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야근을 많이 하나요?
회의가 끝나고 강우 주변으로 임원들이 몰려들었다. 앞다투어 강우에게 인사를 건네며 안면을 트려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SJ 엔터 사업부 박 이사입니다.”
“역시 듣던 대로 대단하십니다.”
쏟아지는 악수 요청을 강우가 차근차근 받아주었다. 강우의 손에는 점점 명함이 쌓여갔다. 강우도 자신의 명함을 주었다. 동양 무역 부사장 명함이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우는 이사들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이태건 이사가 강우 앞에 섰다.
“오늘 준비를 많이 했더군.”
“준비는 항상 되어 있습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이태건 이사가 그런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과연 풍문으로 들리던 강우의 능력은 범상치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에 있는 법인은 충격 그 자체였다. 동양 무역은 SJ 그룹을 등에 업고 덩치를 키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우리가 동양 무역의 도움을 받는 처지라고 해야겠지….’
이태건 이사가 강우를 힐끗 보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강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강우였다. 순간, 자신의 육촌 당숙이자 삼선그룹의 창업자를 떠올렸다. 삼선그룹을 일군 재계의 거인은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다루고 사업에는 피도 눈물도 없었다.
‘그분과는 다른 느낌이지만….’
이태건은 오늘 강우를 만나고 직감했다. 앞으로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를 뒤흔들 사람이 있다면 바로 눈앞의 젊은 사업가일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군….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네. 오늘 내 발언들도 어찌 됐든 SJ 그룹을 위한 것들이었으니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고.”
“사업이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태건 이사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사업에서 의견이 갈리고 서로 다툼이 있는 것이야 일상다반사일 것이다. 이제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으니 당분간은 지켜볼 일이었다.
“그럼 다음에 차나 한잔하지.”
이태건 이사가 명함을 내밀었다. 강우가 명함을 받은 뒤 자신의 명함을 전해주었다. 이태건 이사가 명함을 힐끗 확인하고는 품에 넣었다. 이태건 이사를 마지막으로 임원진들이 모두 회의실을 나갔다.
“부사장님, 오늘 정말 엄청났습니다.”
최 비서가 강우를 보며 정말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맨 처음 동양 무역을 중소기업이라며 깔보던 임원들의 시선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랐다.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상사의 능력을 몰라도 한참을 모른다 생각했다. 그리고 프레젠테이션이 진행될수록 회의실에 차오르는 경악한 표정들을 보고는 너무 통쾌하다고 생각했다.
“최 비서님도 고생하셨어요. 오늘 진짜 최고의 서포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최 비서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강우에게 송진태 회장이 다가왔다.
“강우야, 잠시 회장실에 들렀다 가라.”
“네, 회장님.”
* * *
SJ 그룹 회장실에 강우와 송진태 회장 그리고 송경호와 송경식이 모여있었다. 송진태 회장은 너무나 만족스러운 듯 연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오늘 회의는 이제껏 내가 겪어본 회의 중에 정말 최고였어.”
“감사합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오늘 있을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준비에 신경을 쓰기는 했었다. 송진태 회장이 연신 의자 팔걸이를 툭툭 쳤다.
“오늘 회의 때 이태건 이사의 표정이 아직도 떠올라.”
이태건 이사의 얼굴을 떠올리니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동안 중국진출 건을 놓고 벌인 신경전에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아오던 차였다. 송경호와 송경식이 일선에 나선 문화 사업 때문이었다. 대진 그룹과의 경쟁에서 사실 진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였다. 문화 사업이 부진해지자 이태건 이사는 SJ 푸드빌 중국진출 건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자신의 라인을 전면에 배치하며 세력을 장악해 갔다. 그런 이태건 이사가 오늘 강우에게 크게 한 방을 먹었다.
“아버님, 이제 이태건 이사 쪽에서 아무 말도 못 하겠죠?”
송경식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송진태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아까 다른 이사들 표정 못 봤어? 이제는 강우보고 제발 프로젝트를 맡아 달라고 사정할 기세더구나.”
“애초에 잘못된 생각들을 한 거죠. 강우가 누굽니까?”
송경호 사장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강우와 함께 사업을 해나갈 생각에 기대감이 들었다. 강우가 지금껏 이루어낸 것들이 이제는 SJ 그룹의 차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이대로 끝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강우가 물었다. 송진태 회장은 송경호 사장의 후계로 송경식을 결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태건 이사의 파벌에서는 다른 사람을 후계자로 밀고 있었다.
“그래, 중립적인 입장의 이사들이 이번 일로 대거 우리 쪽으로 돌아설 거다. 이태건 그 사람이 다른 의견을 내고는 있어도 그룹에는 아주 애정이 많은 사람이야. 너무 절벽으로 밀어낼 이유는 없어.”
송진태 회장의 말에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종류의 파워게임은 강우 적성에도 안 맞았다.
“그럼 이제 이사진들의 설득이 끝났으니 조만간 식품 사업부에 들러 인수인계 작업을 끝내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한다. 이번 중국진출 건에 우리 그룹의 사활을 걸으마.”
SJ 그룹은 이번 중국진출 건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강우의 말에 송진태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 한마디에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그래, 애들이랑 밥 먹고 가기로 했다며?”
