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2화 (302/402)

오늘 하루면 충분합니다.

SJ 푸드빌은 그룹 본사 안에 있었다. 한 층을 통째로 쓰고 있는 사무실 안에 옅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사무실 안의 직원들은 연신 출입문 쪽을 힐끔거렸다. 그때였다.

덜컥.

사무실 안에 있는 부장실의 문이 열리고 중년 남성이 나왔다. 잘 차려입은 중년 남성은 SJ 푸드빌 중국 진출을 진두지휘하던 강준식 부장이었다.

“다들 정리 깨끗이 했지?”

강준식 부장의 말에 직원들이 다시 한번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강준식 부장이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한쪽에 있는 회의실로 다가갔다. 회의실 문을 열어본 강준식 부장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회의실 깔끔하게 잘 정리했군.”

강준식 부장이 이러는 이유는 있었다.

“오늘 박강우 부사장님 오시니까 다들 정말 잘해야 해. 알겠지?”

오늘은 강우가 SJ 푸드빌 사무실에 오는 날이었다. 지난번 회의가 끝난 후 처음 가지는 미팅이었다.

‘지난 회의 때 정말 대단했다고 들었는데….’

깐깐하기로 유명한 SJ의 이사진들을 단체로 침묵하게 만든 프레젠테이션이라고 들었다. 재계에 소문이 자자한 강우를 만날 생각에 걱정 반 기대 반인 강준식 부장이었다.

지이잉-

이윽고, 자동문이 열리고 강우가 나타났다. 그 뒤로는 동양 무역의 직원들이 함께였다. 오늘, 같이 온 직원은 황규범 부장과 강종민 과장이었다.

“아이고! 부사장님!”

강준식 부장이 화들짝 놀라 문 쪽으로 다가갔다. 강우가 움찔하며 강준식 부장을 바라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SJ 푸드빌 강준식 부장입니다. 이번 중국 진출 사업 건의 책임자였습니다.”

“아. 네.”

강우가 손을 내밀어 강준식 부장과 악수를 하였다. 강준식 부장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모시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오늘 정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 강우는 SJ 푸드빌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인수하러 왔다. 중국 사업 진출을 위해서는 현재 식품 사업부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했다.

“아…. 이분은.”

강준식 부장이 황규범 부장을 바라보았다.

“동양 무역 황규범 부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강준식 부장입니다.”

두 부장이 악수하며 통성명했다. 그사이 강우는 쓱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직원들의 잔뜩 긴장한 표정에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다들 안녕하십니까? 동양 무역 박강우 부사장입니다. 오늘 푸드빌에 방문해서 참 기분이 좋습니다. 앞으로 중국 진출 건으로 자주 보게 될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직원들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같이 친근한 경영진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럼, 부사장님 회의실로 안내하겠습니다.”

강준식 부장의 안내를 받으며 강우와 황규범 부장이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엄청난 양의 서류철이 쌓여있었다. 서류철의 양을 확인한 황규범 부장이 움찔할 정도였다.

“지난 5년 동안의 식품부서의 매출 자료와 마케팅 관련 자료 그리고 식품부에서 생산하고 있는 제품들에 대한 자료를 모두 정리했습니다.”

“좋네요. 고생하셨어요.”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SJ 그룹도 대기업다웠다. 강우가 부탁한 자료를 짧은 시간에도 완벽히 준비해놓은 것이었다. 중요한 자료들만 뽑아달라고 했는데도 그 양이 정말 엄청났다.

“그런데 정말 오늘 안으로 확인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동양 무역으로 자료를 가져다드릴 수도 있습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오늘 하루면 충분합니다.”

“아…. 네.”

강준식이 더는 묻지 않았다. 이윽고 강우와 황규범 부장이 자리에 앉았다. 강준식은 강우의 자료 확인을 돕기 위해 자리 잡고 앉았다.

“음료나 간식도 준비했습니다. 부족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한쪽에 쌓여있는 간식 더미를 보고는 강우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준식 부장이 책상 밑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먹성이 좋다던 강우를 위해 잔뜩 준비한 간식들이었다. 준비하는 데 어려운 것도 없었다. SJ 푸드빌에서 생산하는 제품들이 많았으니 말이다.

