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1화 (301/402)

아니, 하나도 안 피곤해.

드라마 세트장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세트장의 한쪽에는 강우와 강용이가 있었다. 강용이는 세트장을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형아, 여기 정말 예전 우리 있던 곳이랑 너무 똑같아.”

강용이의 말대로였다. 오늘 준비된 세트장은 강우 가족에게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장미 여관-

붉은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간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붉은색 벽돌로 만들어진 외벽 그리고 하얀색 스티커에 붉은색으로 적혀있는 여관이라는 글씨까지.

“정말 그렇네. 스태프분들이 진짜 잘 재현해 주셨어.”

강우가 세트장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미래의 기억인지 회귀인지 모를 상황이 시작되고 바로 다음 날부터 지냈던 곳이었다. 그리고 저곳에서 강우는 참 많은 것들을 해냈다.

‘부자가 되고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했던 다짐을 나는 해냈어.’

그리고 그 다짐을 넘어 지금은 더 많은 것들을 해내고 있었다. 강우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세트장을 보고 있자니 지나온 시간이 생각나며 참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강용이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지도 알 수 있었다.

“고맙다. 우리 막둥이 덕분에 형아가 엄청나게 멋있게 그려졌네.”

“응? 아닌데. 난 그나마 평범하게 그려보려고 한 건데?”

강용이가 혀를 삐죽 내밀었다. 그 모습에 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 작가님.”

그때, 이번 드라마의 담당 PD가 다가왔다. 대진 미디어 소속의 PD로 이번 드라마를 위해 거액의 연봉을 제안해 스카우트해 온 PD였다. 역시 강우가 미래 기억으로 선택한 유명 PD였다.

“안녕하세요. 신 PD님.”

강용이가 신 PD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인사를 받은 신 PD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어린 작가와 일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애초에 아직 PD로 입봉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자신이었다.

“부사장님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신 PD가 이번에는 강우에게 인사를 했다. 공중파 채널 공채 PD로 입사한 자신을 대진 미디어에 스카우트해온 것이 바로 강우였다. 아직 신임 PD에 불과한 자신에게 거액의 연봉을 제안했을 때 정말 믿기지 않았다. 강우를 직접 만나 도대체 뭘 보고 자신을 스카우트하냐는 말에 돌아온 대답도 대단했다.

‘저는 미래에 투자하는 겁니다. 라고 하셨지.’

신 PD가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사실 드라마 제작은 처음이었다. 공중파 채널에 입사하며 주로 다루었던 것은 교양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대본을 받아보는 순간 신 PD는 직감했다. 자신은 이 드라마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드라마 제작 경험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 PD님은 지금 한창 촬영 준비 중이십니다.”

“아. 그러시군요. 오늘 저랑 박강용 작가는 현장 경험차 방문했습니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말고 촬영해주세요.”

이 PD라 불린 인물 역시 강우가 스카우트해 온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드라마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대진 미디어 소속 PD들을 위해 강우는 많은 유명 PD들도 영입했다.

‘미래에는 공중파가 아닌 케이블 채널로 이적을 하는 게 다반사였지만….’

현시점에서는 수많은 PD의 대진 미디어행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항간에서는 강우가 무리한 투자를 한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강우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영입한 수많은 PD는 많은 콘텐츠를 쏟아낼 것이다. 그리고 그 콘텐츠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오늘도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일하게 되어서 모두가 감사하고 있습니다.”

신 PD는 대진 미디어가 제공하는 촬영 환경에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실 선배들을 따라 경험해 보았던 공중파 채널들의 드라마 촬영 현장은 극악 그 자체였다. 쪽대본은 기본이었고, 예산을 아끼기 위한 열약한 대우도 기본이었다. 하지만 대진 미디어는 달랐다.

‘정말이지 이런 대우라면 신이 나서 일할 수 있겠지.’

신 PD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따듯한 점퍼들과 온열 장치들은 기본이었다. 밥차는 온갖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밥을 먹고 나면 또 제공되는 후식들과 간식들도 최고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정당한 대우와 대가였다.

‘이 바닥에서 이런 정상적인 근로 계약서라니….’