“네, 아버지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기로 했습니다.”
송경식이 입맛을 다셨다. 강우가 구워주는 삼겹살을 떠올리니 벌써 군침이 돌았다. 물론, 그에 곁들이는 소주 한 잔도 정말 죽여줬다.
“그래, 그럼 이제 셋이서 이야기도 나누고 하거라. 나는 준이 형님이랑 재봉 그리고 이 회장이랑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역시 요즘은 틈만 나면 뭉치는 네 분이었다. 간혹 막내 할아버지까지 합류하기도 하고 말이다. 송진태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우와 송경호 그리고 송경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송진태 회장을 배웅했다.
“아 참. 오늘 회사도 한번 안내해주도록 하거라.”
“네, 아버지.”
마지막 말을 끝으로 송진태 회장이 회장실에서 나갔다. 세 사람이 자리에 다시 앉았다. 송경호가 강우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야, 정말 고생했다.”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송경호가 강우를 보며 궁금한 점을 더 묻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 법인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런데 말이야 중국 법인은 어떻게 그렇게 크게 키운 거야? 외국인이 사업하기에 좋은 곳이 아닌데 말이야.”
“맞아. 특히 중국 공산당 쪽에 연줄이 없으면 정말 힘든데.”
송경식도 송경호의 말에 동의하며 궁금해했다. 강우가 씩 웃으며 중국 법인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강우의 말을 들으며 송경호와 송경식은 점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위진오와의 관계를 듣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그 위진오가 네 양부님이라는 거야?”
“맙소사….”
강우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저를 정말 아껴주시고 많이 도와주셨어요.”
송경호와 송경식이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현재 위진오는 중앙당의 고위직까지 오른 상태였다. 항간에서는 차기 주석 자리에 오를 후보로 점치고 있었다. 그런 위진오가 강우의 든든한 지원군이라 했다. 중국의 사업 특성상 그런 지원군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이 있었다. 강우가 중국 기업에 투자한 것이었다. 강우가 투자한 중국 현지 기업들은 하나같이 대박을 터트린 회사들이었다. 중국 현지 법인이 소유한 그 기업들의 주식 보유량도 상당했다.
“이거. 진짜 대단한데…. 강우 네가 투자에도 감이 있을 줄은 몰랐다.”
송경호가 감탄하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강우가 못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어려운 건 아니었죠. 중국은 막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고, 공산당이라는 특수성을 제외하면 미국이 성장해온 길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그걸 참고해보면 어떤 기업이 성장 가능성이 큰지 알 수 있어요.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 법이니까요.”
강우의 말에 송경호와 송경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모두가 투자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강우를 보며 등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앞으로 강우가 어떤 위치에까지 오를지 상상이 가지도 않았다.
“이번 중국진출 건도 마찬가지예요. 한국 음식을 무조건 먹어라. 이런 느낌보다는 현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접근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 현지 법인을 앞세워서 공략에 나설 거에요.”
강우가 회의 때는 하지 않았던 자세한 공략 방식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외식 사업부는 현지화된 브랜드명과 콘셉트로 진출을 할 계획이에요. 지금 마케팅팀에서 그 부분에 대해 준비 중이에요. 음식 레시피도 현지인 입맛에 맞게 조금 변형할 예정입니다. 아까 회의에서도 언급했지만, 고급화 전략으로 나갈 예정이라 각 성 단위에 가맹점 숫자도 제한할거고요.”
강우가 쉴 새 없이 사업전략을 쏟아냈다. 들으면 들을수록 감탄이 나오는 이야기들이었다. 송경호와 송경식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경식아, 우리는 드디어 방통을 얻은 듯하구나.”
“네, 형님.”
이재원이 늘 강우를 대진 그룹의 제갈량에 비유한 것을 이용해 표현하는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SJ 푸드빌 중국진출의 대성공을 직감했다. 중국 현지 법인과 위진오 그리고 강우라는 성공보장 카드가 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강우에게 정말 큰 고마움을 느꼈다. 사실 SJ 그룹이 아니더라도 동양 무역이 파트너가 될 기업들이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SJ 그룹을 선택해 주었다.
“강우야, 정말 고맙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으마.”
“앞으로 네가 하는 일에 우리도 적극적으로 도울게.”
송경호와 송경식의 말에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증조할아버지의 인연들이었다. 강우는 증조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기업을 도울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강우가 하고자 하는 계획의 든든한 조력자이기도 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세 사람은 한동안 회의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 송경호가 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런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구나.”
어느새 점심시간도 훌쩍 지나있었다. 강우의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워낙 대식가인 강우는 슬슬 배고픔이 밀려들었다. 배를 문지르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먹으러 가시죠?”
“회사 한번 둘러보고 가는 게 어떨까?”
송경호의 제안에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좋죠.”
세 사람은 회장실을 나와 그룹 본사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사장과 부사장 그리고 강우의 등장에 본사 내부가 발칵 뒤집혔다. 특히 SJ 그룹의 사원들은 강우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과연 강우가 대진 그룹에 이어 SJ 그룹의 체질까지 바꾸어 놓을지 기대도 했다.
“음…. 여기는 야근을 많이 하나요?”
본사를 모두 둘러본 강우의 첫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