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으세요?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 일남일녀가 산길을 걷고 있었다. 하얗게 내린 눈길은 일남일녀에게는 죽음의 길과도 같았다.
“괜찮으냐?”
날카롭게 생긴 남성이 더 어린 여자를 향해 물었다. 질문을 받은 여성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
“힘들면 쉬어갈까?”
아버지라 불린 남성의 질문에 여성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곳에서 쉰다면 체력을 보충하기 전에 얼어 죽을 판이 아니던가.
“아니요. 빨리 걸어요.”
“......”
앞장서나가는 딸을 보며 남성이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직도 끌려가던 아들의 절망적인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살아남아야 했다. 지금 앞서가는 하나 남은 딸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같이 가자꾸나.”
남성이 앞서가는 딸을 따라 길을 나섰다. 그렇게 아버지와 딸의 여정은 이어졌다. 강우는 마치 영화를 보듯 그 여정을 보았다. 계절이 지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남성은 점점 초췌해져 갔고, 딸은 병에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성과 딸이 일차 목적지에 도착했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아버지, 정말 괜찮을까요? 여기는 안전할까요?”
딸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남성과 딸은 탈북한 도피자의 신분이었다. 더군다나 남성은 북한의 고위 장교였었다. 남성이 북한을 탈출하고 추격대가 따라붙을 정도였다. 남성과 딸은 목숨을 건 도피 중이었다.
“이 정도 왔으면 이제 우릴 찾는 건 불가능할 게다. 중국은 넓고 넓으니까.”
“네….”
남성이 마을 입구에 세워진 커다란 간판을 바라보았다. 간판을 확인한 남성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박가보촌.
남성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병세가 확연한 딸의 얼굴에 일말의 희망감이 엿보였다.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곳이라면 당분간 몸을 숨기는데 적당하겠지.’
남성과 딸이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경계 섞인 시선이 쏟아졌다. 남성과 딸은 주춤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남성과 딸은 마을 안에 있는 작은 음식점에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남성의 입에서 조금은 서툰 중국어가 흘러나왔다. 가게 안에서 느긋하게 앉아있던 노인이 남성을 바라보았다.
“중국인이 아니군?”
“......”
남성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사실 도피 생활 중에 가장 문제가 된 것이 바로 자신과 딸의 중국어였다. 언어에 재능이 있는 유전자 덕분에 빨리 익히고는 있었지만, 중국어는 그리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저쪽으로 앉게. 지금 되는 메뉴는 한 가지뿐이니 조금 기다리게.”
“1인분으로 부탁드립니다.”
남성의 말에 주방으로 향하려던 노인이 멈춰 섰다. 그리고 남성과 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보통의 여행객이라고 하기에는 그 행색이 너무 남루했다.
“그냥 2인분으로 해주지. 돈은 1인분만 받겠네.”
노인이 주방으로 향했다. 남성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랜 도피 생활로 가지고 있는 돈은 이제 바닥을 치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지만, 앞으로 생활을 위해서는 돈을 아껴야 했다. 이윽고 주방으로 향했던 노인이 커다란 쟁반에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딸인가?”
노인이 남성의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 남성이 머뭇머뭇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딸입니다.”
“많이 아파 보이는군.”
노인의 말에 남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남성의 표정에 딸이 노인을 향해 말했다.
“잠깐 몸살 기운이 있는 거예요. 하루쯤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런데 음식점은 혼자 운영하세요?”
“음?”
남성의 딸이 싱긋 웃으며 살갑게 질문했다. 노인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입을 열었다.
“원래는 아내랑 운영하던 식당이지. 얼마 전 아내가 죽고는 이제 나 혼자 운영하지만 말이야.”
“힘드시겠어요.”
노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평생 해오던 일인데 힘들긴.”
노인이 음식들을 식탁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남성의 딸이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을 도와 상을 차렸다. 몇 번 거절하던 노인은 싹싹한 딸의 말과 행동에 금세 무장해제가 돼버렸다.
“잘 먹겠습니다.”
남성이 노인에게 감사를 표했다. 눈앞에 놓인 상차림은 분명 2인분 이상이었다. 아니 식탁 위를 가득 채운 반찬들은 그동안 받아보지 못한 호의가 느껴졌다.
“할아버지, 잘 먹을게요.”
남성의 딸이 노인을 보며 꾸벅 인사를 했다.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그래, 많이 먹거라.”