신 PD는 이런 계약 조건과 대우는 본 적이 없었다. 이 바닥은 사람들의 꿈을 담보로 낮은 임금과 엄청난 노동시간을 할애하게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소문대로 대진 미디어는 달랐다.

“부족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관계자를 통해 말해주세요. 최고의 환경에서 최고의 작품이 나오는 법이니까요.”

“최선을 다해 찍겠습니다.”

신 PD가 전의를 불태웠다. 이런 환경에서 일한다면 신이 나서라도 가진 것 이상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자! 촬영 들어갑니다!”

조연출이 확성기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촬영장이 더 분주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 잠잠해졌다. 이윽고 신 PD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레디! 액션!”

그 말과 함께 세트장의 한쪽에서 네 명의 배우가 나타났다.

“형아, 우리 가족이다.”

강용이가 눈을 반짝였다. 지금 나타난 배우들은 각각 강우와 강용이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었다. 아버지의 역할은 알려진 대로 한성규였다. 강우 역할은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는 하이틴스타였다. 강우 정도는 아니었지만, 큰 키에 훤칠한 체구와 마스크가 돋보였다. 강용이 역할은 미래 기억에서도 훌륭한 배우로 성장하는 아역이었다.

“내 역할을 하는 배우가 어릴 적 나만큼 귀여울 수 있을까 모르겠네.”

강용이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그런데 형아, 정말 엄마 역에는 딱 맞아. 그렇지?”

강용이가 어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를 보며 감탄했다. 강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강용이의 말에 동의했다. 두 형제의 시선이 어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 쪽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진짜 우리 엄마만큼 예쁘시지.”

두 형제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어머니만큼 아름다운 김세아가 있었다. 사실 김세아가 처음 어머니 역할 오디션에 나타났을 때 관계자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고 했다.

‘작은어머니가 대본에 표현된 어머니의 연기를 너무 잘해서 일단 놀랐고, 두 번째로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밝혀져서였지.’

강우가 씩 웃었다. 생각해 보면 김세아만큼 어머니 역할에 어울릴만한 배우는 없었다. 강우 가족의 사연은 물론이고 어머니의 성격과 표정 말투까지 모두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김세아가 어머니 역할을 맡았다고 하자 어머니가 엄청나게 좋아하시기도 했다.

“형아, 시작한다.”

강우와 강용이가 숨을 죽였다. 장미 여관으로 들어서는 가족의 모습을 보며 짧게 탄성을 뱉었다. 얼마 되지 않은 기억은 여전히 선명히 두 형제의 가슴에 박혀있었다. 그날의 막연한 두려움을 그리고 설렘을 느끼며 강용이가 눈을 빛냈다.

“사실 저 때 나 참 무서웠어. 그런데 막상 여관방에 들어가고 나니까 또 참 따듯하고 좋았어. 우리 자주 이사도 다니고 잘 곳이 없어서 고생도 했지만, 저곳에서는 가족이 함께하는 생각이 들었어.”

“......”

강우가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그때의 강용이는 어렸다. 그래서 강우는 강용이가 가진 감정의 깊이를 몰랐었다. 하지만 지금 강용이는 말하고 있었다.

‘많이 힘들었구나. 강용이도….’

강우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따듯한 형아의 손길에 강용이가 부드럽게 웃었다. 두 형제는 말없이 세트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배우들의 열연이 펼쳐졌다. 강용이는 잔뜩 집중을 한 채 배우들의 연기를 살폈다. 준비해 온 작은 노트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기도 했다. 그 모습이 제법 진지해 강우는 속으로 흐뭇함을 느꼈다.

“음…. 저 부분은 조금 더 감정을 눌러줬으면 좋겠는데.”

강용이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자기 생각을 적어 내려갔다. 강용이가 가진 재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강용이의 스승인 강 작가도 엄청나게 칭찬을 하고는 했다. 강우가 보기에도 그랬다.

‘이런 재능을 미래 기억에서는 그렇게 썩혔었으니….’

강우는 다시 한번 강용이의 앞날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촬영은 이어졌다. 드라마 촬영은 정말 길고 긴 시간이 들어갔다.

