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4화 (304/402)

말해봐. 내가 들어줄게.

강우와 이재중이 마주 앉아있었다. 이재중의 옆쪽으로는 대진 건설의 실무진이 함께였다. 잔뜩 긴장한 실무진들은 강우와 이재중의 대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번에 동양 무역 신사옥 건설에서 우리 대진 건설은 이윤을 남길 생각이 전혀 없다. 공사금액 전부를 사용해서 최고의 자재와 인력을 투입해서 지어줄 생각이지.”

이재중이 콧대를 올리며 의기양양했다. 강우를 힐끗 바라보며 ‘어때 우리 대진 그룹이 최고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그러자 이재중이 말을 이어갔다.

“SJ 그룹이랑 너희 가족이랑 인연이 깊은 건 맞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족이 아니냐? 그렇지?”

“네, 가족이죠.”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중이 씩 웃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 이재중이 직접 온 것은 이철금 회장의 명령이기도 했다. 강우가 어제 SJ 그룹을 방문했을 때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몰랐다. 그래서 직접 방문해 강우의 분위기를 살피고 오라고 한 것이다.

“그래, 이제 설계 작업에 들어갈 예정인데 설계도 동양 무역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하거든?”

“그렇지 않아도 생각하고 있는 부분들이 많아요.”

강우는 동양 무역 신사옥을 어찌 지을지 생각해 놓은 것이 있었다. 물론 설계적인 지식은 없었기에 일종의 콘셉트 같은 것이었지만 말이다.

“역시 너라면 그냥 평범하게 설계를 맡길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 그래서 내가 설계 담당 팀장 데리고 왔다.”

이재중의 말이 끝나자 앉아있던 실무자 한 명이 꾸벅 인사를 해왔다.

“설계팀 곽민수 팀장입니다. 이번 동양 무역 신사옥 설계를 담당하게 돼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박강우 부사장입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었다. 곽민수 팀장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동양 무역에서 확보한 부지가 넓어서 원하시는 설계 콘셉트를 최대한 반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우가 미리 확보해놓은 동양 무역 신사옥 부지는 삼성동에 있었다. 대지면적이 약 9,920㎡에 달하는 규모였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콘셉트는 다른 게 아닙니다. 업무와 휴식이 공존하는 그런 공간을 원합니다.”

강우가 설계에 반영되었으면 하는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사원들의 편리를 위한 휴식 공간과 취미활동 공간 그리고 맞벌이 부부들을 위한 유치원과 어린이집 마지막으로 가장 신경 쓰고 싶은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사내 식당은 가장 최고로 만들고 싶습니다. 어지간한 호텔 뷔페 저리 가라 하는 수준으로요.”

강우의 말을 모두 들은 곽민수 팀장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여러 설계를 해보았지만, 지금과 같은 요구사항은 처음이었다. 땅값이 금값인 대한민국이었다. 보통의 클라이언트라면 최대한의 효율을 내기 위한 설계를 요구할 것이었다.

“듣던 대로 정말 사원들을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부분에 중점을 두어서 최대한 설계를 뽑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어느 정도 부지를 할애해서 독립운동 역사박물관도 같이 만들고 싶습니다.”

곽민수 팀장이 탄성을 뱉어냈다. 과연 듣던 대로 존경할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곽민수 팀장이 눈을 빛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역작을 뽑아내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네, 맡겨만 주시면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재중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오늘 하루는 밥을 굶어도 배부를 듯했다.

“그런데 강우야. 동양 무역은 상장할 생각이 없는 거냐?”

이재중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사실 현재 주식을 한다는 사람들의 최고 관심사 중 하나가 바로 동양 무역의 상장 여부였다. 동양 무역이 알짜배기 회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적었지만,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상장이요?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강우의 말에 이재중이 혀를 내둘렀다. 대한민국의 기업 중에 빚이 없는 기업이 없었다. 특히 대기업들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은행의 자금과 국민의 세금으로 컸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식상장은 기업이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큰 이벤트였다.

“신사옥까지 짓는데 자금이 부족하지 않은 거냐?”

“음…. 아마도요?”

하지만 동양 무역은 달랐다. 부채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건실한 회사였다. 아니 오히려 자금이 남아도는 상황이었고, 강우는 그 자금을 이용할 곳을 물색하는 중이었다.

“하…. 대단하네.”

이재중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기업이 상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뭐…. 초기에 도와주신 분들이 있어서 가능했죠.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동양 무역은 없었을 거예요.”

초기 자본을 대준 기무라와 중국 사업의 밑바탕이 되어준 최준까지. 강우에게는 참 고마운 분들이 많았다. 강우는 그분들의 뜻을 잘 이어 동양 무역을 더욱더 크게 발전시키겠다고 생각했다.

“아 참 강우야, 중국은 언제 가는 거야?”

“일단 한국에서 마무리할 일이 있어서요.”

“재원이랑 미나 약혼식 전에는 오는 거지?”

강우가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마사토와의 대화가 조금 마음에 걸리던 강우였다.

“그럼요 제가 빠지면 안 되죠. 그런데 날짜는 잡힌 거예요?”

“아버지는 내년 2월을 생각 중이시더라. 그전에 재원이한테 경영권 승계도 끝내 놓을 생각이시고.”

강우가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재원과 미나가 약혼을 하면서 경영권 승계라는 선물까지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미나는 약혼과 동시에 대진 그룹의 안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마사토 아저씨가 부담을 크게 느낄 만하지….’

반면 미나는 어떤 생각일지 궁금해졌다. 강우가 알고 있는 미나는 심성이 곱고 강한 여자였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평범한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나….’

