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봐요. 없죠?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레스토랑에 강우와 아버지 그리고 마사토와 진남규가 앉아있었다.
“오늘은 정말 제가 사는 겁니다. 절대 다른 분이 계산하기 없습니다?”
진남규가 특히 강우를 경계했다. 신출귀몰하게 계산을 해버리는 강우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은 진짜 지갑도 안 가져왔어요.”
진남규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아버지와 마사토가 그 모습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남규야, 오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 고급 요리들에 아버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진남규가 씩 웃었다.
“저한테 주시는 월급이 얼마인데요. 괜찮습니다. 아…. 그리고 와인도 한 병 시켰습니다.”
“그래, 이왕 사주는 거 잘 얻어먹으마.”
아버지의 말에 진남규가 씩 웃었다. 식사가 시작되고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고 갔다. 식사가 무르익고 진남규가 강우에게 궁금한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회장님, 그 친구분은 언제 오시는 겁니까?”
“지금 완성된 프로그램 서버에 올리는 작업 중이에요. 그거 마무리 짓고 바로 온다고 했으니까. 며칠 뒤에 올걸요?”
“회장님 친구분도 정말 대단하시더군요. 개발 능력도 뛰어나시고요.”
강우가 씩 웃었다. 친구가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이번에 중국에서 런칭될 SNS의 초기 개발은 JG 소프트에서 담당했었다. 강우는 한국에서도 SNS 플랫폼을 런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래 주 종목은 게임 개발인데 제가 이것저것 시켜서 이제는 만능이 됐죠.”
“이번에 개발한 게임도 회장님이 아이디어를 엄청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도대체 못 하시는 게 있기는 하신 겁니까?”
진남규가 강우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보통 사람이라면 특출난 분야가 있고 조금 처지는 분야도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그런 게 없었다. 진남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공부도 엄청나게 잘한다고 들었고, 운동도 잘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사업적인 감각과 투자 감각도 천재적이었다.
“글쎄요. 아직 안 해 본 건 못 할 수도 있죠.”
“하?”
강우의 뻔뻔스러운 말에 진남규가 입을 멍하니 벌렸다. 그런 진남규를 보며 강우가 픽 웃었다.
“농담입니다. 농담. 저도 못 하는 거 많아요.”
“예를 들면요?”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곰곰이 못 하는 것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막상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강우가 고민하자 진남규가 실소를 흘렸다.
“거봐요. 없죠?”
“음….”
그런 강우의 표정에 아버지와 마사토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진남규가 강우를 향해 말했다.
“진짜 이런 말 하면 그렇지만 어떨 때 보면 정말 부럽습니다. 저도 회장님처럼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 되는 게 목표입니다.”
“하하….”
진남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강우는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아 참. 회장님.”
진남규가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쳤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진남규의 질문에 강우가 뭐를 먹을 새도 없이 답했다.
“네?”
“여자친구분 있지 않습니까?”
“나은이요?”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남규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엔터 사업 부분 프로젝트에 제1호 연예인으로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나은이를요?”
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진 엔터가 중국 진출을 하면서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이 대표 연예인이었다. 물론 여러 프로그램 제작과 영화제작 그리고 방송국 운영 등도 진행할 것이었다. 하지만 엔터 사업의 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연예인 아니겠는가.
‘음…. 하긴 앞으로 세상은 점점 세계화되고 그에 맞춰 국경을 떠나 많은 스타가 탄생하지.’
그리고 현재 중국도 여러 한국 드라마들이 알음알음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연예인의 중국 진출도 고려해볼 만했다. 다만 이나은이 한국에서 인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 해도 중국 내에서 인기는 미지수인 상태였다.
“그…. 사실은 이나은 씨도 중국에서 점점 인지도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어떻게요? 나은이가 출연한 작품이 중국에 수출된 건 없다고 들었는데요? 아…. 혹시 게임 CF 때문입니까?”
