비로 들어섰다. 본사 건물 안에는 옅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강우는 오늘 SJ 그룹 식품 계열사인 SJ 푸드빌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었다. 강우가 송진태 회장에게 건네준 사업계획서가 공개되자 본사가 발칵 뒤집혔다.

‘그럴 만도 하지. 그동안 자기들이 준비해 온 걸 한 방에 내가 뒤집었으니.’

일 년이 넘게 준비한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강우가 제시한 사업계획서를 보며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 강우가 SJ 그룹 본사에 나타났다. 무늬만 대기업이라 불리던 대진 그룹을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강우였다. 재계에서는 강우를 얻는 자가 미래를 얻는 것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만큼 강우가 각 분야에서 보여준 능력들은 대단했다.

“어서 오십시오.”

엘리베이터 앞에도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임직원들이 전용으로 타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대진 그룹에는 없어진 문화였지만, 그렇다고 SJ 그룹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의 다른 대기업 아니 어느 정도 나가는 회사라면 다 있을법한 것이었다.

“강우야, 먼저 타.”

송경식이 강우에게 권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하고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송경식과 비서가 그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마지막으로 묵묵히 강우를 따르던 최 비서가 탔다.

스르륵.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회의실이 있는 고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역시 옅은 긴장감과 함께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회의실에 있는 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드러난 복도에는 깊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가지. 다들 기다리고 있어.”

“네, 부사장님.”

강우와 송경식이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양쪽으로 있는 사무실에는 깊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직원들은 앞에 놓인 컴퓨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강우가 사무실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직원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강우가 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들어가기 전에 한마디만 할게.”

송경식이 유난히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반면 강우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진짜 어린 나이에 저리 강심장일까….’

송경식은 그런 강우가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지금 힐끗 보이는 회의실 안쪽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복도를 가득 메운 긴장감은 회의실 안쪽이 바로 그 진원지였다.

“우리 회사는 대진 그룹처럼 창업자가 지분을 대부분 소유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야. 그 말은….”

“회사에 영향력을 가진 다수의 주주가 존재한다는 거겠죠. 그중에는 저 안에 있는 임원들도 포함일 거고요.”

강우의 말에 송경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대진 그룹과의 업무 협약은 SJ 그룹의 그 누구도 거절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패색이 짙은 전쟁이었다. 그런 전쟁에서 압승을 거두고 있는 상대방이 먼저 손을 내미는데 거절할 바보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달랐다.

“그래, 우리 회사는 그 시작이 식품 쪽이었고, 회장님은 공동창업주라고 봐야 해.”

“네, 알고 있어요.”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SJ 그룹의 공동 창업자는 더 큰 사업체를 가지고 SJ와 분리되어 나갔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 재벌 순위 1, 2위를 다투는 거대 재벌이 되어있었다. 그 그룹의 이름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바로 삼선 그룹이었다.

‘특히 핸드폰 사업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있지. 그리고 앞으로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할 기업이 되고.’

먼 미래에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삼선 민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은 여의주를 물기 전의 용이나 다름없는 상태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아직 SJ에 대한 영향력을 더 행사하고 있기도 하고.’

계열사가 아닌 완벽한 기업 독립을 했다고 하지만, 아직 SJ 그룹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삼선 쪽 인물들도 많았다.

“이번에 강우 네가 제안한 사업계획서는 내가 봐도 완벽하다고 생각해. 사업적 측면에서 봤을 때 흠잡을 곳이 없어. 다만 문제는….”

“감히 중소기업인 동양 무역이 사업 전권을 가지려 한다는 것.”

강우가 씩 웃었다. 송경식이 움찔했다.

“그게 몇몇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렸군요?”

“으음….”

송경식이 짧게 신음성을 흘렸다. 그룹의 치부를 들킨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강우에게 미안했다. 오늘 강우는 저 회의실 안에서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사업이라는 게 그렇죠. 누구나 만족시킬 방법은 없어요. 누구나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렇지….”

강우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송경식이 멍해졌다. 강우가 송경식을 보며 다시 씩 웃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사업에 성공하는 건 아니죠. 자기 방식이 옳다고 생각해서 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어…?”

여전히 멍한 송경식에게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예전에 재원이 형한테 했던 말이 있어요.”

“어떤 말?”

강우가 몇 년 전 한강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날 불었던 강바람이 다시 강우의 얼굴을 휘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형님, 저 믿죠?”

강우의 말에 송경식이 고개를 끄덕했다. 그리고 잠시 했던 걱정을 날려버렸다.

‘그래, 다름 아닌 강우지.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군.’