강우와 미나는 친남매 같은 사이였다. 일본에서의 첫 만남부터 특별했고, 한국에 이민을 온 이후로는 더욱 각별하게 지냈다. 이재원과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강우가 미나를 친동생처럼 챙겨주었었다.

“알겠어요. 어차피 개강 때문에 오래 있지는 못하니까 한국에 시간 맞춰 올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알겠어.”

강우와 이재중 그리고 대진건설의 실무진들은 그 뒤로 한참이나 미팅을 더 가졌다.

* * *

딸랑.

카페 문이 열리고 강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낸 강우가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카페의 한쪽에서 미나가 손을 흔들며 강우를 반기고 있었다. 강우가 씩 웃으며 미나에게 다가갔다.

“미나야, 오래 기다렸어?”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이제는 일본인이라고 하면 놀랄 만큼 한국어를 잘하는 미나였다. 강우가 미나의 반대편에 앉았다.

“오렌지주스 시키고 올게요.”

“어? 아…. 고마워.”

역시 강우가 좋아하는 것도 잘 알고 있는 미나였다. 미나가 계산대로 가서 오렌지주스를 시키고는 기다렸다가 받아왔다.

“여기요.”

“고맙다.”

강우가 오렌지주스를 한 모금 쭉 마셨다. 입안으로 퍼지는 달콤새콤한 맛에 강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본 미나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오렌지주스가 그렇게 좋아요?”

“어? 아…. 뭐 그냥….”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왜 보자고 한 거예요?”

미나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강우가 오렌지주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리고는 미나에게 망설임 없이 물었다.

“마사토 아저씨한테 들었다. 약혼식 날짜 잡고 있다며.”

“아…. 네.”

미나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이재원을 떠올리면 그렇게 좋은가 보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원과 미나는 천생연분이었다. 연애하는 동안 다투는 것을 본 적도 없었다.

“사실 아저씨는 좀 걱정을 하고 계시는 것 같더라.”

“알고 있어요.”

역시 미나도 마사토의 걱정을 알고 있었다. 미나가 말을 이어갔다.

“원래 아빠가 생각이 많은 분이잖아요.”

“알지. 하지만 재원이 형이 재벌 2세라고 해도 똑같은 사람이야. 물론, 다른 재벌가들이 비슷한 집안끼리 인연을 맺고 그러는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재원이 형은 달라.”

강우의 말에 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남자친구인 이재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저는 재원 오빠네 집안이 재벌가라고 다를 건 없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두 사람의 마음이니까요. 그리고 우리 집이 재벌이 아니더라도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우리 아빠는 평생 열심히 살아오셨으니까요.”

“그럼 당연하지. 조선 시대도 아니고 집안 따지면서 결혼하는 건 나도 아니라고 생각해.”

미나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외동딸인 자신에게 강우는 친오빠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역시 말하기도 전에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려 이렇게 나타나 주었다.

“아빠가 걱정하는 건 시간이 해결해줄 거로 생각해요. 재원이 오빠가 대진 그룹을 이끌어나가는데 제가 힘이 돼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강우가 고개를 끄덕했다. 미나는 대기업 안주인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제 걱정이 하나 있기는 해요.”

“말해봐. 내가 들어줄게.”

미나가 숨을 골랐다.

“제가 일본인인 게 걱정이에요.”

강우가 입을 살짝 벌리며 탄성을 뱉어냈다. 미나의 한마디로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미나의 말을 더 들어주기로 했다.

“대진 그룹은 강우 오빠를 도와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있어요. 독립운동 역사를 다시 세우고 유공자분들과 후손분들을 돕고 있고요. 대진 기업의 이미지는 독립유공자 후손의 기업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에요. 그런 기업의 후계자가 일본 여자랑 결혼한다면 분명 이야기가 나오겠죠.”

말을 마친 미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 미나의 고민은 강우가 예상한 대로였다.

“미나야.”

강우가 미나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미나가 고개를 들어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시선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을 망설이는 건 말도 안 돼. 일본인이라고 무조건 안 된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야. 일본인 중에서도 전쟁에 반대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독립운동을 도왔던 사람들도 있었어.”

미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사실 마사토 가족이 한국에 이민을 온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마사토 가족은 강우를 통해 일본의 지난 잘못을 자세히 접했다. 마사토와 가족들은 일본의 잘못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한국으로 와서 강우 가족을 조금이나마 돕고 싶었던 것이었다.

“나는 마사토 아저씨가 왜 한국에 왔는지 잘 알고 있어. 아저씨는 충분히 좋은 일을 하고 계셔.”

강우는 알고 있었다. 마사토는 자신의 수입 중 상당 부분을 재단법인 광복에 후원하고 있었다. 마사토의 아내인 료코 역시 재단에서 진행하는 여러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미나도 강우가 만든 동아리 SLAM의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는 했다.

“누가 뭐라고 하면 그때는 내가 가만히 안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미나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강우의 말에 미나가 눈시울을 붉혔다. 강우의 말을 들으니 혼자 가슴에 쌓아놓았던 고민이 한 방에 날아가 버렸다.

“역시…. 오빠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 우리 가족이 오빠를 만난 건 행운이에요. 고마워요. 오빠.”

“재원이 형 잘 부탁한다. 사람이 덜렁대는 게 있어서 차분한 미나가 잘 챙겨줘야 할 거야.”

강우의 농담 섞인 말에 미나가 킥하고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미나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미나가 번호를 확인하고는 환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

역시 이재원의 전화였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예전부터 양반은 못 되는 사람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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