강우의 질문에 진남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희 그룹 홍보물을 통해 회장님과 결혼할 분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기에 중국 진출을 하신다면 분명 대박이 날 겁니다.”
“아…. 홍보물이요….”
강우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건 참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강우 가족의 일대기를 담은 드라마도 촬영하고 있지 않던가.
“좋네요. 마침 한국에서 새 드라마 촬영 중인데 그 드라마의 중국 수출을 타진해보면서 배우들의 중국 진출도 같이 논의해보죠.”
“네, 회장님.”
강우가 씩 웃었다. 강우 자신에게 큰 관심을 보이는 중국인들에게 지금 촬영 중인 드라마는 홍보물 이상의 성과를 거둘 것이었다. 그리고 순간, 강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양부님이 주석의 자리에 오르면 중국의 대외정책이나 정책 기조를 크게 바꿀 수도 있을지 몰라.’
벌써 위진오의 영향으로 중국 내에 남아있는 독립투사들과 후손들의 대우도 크게 개선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중국 내의 독립운동 유적지들도 미래 기억보다 훨씬 많은 곳이 훌륭하게 보존 및 복원이 되고 있었다.
‘그래, 양부님이라면 충분히 중국을 올바른 길로 이끄실 수 있을 거야.’
강우가 눈을 빛냈다. 그리고 이번 일정에서 만나기로 한 위진오를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작은 인연으로 시작된 위진오와의 관계가 이제는 커다란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게 탄탄해진 상태였다.
“아버지, 양부님은 언제 만나기로 하셨어요?”
“진오 형님? 요즘 엄청 바쁘신 거 같더라. 시간 나면 바로 연락해주신다고 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식사 자리가 이어졌다. 강우와 진남규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만난 강우에게 진남규는 궁금한 것이 정말 많았다.
“허…. 이거 이러다가 나보다 강우에 대해 더 많이 알겠는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탄성을 뱉어낼 정도였다.
* * *
스르륵.
강우 가족의 중국 아파트 앞에 고급세단이 멈춰 섰다. 그리고 아버지와 마사토가 내렸다. 뒤이어 따라온 고급세단에서 강우와 진남규가 내렸다.
“그럼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강우가 아버지와 마사토를 향해 말했다. 아버지가 살짝 아쉬운 내색을 보였다.
“그래, 둘이서 한잔한다고 하니까 나는 이만 들어가셔 쉴게.”
식사가 끝나고 진남규는 강우에게 술자리를 권했다. 아버지가 화색이 돌며 같이하려고 했지만, 진남규가 강우와 둘만 마시자고 했다. 그런 이유로 아버지는 지금 조금 섭섭한 상태였다.
“아…. 사장님. 제가 내일 또 한잔 모시겠습니다. 오늘은 꼭 둘이서 한잔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알겠다. 알겠어. 나도 피곤해서 쉬고 싶었어.”
아버지가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 모습을 보던 마사토가 실소를 흘렸다.
“정식, 들어가서 둘이 한잔해. 젊은 사람들 이야기하는데 끼지 말고.”
아버지가 일격을 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지나간 세월과 젊은 날을 떠올리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래, 우리는 우리끼리 한잔하자고.”
“그래.”
아버지와 마사토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같이 갈 걸 그랬나요?”
“오늘 드릴 말씀이 좀 더 있습니다.”
진남규의 진지한 표정에 강우가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알겠습니다. 일단 차에 타서 이동하죠.”
“네, 회장님.”
강우와 진남규가 고급세단에 올라탔다. 진남규가 미리 언질을 줘두었는지, 기사는 망설임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달리는 차 안에서 진남규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어라고 말을 걸려던 강우도 담담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르륵.
잠시 후. 고급세단이 북경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외곽에 도착했다. 강우와 진남규가 차에서 내렸다.
“대기하지 말고 퇴근하세요.”