송경식의 얼굴이 대번에 편안해졌다. 그리고 회의실을 향해 한걸음 내디뎠다. 대기하고 있던 송경식의 비서가 출입증을 보안장치에 가져다 댔다.

지이잉.

자동문이 열렸다. 타원형으로 놓인 거대한 테이블이 보였다. 제일 상석에는 송진태 회장이 있었다. 왼쪽으로는 송경호 사장이 있었고, 나머지 한 자라에는 강우가 처음 보는 남성이 있었다.

‘음…. 저 사람이….’

강우는 그 남성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SJ 그룹의 지분을 상당히 보유하고 있는 대주주였다.

‘아마 이름이 이태건이었지?’

성에서 알 수 있듯이 갈라져 나간 삼선 그룹과 친인척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주식 보유량은 물론이고 SJ 그룹의 초창기부터 쭉 있어 온 가문의 사람이었다.

‘뭐…. 개국공신 같은 거라고나 할까.’

잠시 상념에 빠진 강우에게 송경식이 들어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강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 안의 시선이 강우를 향해 빗발치듯 쏟아졌다.

“강우야, 저쪽이다.”

송경식이 한쪽을 가리켰다. 타원형의 동그란 반대쪽. 그러니까 송진태 회장과 마주 보는 자리가 오늘 강우의 전쟁이 벌어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강우가 준비한 자료들과 레이저 프롬프터 그리고 간단한 음료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네, 그럼.”

강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뚜벅뚜벅 준비된 자리로 향했다. 오늘 프레젠테이션의 동료인 최 비서가 그 뒤를 조심히 따랐다. 최 비서가 들은 서류 가방에는 오늘 강우가 준비한 자료가 잔뜩 들어있었다. 잠시 강우를 바라보던 송경식도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강우가 준비된 마이크를 들었다. 회의실이 매우 큰 만큼 마이크를 이용해야 정확한 의사 전달이 가능했다.

“부사장님, 준비됐습니다.”

역시 유능한 최 비서는 순식간에 자료를 강우가 사용하기 편하게 정리했다. 강우가 최 비서를 보며 눈을 빛냈다. 최 비서 역시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회의실을 쓱 둘러보았다. 호의와 적대심이 섞인 이런 분위기는 이미 익숙했다.

-안녕하십니까. 동양 무역 박강우 부사장입니다.-

마이크를 집은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오늘은 대진 그룹이 아닌 동양 무역의 박강우였다.

짝짝짝.

송진태 회장이 먼저 손뼉을 쳤다. 이윽고 회의실 안에 박수 소리가 가득 찼다. 누구는 진심을 담았고, 누구는 분위기에 맞춰 치는 둥 마는 둥 했다. 강우는 그 모습을 순식간에 머리에 담았다. 누가 오늘의 아군이고 적군인지 머릿속에 정확히 담았다.

-먼저 앞으로 SJ 그룹 내 계열사인 SJ 푸드빌의 중국 진출을 담당할 동양 무역을 자세히 소개하는 시간을 시작하겠습니다.-

강우의 말이 끝나자 최 비서가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우의 뒤쪽으로 내려온 스크린에 동양 무역을 소개하는 자료가 비쳤다.

-동양 무역은 1999년 세워진 기업으로서….-

첫 번째 장에는 짤막하게 동양 무역의 역사를 소개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내용을 모두 확인한 몇몇 임원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특히 이태건은 실소를 흘릴 정도였다.

“하? 3년?”

물론, 언론에 알려진 대로 동양 무역이 대단한 기업은 맞았다. 하지만 대기업 임원들의 눈에는 그저 중견기업 정도였다. 그 정도 기업은 계열사로도 치지도 않는 그런 분들이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만하지.’

그 순간, 이태건 회장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기다리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보고 설립한 지 3년이 된 중소기업에 중국 진출이라는 거대 프로젝트를 맡기라는 말인가?”

이태건의 발언에 송경호가 발끈하듯 얼굴을 붉혔다.

“부사장님, 회장님이 결정하신 문제입니다.”

“알고 있네. 그래서 오늘 이렇게 프레젠테이션까지 허락한 거 아닌가.”

송경호가 무어라 더 말하려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송진태 회장은 여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여유만만함의 이유는 바로 강우에게 있었다.

-현재 동양 무역의 국내 보유자산은 8천억 국내 매출은 약 이백억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동양 무역의 해외 법인들을 보시겠습니다.-

딸칵.

버튼이 눌리고 스크린으로 다음 자료가 떠올랐다. 이윽고 자료의 내용을 먼저 확인한 회의실 안의 임원들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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