“저 한 배우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강용이는 배우들의 휴식 시간마다 달려갔다. 그리고 자신이 느낀 점과 의도한 부분을 열심히 설명했다. 강용이가 어렸지만, 원작자인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배우들은 강용이의 말을 집중해 들으며 감탄했다. 어린 강용이의 재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 강용이가 이런 재능이 있는지 정말 몰랐어.”

특히 김세아는 강용이가 기특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강용이가 씩 웃었다.

“우리 엄마랑 정말 똑같아요. 그래서 정말 감사합니다.”

강용이의 말에 배우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촬영장 분위기까지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강용이었다. 다시 촬영이 이어졌다. 장시간의 촬영에 지칠 법도 했지만, 배우들은 최선을 다했다.

“간식들도 드시고 따듯한 커피도 있습니다.”

강우는 오늘 하루 강용이의 든든한 서포터였다. 강우가 준비한 밥차와 간식 차에서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위한 온갖 음식들이 제공되었다.

“컷! 고생하셨습니다!”

길고 긴 촬영이 끝났다. 강우와 강용이는 촬영을 하는 내내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강용이가 배우들을 향해 다가가 꾸벅 인사를 했다. 배우들이 강용이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윽고 강우와 강용이는 촬영장을 나왔다.

탁. 탁.

두 사람은 강우가 몰고 온 승용차에 나란히 올라탔다. 시간은 어느새 늦은 밤이 되어 있었다.

“안 피곤해?”

강우가 물었다. 강용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나도 안 피곤해. 하루 더 있으래도 있을 수 있어.”

잔뜩 상기된 강용이의 표정을 보니 강우의 기분도 참 좋았다. 적성에 맞는 미래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 적성과 환경이 받쳐주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강용이는 지금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래, 우리 막내 앞으로 더 배우고 노력해서 세계 최고의 감독이 돼야지.”

강용이가 가진 궁극의 꿈은 바로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었다. 강용이가 씩 웃으며 콧잔등을 훔쳤다.

“당연하지. 나 유명해질 거야. 그래서 오스카상도 탈 거라고!”

강용이의 호언장담에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미래 기억을 떠올려보면 한국인 출신 영화감독이 오스카상을 받은 적이 있지 않던가.

‘내 동생 강용이가 못 받으라는 법은 없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렇듯 동생 앞에서는 팔불출이 되는 강우였다.

“안전띠 매.”

“응.”

두 사람이 사이좋게 안전띠를 맸다. 강우가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영화 이야기를 할 때 강용이는 생기가 가득했다.

스르륵.

이윽고 두 형제를 태운 승용차가 한남동 집에 도착했다.

지이잉.

차고 문이 열리고 강우가 안쪽으로 주차를 했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강용이는 깊은 잠이 들어있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으음….”

강용이가 옅은 잠꼬대를 했다. 차에서 내린 강우가 조수석을 열었다. 그리고 잠든 강용이를 조심히 업었다. 제법 커버린 강용이는 이제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강우는 차고와 연결된 문을 열고 곧장 집으로 올라갔다.

멍! 멍!

마당에서 뛰어놀던 루피가 강우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강우가 황급히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루피야 쉿. 강용이 자.”

루피가 말을 알아들었는지 낑낑대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멍! 멍!

우렁찬 소리를 내며 백구가 별채에서 달려 나왔다. 그 소리에 잠들었던 강용이가 번쩍 눈을 떴다.

“장군이? 장군이야?!”

강용이가 강우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런 강용이에게 장군이가 달려들어 온몸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장군아! 너 언제 왔어?”

“장군이 오늘 부산에서 데리고 올라왔지.”

별채 쪽에서 박지영이 나타났다.

“드디어 데리고 왔구나.”

강우가 장군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산에서 큰집 식구들이 키우던 백구 장군이었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와 아파트 생활을 하며 부산 외갓집에 맡겨놓았었다. 그리고 큰 저택으로 이사하며 드디어 장군이도 합류한 것이었다.

“응, 신기한 게 장군이랑 루피랑 진짜 금세 친해지더라.”

“그래?”

강우와 박지영이 흐뭇한 표정으로 강용이와 루피 그리고 장군이를 바라보았다. 늦은 밤 조명이 밝혀진 마당에서 뛰어노는 강용이와 루피 그리고 장군이의 모습은 참 보기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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