강우의 말에 운전기사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고급세단이 두 사람 곁을 떠나갔다. 강우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남규가 강우를 데리고 온 곳은 야시장이었다. 늦은 저녁을 맞이한 야시장에는 붉은색 등들이 온통 거리를 붉게 비추고 있었다.
“오늘 제가 모실 곳은 여기입니다.”
강우가 픽 웃었다. 저녁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그리고 늦은 저녁 술 한잔은 야시장이라니. 하지만 딱히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강우는 이런 분위기를 즐기는 편이었다.
“분위기 좋네요. 사람도 많고.”
“사람이 많죠. 그래서 제가 고른 장소이기도 합니다.”
진남규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강우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한참 걸어가던 진남규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강우를 향해 다시 다가왔다.
“제가 깜빡했군요. 회장님의 인기를.”
진남규의 말이 끝나고 강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강우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서로 강우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듯 말을 주고받았다.
“어…. 여기 사람이 너무 많은데….”
강우도 흠칫했다. 낮에 겪었던 일을 떠올리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야시장에 있는 수많은 인파의 숫자만큼이나 두려운 일이 벌어질까 걱정이었다. 진남규가 강우를 다시 끌어당겼다.
“일단 변장부터 좀 해야겠습니다.”
“벼…. 변장이요?”
진남규가 말없이 강우를 끌고 근처의 노점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관광객들에게 판매할 잡다한 것들이 많았다. 진남규는 그중에서 괴상하게 생긴 중국식 모자 하나 그리고 알이 작아 이게 눈을 가리는 효과가 있을까 싶은 선글라스를 하나 샀다.
“자. 이거.”
그리고는 강우에게 턱 하니 내밀었다. 강우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남규 형은요?”
“저는 알아볼 사람이 없습니다.”
“하아….”
강우가 짧게 한숨을 쉬고는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썼다. 강우가 입고 있는 정장 코트와 환상의 조합을 이룬 모습에 진남규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이…. 이제 아무도 몰라볼 겁니다.”
“못 알아보는 대신 화제 집중은 더 잘 되겠네요.”
강우의 말대로 주변의 시선이 강우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청나라 시대에나 볼법한 관모에 알이 눈을 가리지도 못할 크기의 선글라스 누가 봐도 기괴했다.
“못 알아보면 충분합니다. 일단 가시죠.”
진남규가 입술을 실룩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진남규의 뒤를 따라갔다. 이윽고 강우와 진남규는 커다란 음식점에 도착했다.
“날씨가 춥지만, 야외에 앉으시죠?”
“아…. 저는 하나도 안 춥습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이 정도 추위야 강우에게는 우스웠다. 진남규도 옷을 두껍게 입어 추워 보이지는 않았다. 강우와 진남규가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주고 사라졌다. 역시나 먹는 것의 다양성이라면 세계 최고인 중국다웠다. 메뉴판을 빼곡히 채운 메뉴를 보며 강우가 고민에 빠졌다.
“여긴 제가 삽니다?”
“어? 지갑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강우가 씩 웃으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걸 믿었어요? 아무튼, 제가 살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사실 오늘 하루 엄청난 양의 서류를 확인하고 극심한 허기를 느낀 강우였다. 하지만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양껏 먹을 수가 없었다. 진남규의 지갑 사정도 걱정이었고, 애초에 그렇게 먹을만한 장소도 아니었다.
“제가 오늘 제대로 먹어볼 생각이라 그럽니다.”
강우가 씩 웃고는 종업원을 불렀다. 그리고 메뉴판에 있는 메뉴를 종류별로 다양하게 엄청나게 시켰다. 메뉴를 받아 적어 내려가던 종업원이 강우를 보며 의심의 눈길을 보낼 정도였다.
“다 먹을 거니까 차례대로만 가져다주세요.”
강우의 말에 종업원이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갔다. 손님이 다 먹겠다니 그러려니 했다. 종업원이 돌아가고 강우가 진남규를 바라보았다.
“오늘 할 말이 있다고 하셨죠?”
진남규가 살짝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