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2층을 가득 메운 쌍둥이 남매의 친구들은 전부 북경대를 다니는 학우들이라 했다. 강우는 허탈한 표정으로 매장의 중앙에 앉아있었다. 그런 강우의 양쪽으로는 마치 관우와 장비처럼 위이강과 위단향이 위풍당당 서있었다.
“형, 진짜 마음껏 시켜도 돼요?”
위이강이 강우를 향해 슬쩍 물었다. 강우가 위이강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패스푸드점인 이곳에서 마음껏 시켜봐야 얼마나 나오겠냐 싶었다.
“어, 이왕 사는 거 화끈하게 사야지. 너희 체면도 있고.”
“그래도 여기 비싼데….”
위이강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맘때의 중국에서 강우와 쌍둥이 남매가 방문한 패스트푸드점은 고급 레스토랑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그만큼 가격도 한국보다는 비쌌고 말이다.
“비싸다고? 여기가?”
“네.”
강우가 씩 웃었다.
“그래도 괜찮으니까. 마음껏들 먹으라고 해.”
“이강, 강우 오빠가 설마 돈이 없겠어? 사준다고 할 때 먹자.”
위단향의 말에 위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현재 중국 내에서 손에 꼽히는 부자가 바로 강우였다. 또한, 중국에서 가장 화제의 중심에 있는 청년 사업가였다. 지금 매장 안의 뜨거운 열기도 온통 강우를 향한 친구들의 관심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애들 몇 명 데리고 가서 주문하고 올게요.”
“어, 여기 있다.”
강우가 품에서 카드를 꺼내 주었다. 중국 법인에서 내어준 카드였는데 한도가 얼마인지는 강우도 알지 못했다. 진남규가 말하기를 그냥 사고 싶은 거는 사도 된다고 했을 뿐이었다. 물론, 법인카드니까 막 쓰면 안 되지만 말이다.
“네!”
위이강이 카드를 받아서는 친구 몇 명을 호명했다. 위이강에게 지명받은 친구들이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위이강이 친구들과 함께 주문하러 내려갔다. 강우가 슬쩍 분위기를 살폈다.
‘하…. 이거 오늘 그냥 빠져나가긴 글렀네.’
강우가 속으로 짧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는 호기심, 질투, 선망 그리고 옅은 적대감도 섞여 있었다.
“오빠,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놀랐죠?”
위단향이 강우 옆에 앉으며 물었다.
“진짜 전부 친구들이야?”
“그럼요. 그나마 추첨으로 뽑은 게 이 정도에요. 오늘 오고 싶어 한 친구들이 얼마나 많다고요.”
위단향의 말에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아니 나한테 왜들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건데?”
“당연하죠. 지금 중국의 청년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게 바로 오빠니까요.”
“내가?”
강우가 진남규와 홍보 책자를 떠올렸다. 모든 것의 시작이 바로 그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위단향의 말은 달랐다.
“그럼요. 광복이라는 회사를 순식간에 초거대 재벌로 만들었고, 중국 내에서 지금 유명한 기업들치고 오빠한테 투자받지 않은 곳이 없잖아요. 그리고 제 친구들은 오빠가 중국 사회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올 것이라고 기대 중이에요.”
“변화의 바람이라….”
강우가 짐짓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현재 중국의 청년층은 급격한 변화의 물결을 겪은 세대였다.
‘밀려드는 서양의 문물 그리고 급격하게 변해가는 인터넷 세상 온갖 유흥거리와 새로운 취미거리.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경제의 급격한 발전으로 인한 빈부격차와 부패 그리고 사회의식 부족 등등 많은 문제를 겪는 세대이지.’
강우가 문득 미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래, 양부님이 주석의 자리에 오르면 미래는 바뀐다. 지금 눈앞에 있는 세대들은 양부님이 이끌 중국의 핵심세대가 될 연령대지.’
강우가 씩 웃었다. 이제 곧 강우는 중국에 문화 대침공을 시작할 것이었다. 미래의 기억보다 빨리 그리고 강력하게 중국의 젊은 세대가 한류를 받아들이고 친근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대표적 친한파인 위진오의 정권까지 이어진다면.
