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8화 (308/402)

거참 신기하네.

“감사합니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한 명의 남성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면접실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 면접자가 나가자 강우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강우야, 고생했다.”

강우 옆쪽에 있던 마사토가 강우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오늘은 동양 무역의 경력직 사원 채용 면접이 있는 날이었다. 서류 면접서부터 엄청난 지원자가 몰렸던 만큼 오늘 있었던 대면 면접에도 많은 사람이 면접을 본 상태였다.

“아니에요. 이번에 진짜 좋은 인재들이 많이 지원해주셨네요.”

“그나마 서류 면접에서 고르고 골라서 이 정도였지. 모두 받았으면 며칠 동안 면접만 봐야 했을 수도 있다.”

마사토의 말에 강우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IMF로 일어난 대량 실직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음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이제 최종 합격자를 뽑아 볼게요.”

강우의 말에 마사토가 눈을 빛내며 기대감을 품었다. 강우가 고르는 인물이면 분명 동양 무역에 가장 필요한 인재일 것이다.

사라락. 사라락.

강우가 면접을 보며 결정을 내렸던 지원자들의 이력서를 한쪽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수백 장이 넘는 이력서였지만, 강우는 정확히 해당 인물의 이력서를 골라냈다.

“지금 제가 골라낸 지원자들에게 바로 출근해 달라고 연락해 주세요.”

“그래, 알겠다.”

마사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알겠다고 했다.

“일단 해외 영업부랑 마케팅부에서 가장 먼저 인력 배치를 해주시고요. 합격자별로 배치 부서는 제가 따로 적어 놨어요.”

“그래, 오늘 진짜 고생 많았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부사장실로 돌아가 퇴근 준비를 했다. 이윽고 동양 무역에서 업무를 마친 강우가 회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완연히 추워진 날씨에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늦은 저녁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는 온통 네온사인이 가득했다. 2002년 월드컵 이후로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이 부쩍 늘어난 상태였다.

“부사장님, 수고하셨습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정시 퇴근을 마친 직원들이 회사 건물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강우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걸음을 옮겼다. 추운 겨울바람이 온몸을 밀어내려는 듯 강하게 불어왔다. 빌딩이 많은 명동거리에 부는 빌딩풍은 강했다. 그렇게 골목골목을 지나 강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 역시나.”

시간을 확인한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약속 시각이 되었지만, 만나기로 한 상대방은 나오지 않았다. 강우가 잠시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재생시켰다.

쿵. 쿵.

요즘 강우가 빠져있는 강렬한 사운드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대학 밴드 동아리를 꾸준히 하는 강우였다. 밴드 활동을 하며 록 음악을 더욱더 좋아하게 되었다. 노래를 들으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명동거리 한쪽에서 신원주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가…. 강우야!”

강우가 이어폰을 빼며 신원주를 바라보았다.

“약속 시각 좀 지켜…. 아니다 됐다.”

“미안 길이 막혀서.”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미래 기억이나 지금이나 약속 시각 어기기로는 1등인 신원주였다. 생각해보면 미래 기억 속 친구들은 신원주가 몇 분이나 약속 시각에 늦는지 내기를 할 정도였었다.

“길은 무슨 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헐레벌떡 뛰어왔겠지.”

“윽….”

신원주가 들켰다는 듯 가슴을 부여잡았다. 강우가 신원주의 등을 팍팍 쳤다.

“들어가자 너 기다리느라 배가 등에 닿는 줄 알았으니까.”

“흐흐…. 대신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

신원주의 말에 강우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오늘 면접을 보며 엄청나게 능력을 소모한 강우였다. 사람들을 만나 악수하며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희미하게 엿보았다. 독립운동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정말 단편적인 기억들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정보로도 사람을 판단하기에는 충분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나 할까.’

그렇게 능력을 사용하고 강우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했다. 에너지를 소비했으니 당연히 엄청난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괜찮겠냐? 나 지금 엄청나게 배고프다.”

강우의 말에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던 신원주가 흠칫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렸다.