“아.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강우가 만족스러워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 강우는 눈앞에 있는 자료를 빠른 속도로 머릿속에 저장할 생각이었다. 나날이 좋아지는 기억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글자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담는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렇게 뇌를 쓰고 나면 엄청난 허기가 밀려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말 저희는 괜찮습니다. 자료가 너무 많으면 오늘 다 확인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대외비이긴 하지만 동양 무역에는 모두 오픈해도 좋다는 허가도 난 상태입니다.”

강준식 부장이 정말 괜찮다며 재차 말했다. 강우가 SJ 그룹을 생각해 자료를 유출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네, 해보고 힘들면 말씀드리죠.”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강준식 부장의 친절을 더 괜찮다 하기도 민망했다. 강우가 황규범 부장을 바라보았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네, 부사장님.”

황규범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정리된 서류를 연도별로 시작해 강우에게 전해주기 시작했다. 강우가 몸을 크게 기지개 켜더니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사라락. 사라락.

강우가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강우는 서류에 적힌 각 년도 분기별 매출 현황, 매출 현황별 자세한 분석표, 식품 종류들의 연도별 매출 등등을 빠르게 확인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SJ 푸드빌에서 생산하는 식품 라인업들의 원자재 수급처와 원자재 가격 그리고 제조 공정현황까지 점검했다.

사라락. 사라락.

강우가 점점 빠르게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턱. 턱.

강우의 옆쪽으로 확인을 끝낸 서류 더미가 다시 쌓여가기 시작했다. 강준식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강우와 황규범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서류를 전해주는 황규범과 그걸 속독하듯 넘겨버리고는 한쪽에 다시 쌓아놓는 강우였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지?’

강준식 부장은 살아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얼떨떨해했다. 그리고 속으로 엄청난 고민을 했다. 지금 강우가 보이는 모습이 무엇일까 말이다.

“음…. 배가 좀 고픈데요.”

강우가 잠시 서류 확인을 멈췄다. 그리고는 한쪽에 있는 간식들을 탐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황규범 부장이 자연스럽게 간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품에 가득 간식을 가지고 와 강우 앞에 내려놓았다.

“드시고 하시죠.”

“네.”

강우가 묵묵히 간식을 먹기 시작했다. 회의실 한쪽에 놓인 전자레인지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딸칵.

냉장고에서 꺼내진 음료도 쉴 새 없이 맨몸을 들어냈다. 강우는 그야말로 진공청소기처럼 간식들을 흡입했다.

“와….”

강준식 부장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대식가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그렇게 한참을 흡입하는 강우 옆으로 황규범 부장이 있었다. 황규범 부장은 이런 장면이 익숙한지 여유 있게 간식을 먹었다.

“하…. 역시 맛있네요. 잘 먹었습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배를 채운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강준식 부장이 몸을 부르르 떨며 정신을 차렸다.

“맛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 간식을 더 준비하라고 할까요?”

강준식 부장의 말에 강우가 남은 서류 더미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네, 부탁드립니다.”

강준식 부장이 황급히 밖으로 나가 직원들에게 간식을 더 가져오라 했다. 강준식 부장의 지시를 받은 직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수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덜컥.

강준식 부장이 다시 문을 열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다시 기계처럼 서류를 확인하는 강우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광경이었지만,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음…. 대단한 건지…. 이상한 건지….’

그렇게 강우는 한참이나 서류를 확인했다. 강준식 부장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하루 안에 확인할 수 없는 양의 서류 더미가 점점 반대편으로 쌓여갔다. 그사이에 강우는 몇 번이나 간식을 더 먹었다. 강준식 부장은 이제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포기했다.

탁.

강우가 마지막 서류철을 덮었다. 그리고 깊은숨을 뱉어냈다.

“후…….”

숨을 고른 강우가 슬쩍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무리 늘어난 기억력이라지만, 오늘 강우는 어마어마한 양을 머릿속에 저장했다. 마치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뜨끈한 것도 느껴졌다. 강우가 잠시 눈을 감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기억했던 자료들이 마치 머릿속 도서관이 생긴 듯 연도별 종류별로 차례차례 정리되었다.

“됐습니다.”

강우의 말에 황규범 부장이 시원한 냉수를 따라 강우에게 건넸다.

“부사장님, 고생하셨습니다.”

강우가 냉수를 벌컥 마시고는 힐끗 옆을 바라보았다. 강준식 부장이 강우를 보며 설명을 좀 해달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만했다.