‘미래의 기억처럼 골치 아픈 일은 훨씬 줄어든다는 거지.’
강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십억이 넘어가는 중국 인구에 비하면 한 줌에 한 줌도 되지 않는 인원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변화는 아주 의외의 곳에서 작은 날갯짓으로도 시작되는 것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던 강우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감정이 담긴 시선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자자! 일단 먹고들 하자고.”
이내 1층으로 내려갔던 위이강과 친구들이 돌아왔다. 양손에 쟁반을 들고 있었다. 따라 내려간 사람들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매장의 직원들도 쟁반을 들고 올라왔다. 금세 음식들이 배분되기 시작했다. 역시 중국 특유의 소란스러움으로 금세 2층이 가득 찼다.
“오빠, 또 먹을 거죠?”
위단향이 강우 몫의 음식도 챙겨주었다. 강우가 엄청난 대식가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강우가 쟁반을 받으며 물었다. 점심을 많이 먹기는 했지만, 시간이 많이 흘러 저녁 시간이었다.
“단향이는 안 먹어?”
“어후…. 나는 오늘 너무 많이 먹었어요.”
먹는 양이 적은 위단향은 배가 부른가 보다. 슬쩍 옆을 보니 위이강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왁자지껄 떠들며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강우가 픽하고 웃었다. 그러자 위단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강이는 정말 말릴 수가 없어요. 학교에서도 동기 중에는 대장이에요. 대장. 그런데 오늘 강우 오빠까지 왔으니 이강이 어깨가 천장에 닿겠네요.”
“그래?”
강우가 위이강을 바라보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위풍당당한 위이강의 모습에서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하긴…. 양부님도 계시고 이강이도 능력 있는 아이니까.’
피는 못 속인다고 위이강 역시 위진오만큼 리더십이 있는 남자인가 보다. 슬쩍 들어보니 친구들과의 대화도 주도하고 있었다. 문제는 주로 한국 문화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강우가 피식 웃으며 햄버거를 먹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너희들이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던 강우 형이랑 이야기 나눌 시간을 줄게.”
식사가 끝나고 위이강이 선언하듯 말했다. 왁자지껄하던 2층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매장의 앞쪽으로 걸어갔다. 위이강과 위단향이 테이블 하나를 가지고 와 강우 앞에 놓아주었다. 오늘을 위해 쌍둥이 남매는 매장 2층을 통째로 장시간 빌렸다고 했다.
“먼저 질문할 사람 손 들어봐.”
위이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장 안으로 손이 벌떡 솟아올랐다. 마치 비가 온 뒤 죽순이 솟듯 한 손들을 보며 강우가 씩 웃었다. 그리고는 위이강을 바라보았다. 강우의 의도를 알아차린 위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앉아있는 순서대로 가자.”
위이강이 맨 앞줄에 있는 친구를 가리켰다. 지목받은 위이강의 친구는 날카로운 눈빛의 남학생이었다. 남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강우를 향해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북경대 경영학과를 다니는 지오림이라고 합니다. 먼저 이런 뜻깊은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강이랑 단향이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지오림의 말에 친구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그리고 강우를 향한 진지한 시선들을 보냈다. 강우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저는 시장경제는 무한 경쟁이라고 배웠습니다. 중국에 들어왔던 많은 외국 자본들이 그러했고요. 그런데 회장님이 경영하는 회사는 다르더군요. 경쟁보다는 공생을 선택하고 회사의 이윤을 직원들이나 사회와 나누는 것에 앞장서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경영방식은 사회주의 사상에 따른 것입니까? 중국에서 기업을 경영하기 위한 일시적인 방법입니까?”
강우가 눈을 빛냈다. 첫 질문부터 쉽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일단 제가 중국에서 경영하는 광복의 자금은 순수 중국 자본입니다.”