“근처에 고기부페 없냐?”

“됐다. 그냥 들어가 내가 살 테니까.”

“아니다 오늘 내가 늦었으니까 내가 산다.”

신원주가 강우를 이끌고는 근처 고기부페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결국, 명동에서 외곽으로 한참 지난 곳에서 고기부페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하아…. 내가 산다니까.”

“어허. 가난한 대학생에게 얻어먹으려면 어쩔 수 없다.”

신원주가 사뭇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 중 유일하게 아직 순수 대학생의 신분을 가진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강우가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아니 내가….”

“시끄럽고 들어가자.”

신원주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저놈의 고집이랑 마이웨이는 여전해.’

대학 생활을 하며 훨씬 나아진 대인관계였지만, 편한 사람을 만나면 예전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기도 하는 신원주였다. 강우가 신원주를 따라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후끈할 만큼 따듯했다. 난방기의 온풍은 물론이고 고기를 굽는 숯의 열기까지 더해져서였다.

“몇 명이십니까?”

가게 주인이 강우와 신원주를 반겼다.

“두 명이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강우와 신원주가 자리를 안내받아 앉았다. 고기부페라 더 주문할 것도 없었다. 금세 밑반찬들이 나오고 숯도 자리를 잡았다.

“맥주랑 소주 한 병 주세요.”

신원주가 술도 시켰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기 가지고 올게.”

“어. 많이 가져와라. 나 진짜 배고프다.”

강우의 말에 신원주가 잠시 고민에 잠기며 생각했다. 오늘 고기부페를 온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다. 신원주가 힐끗 가게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강우가 진짜 배고프다는 것은 정말이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일단 고기를 산처럼 쌓아가야겠군.’

신원주가 고기를 종류별로 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산처럼 쌓이는 고기의 양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쏠렸다.

치이익.

신원주가 자리로 돌아오자 강우가 급하게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역시 고기 굽기 고수인 강우였다.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얇은 소고기부터 굽기 시작했다.

“먹자.”

“더 익혀야 하는 거 아니냐?”

신원주가 고기를 보며 말했다.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소고기는 핏물만 빼고 먹어도 돼.”

“어어.”

강우가 허겁지겁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소고기가 금세 줄어들고 이번에는 돼지고기 차례였다. 산처럼 쌓였던 고기가 금세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밥 좀 시켜줘라. 한 열 공기.”

강우의 부탁에 신원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고기 먹지.”

“내 양심에 찔려서 그런다.”

신원주가 고개를 끄덕했다. 그리고 공깃밥 열 개를 시켰다. 강우를 주시하던 가게 주인이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주문을 받았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이르다는 것을 몰랐다.

“천천히 좀 먹어라.”

“어어.”

강우는 정말이지 많이 먹었다. 능력을 사용하고 나면 항상 그렇듯 말이다. 이윽고 어느 정도 배를 채운 강우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술 한잔 받아라.”

“어.”

강우와 신원주가 소주잔을 나누었다. 신원주가 소주를 들이켜더니 미간을 살짝 좁혔다. 강우가 신원주를 보며 말했다.

“요즘 다들 바빠서 통 만나지를 못하네.”

“다들 일하느라 그렇지 뭐.”

신원주가 강우의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넌 어떠냐? 준비하고 있는 인턴십은 잘 되고 있어?”

“어,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다.”

이제 3학년을 재학 중인 신원주는 서서히 앞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SLAM은 물론이고 영화제작 동아리에서도 열심히 활동해 경험을 쌓고 있었다. 그리고 4학년이 되면 곧장 사회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진에도 지원할 거지?”

“당연한 거 아니냐? 지금 이쪽에서 제일 대우도 좋고 핫한 곳인데.”

“그런가?”

강우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자 신원주가 슬쩍 물었다.

“그나저나 강용이한테 그런 재능이 있을 줄 몰랐다.”

“내 동생이지만 대단하지.”

신원주가 부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강우 형제가 타고난 각각의 재능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너도 그렇고 강용이까지.”