“아…. 제가 기억력이 좀 좋아서요.”

강우의 말에 황규범 부장이 실소를 흘렸다. 기억력이 좀 좋다니 어이가 없었다.

“네네…. 수고하셨습니다.”

강준식 부장이 화들짝 놀라 말했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힐끗 시계를 보니 저녁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회의실의 커다란 통유리를 통해 밖을 바라보니 식품부 직원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일할 모양이었다.

“음…. 오늘 다들 바쁜 거 아니죠?”

강우의 말에 강준식 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우가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프로젝트 무산되고 직원들 사기가 많이 안 좋을 텐데요. 오늘 회식 한번 하시죠? 저도 직원분들 안면도 좀 익히고요.”

“아…. 그게…. 다들 잔업이….”

강준식 부장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식품 부서가 모두 회식하려면 자신의 권한으로는 힘들었다. 1팀부터 3팀까지 있는 본사 사업부의 인원도 많았다. 한꺼번에 인원이 빠진다면 업무 공백이 있을 수 있었다. 강준식 부장이 곤란해하자 강우가 씩 웃으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몇 번의 신호가 가고 덜컥 통화가 연결됐다.

“아…. 접니다 강우.”

-어, 그래 강우야. 지금 본사지?-

강우가 연결한 통화의 주인공은 송경호 사장이었다.

“네, 오늘 자료 인수 잘 끝냈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식품부 직원들 오늘 하루만 빌려주시죠.”

-식품부? 1팀?-

“아니요. 2팀이랑 3팀까지 전부요.”

-그래? 자료가 그렇게 많아? 내가 최대한 요약해서 정리하라 했는데….-

“아…. 아닙니다. 자료 확인은 다 끝났고요. 회식하려고요. 얼굴도 좀 익힐 겸.”

수화기 너머 송경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강우다운 생각이다 싶었다.

-그래, 대신 밥값은 네가 내라.-

“네,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강우가 핸드폰을 품에 넣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직원들은 강우를 바라보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장님이 전부 회식하라고 하십니다. 아…. 퇴근을 하실 분은 퇴근하시고. 회식 가고 싶은 분만 참석하는 거로 하죠. 이게 동양 무역 스타일이라서요.”

강우의 말에 직원들이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하루뿐이었지만. 야근에서의 해방은 참으로 달콤한 것이었다.

* * *

지글지글.

회식 메뉴는 강우답게 화끈한 소고기였다. 강우가 자주 가는 소고깃집을 오늘도 역시 통째로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혹시 미리 회식하려고 준비해놓으신 겁니까?”

소고깃집 앞에 도착한 강준식이 강우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네, 뭐…. 그런 셈이죠.”

강준식이 짧게 탄성을 뱉어냈다. 오늘 하루 짧게 겪어본 강우는 참 특별한 인물이었다. 사무실에서부터 지금까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특별했다.

“들어가시죠. 세팅이 다 돼 있을 겁니다.”

강우가 앞장서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황규범 부장이 강준식 부장을 보며 씩 웃었다.

“들어가시죠.”

“아…. 네.”

가게 안은 금세 북적북적해졌다. 총 2층으로 이루어진 고깃집이 가득 차고 회식이 시작됐다. 강우가 오늘 준비한 메뉴는 1등급 한우 꽃등심과 갈빗살이었다. 부족함 없이 먹으라는 강우의 말에 직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술도 강요하지 말라 했으니 더욱 그랬다.

“부사장님은 한 잔 받으시는 겁니까?”

“네, 그러죠.”

강준식 부장이 술잔을 따르며 또 궁금함을 가졌다. 강우의 주량은 또 얼마일지 말이다. 강우와 황규범 부장의 잔을 채운 강준식 부장이 건배를 제안했다.

“저…. 그런데 부사장님.”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고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강준식 부장이 조금은 붉어진 얼굴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멀쩡한 표정의 강우를 보니 정말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리고 문득 치밀어오르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네?”

강우가 강준식 부장을 바라보았다.

“그…. 정말 자료들을 모두 기억하신 겁니까?”

강준식 부장의 말에 황규범 부장이 씩 웃었다. 그래 처음 보면 의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음….”

탁.

강우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이윽고 강우의 입에서 오늘 보았던 자료의 내용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강준식 부장의 표정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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