강우의 말이 터져 나오자 지오림과 학생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순수 중국 자본이라는 말도 말이었지만, 강우의 중국어가 너무 정확하고 깔끔했기 때문이었다. 강우가 최준과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강우의 말을 모두 들은 지오림과 학생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정말이지 영화가 따로 없는 가슴 벅찬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또한, 제가 경영을 하는 방식은 사회주의적인 것도 시장 경제적인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 내부에 돌아가는 시스템은 다른 회사들과 다를 게 없겠죠. 하지만 우리 회사가 가진 다른 가치가 차별점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모두의 시선이 강우의 입을 향했다.
“저는 제가 가진 부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좋으니까요.”
지오림이 탄성을 뱉어냈다. 강우의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그냥 어떤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정치적 사상도 제 행동에 기준점이 되지는 못합니다. 저는 제 신념대로 움직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저의 이런 행동에 의도가 있는지 없는지는 앞으로도 지켜보면 알겠죠?”
강우의 말에 지오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공격적인 질문에도 부드럽게 답해주는 강우를 보며 대인의 풍모를 느꼈다. 그리고 이 순간, 지오림의 마음에는 강우라는 존재와 광복이라는 기업이 강하게 각인됐다.
“가…. 감사합니다.”
지오림이 자리에 앉았다. 강우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한층 뜨거워졌다. 조금 느낄 수 있던 적대심도 더는 느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위이강과 위단향이 묘한 기분을 느꼈다. 편하게만 생각하던 강우의 모습이 아닌 한 기업의 총수로서의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와….”
“......”
위이강은 감탄했고, 위단향은 멍했다.
“이강아.”
강우가 위이강을 불렀다. 위이강이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는 다음으로 질문한 친구를 지목했다. 다음으로 지목된 사람 역시 강우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강우가 투자한 기업들이 모두 성공한 것에 큰 관심을 보였고, 투자 비결과 성공할 투자대상을 고르는 비법 등을 물었다.
“음….”
강우가 잠시 머뭇거렸다. 나에게는 미래 기억이 있고, 그 기억대로 투자만 하면 무조건 성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이윽고 강우가 입을 열었다.
“저는 투자하기 전에 그 기업의 아이템을 가장 먼저 분석합니다. 그리고 기업의 경영진을 만나 경영방식도 알아봅니다. 중요한 것은 투자할 때는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는 거겠죠.”
강우의 말에 질문을 건넨 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투자의 비법은 개인이 가진 안목과 직감 그리고 약간의 행운이라고 이해했다. 학생이 자리에 앉자 또 다음 질문이 쏟아졌다.
“중국에서 가장 젊은 부자라고 들었습니다. 재산이 얼마나 되시는 거죠?”
강우가 ‘글쎄요 안 세어봐서 모르겠습니다.’ 라며 재치 있게 답했다. 매장 안에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강우를 향해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강우는 학생 한 명 한 명의 질문에 성심껏 답해주었다. 강우의 그런 모습에 학생들이 탄성을 뱉으며 감동했다. 사실 중국의 현세대들은 이런 지적 욕구에 갈증을 느끼는 세대였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 중에는 고위 간부의 자제들도 있고, 앞으로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할 엘리트들도 있지.’
좋은 인상을 심어준다면 강우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강우는 학생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커다란 기업을 이루고 사업과 투자의 천재라 불리는 강우의 말에 학생들은 수업을 받는 학생과 같은 열의를 보여주었다.
“오늘 다들 제 이야기 들어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뜨거운 강의를 연상케 하는 시간이 지나갔다. 강우가 학생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2층을 가득 메운 학생들이 강우를 향해 손뼉을 쳐주었다.
“형! 오늘 진짜 대단했어요.”
“오빠!”
쌍둥이 남매가 강우를 보며 잔뜩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멋쩍게 웃으며 쌍둥이 남매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강우에게 말을 걸어왔다. 강우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했다. 그리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늘씬한 키에 이나은 못지않은 미모를 가진 여학생이 강우의 앞에 있었다.
“네, 잠깐이라면 시간이 괜찮습니다.”
“감사해요. 저는 북경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는 박희라예요.”
여학생이 강우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여학생의 소개에 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박희라? 조선족인가?’
강우가 손을 내밀어 여학생의 악수 요청에 응했다. 그리고 그 순간 강우의 머리가 지끈 아파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