“너도 감각 있잖냐. 이번 인턴십 지원 잘될 거야.”

“그래야지. 보라는 벌써 사회생활 자리 잡아 가는데 나도 빨리 자리 잡아야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근황을 물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만큼 쌓여가는 빈 접시는 덤이었다. 이윽고 강우가 신원주에게 슬쩍 물었다.

“어제 익준이 만났다.”

익숙하지도 낯설지도 않은 이름에 신원주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이내 이름의 주인을 떠올렸다.

“익준이? 아~ 신익준?”

이제야 떠올렸다는 듯한 신원주의 표정에 강우가 조금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미래 기억 속 친구들과의 연결고리가 바로 신원주였다. 하지만 바뀌어 버린 인연은 신원주에게도 마찬가지였나보다.

‘하긴…. 원래 미래 기억대로라면 원주도 이과를 가기는 해야 했었지.’

강우가 아쉬움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익준이. 알고 보니까 나은이랑 극단 동기였더라고.”

“진짜? 거참 신기하네.”

그 말을 끝으로 신원주가 더는 신익준에 대해 궁금해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미래 기억 속에서는 원주랑 익준이가 엄청 친했지. 성도 같고 이름도 비슷해서 친해졌고 용정고를 다니던 다른 세 친구와도 원주가 먼저 친해졌고.’

강우가 혹시나 다른 친구들과 연결고리가 있나 싶었던 생각을 접었다. 달라진 현재의 인연은 신원주에게도 똑같이 적용된 상태였다.

“지금은 작은 술집 하나 오픈했더라고. 언제 한번 놀러 가자.”

“그래? 뭐…. 그러던지. 아 애들이랑 같이 가면 되겠네. 춘배랑 광웅이는 일 학년 때 같은 반이었으니까.”

“그래, 언제 날 한번 잡자.”

“너 조금 있으면 중국 간다며? 그 전에? 아니면 갔다 와서?”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스케줄 보고 연락해 줄게.”

“그래, 그럼.”

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신원주의 모습에 강우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이나 술잔을 나누었다. 이윽고 식사 겸 술자리가 끝났다.

“아까 말한 대로 오늘은 내가 산다?”

“됐어. 가난한 학생 지갑 가벼워지는 소리 듣기 싫다.”

“어허!”

신원주가 으름장을 놓으며 계산대로 향했다. 강우와 신원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만세를 외치던 가게 주인이었다.

“얼마에요?”

“오만 팔천 원입니다.”

액수를 계산한 가게 주인이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강우가 먹어 치운 고기의 양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여기요.”

신원주가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계산을 마쳤다.

“원주야, 먼저 나가 있어 봐. 나 뭐 놓고 왔다.”

“어? 어어.”

신원주가 평소에는 보기 드문 장면에 고개를 갸웃했다. 완벽 그 자체 강우가 무언가를 놓고 오다니 말이다. 하지만 이내 가게 밖으로 나갔다. 신원주가 나가자 강우가 슬쩍 계산대로 향했다.

“그…. 제가 너무 많이 먹어서…. 뷔페 4인분 정도 더 계산해 주세요.”

강우의 제안에 가게 주인이 심각한 내적 갈등을 일으켰다. 하지만 뷔페를 운영하는 자신의 자존심이 걸려있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많이 드시는 분도 있는 거죠.”

“그러지 말고 받으세요.”

강우가 4인분만큼의 돈을 계산대에 올려놓고 빠르게 가게를 벗어났다. 잠시 계산대 위에 올려진 현금을 바라보던 가게 주인이 슬쩍 손을 들어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 아직 세상은 따듯하다고 느꼈다.

“원주야, 가자.”

가게 밖으로 나온 강우를 신원주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랜 친구인 강우가 뭐를 하고 나왔는지 대충 눈치챈 것이다. 하지만 그게 또 강우의 매력이었다. 그냥 모른 체하며 씩 웃었다.

“오늘 분위기 좋은데 애들 불러서 한 잔 더 콜?”

강우가 씩 웃었다.

“콜. 목동 사거리로 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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