식사가 시작됐다. 남성과 딸은 정말이지 정신없게 식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노인이 물었다.
“그래, 어디서 오는 길인가?”
“.....”
남성이 선뜻 답하지 못했다. 같은 공산주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자신은 탈북자였다.
“그래, 나도 참 주책이군. 어디서 온 게 뭐가 중요하겠나. 그래 그럼 어디로 향할 생각인가?”
“당분간 이곳에 머물 생각입니다.”
남성의 말에 노인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사이 남성과 딸은 식사를 마쳤다.
“제가 치우는 거 도와드릴게요.”
딸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노인이 화들짝 놀라 남성의 딸을 말렸다.
“아니야 내가 할 게 가만히 있거라.”
“너무 맛있는 음식을 해주셨으니까 이건 제가 할래요.”
남성의 딸이 순식간에 식탁을 치우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노인을 향해 남성이 말했다.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주신 이 따듯한 밥상 잊지 않겠습니다.”
“허….”
노인이 탄성을 뱉어냈다. 그리고 다시 남성과 딸을 유심히 살폈다. 초췌하고 병색도 있었지만, 느껴지는 분위기는 보통이 아니었다. 분명 범상치 않은 출신을 가진 부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주방으로 들어간 딸이 정리를 마치고 나왔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앞으로 종종 밥을 먹으러 오겠습니다.”
남성이 품에서 돈을 꺼내 노인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노인이 돈을 받아야 하나 망설였다. 그러자 남성의 딸이 돈을 노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받아주세요. 그래야 저희가 또 오죠.”
“그…. 그래, 알겠다.”
노인이 돈을 받아 계산대에 넣었다. 남성과 딸이 노인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럼 자주 들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드르륵.
가게 문이 열리고 남성과 딸이 밖으로 나갔다. 잠시 텅 빈 가게를 둘러보던 노인이 결심한 듯 가게 밖으로 나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남성과 딸은 벌써 저만치나 걸어간 상태였다.
“이보게!!”
노인이 남성과 딸을 뒤따라가며 크게 소리쳤다. 남성과 딸이 뒤를 돌아보았다. 남성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딸의 얼굴에는 묘한 기대감이 떠올랐다.
“왜 그러십니까?”
남성이 노인을 향해 물었다. 늙은 몸에 달려온 것이 무리였는지 노인이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남성을 향해 말했다.
“혹시 머물 곳이 필요하다면 식당에서 지내는 게 어떻겠는가?”
노인의 말에 남성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잠깐의 만남이었다. 이런 호의를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온 도피 생활이 너무 각박했다.
“어르신….”
남성이 거절하려던 찰나.
“정말요? 정말 감사합니다. 대신 저랑 아버지가 식당일을 도울게요.”
남성의 딸이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노인이 남성의 딸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참 싹싹하고 정이 가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도 혼자 가게 운영하기 힘들던 차였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내 이름은 박명구라고 한다.”
노인의 소개에 남성이 입을 열었다.
“저는 박재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는 제 딸아이인 박지영입니다.”
남성의 말과 함께 강우의 머리가 다시 지끈 아파져 왔다.
“괜찮으세요?”
강우가 정신을 차리고 눈앞을 바라보았다. 박희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우의 슬픔이 담긴 눈빛에 박희라가 움찔했다.
‘분명 기억 속 남성은 박재립이라 했다.’
박재립.
그 이름을 강우가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바로 할아버지의 쌍둥이 형님의 이름이 아니던가. 그리고 기억 속 정황 역시 박재립이 할아버지의 형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둘째 할아버지는 북한을 탈출하신 걸까?’
궁금증이 마구 차올랐다. 하지만 당장 물을 수는 없었다. 눈앞의 박희라가 어떤 이유로 자신과의 대화를 청했는지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강우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렵군.’
막내 할아버지 때와는 너무나 다른 상황이었다. 강우는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강우가 생각을 마치고 손을 들어 이마를 훔쳤다. 강우의 손에 흥건히 땀이 묻어났다.
“오빠! 땀 좀 봐.”
위단향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강우의 땀을 닦아주었다. 강우가 심호흡했다. 그 어느 때보다 길고 긴 기억의 파편이었다. 온몸이 무겁고 힘이 없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가끔 이럴 때가 있습니다.”
“일단 앉으세요.”
박희라가 강우에게 자리를 권했다. 강우가 자리에 앉았다.
“이강아, 가서 먹을 것 좀 사 와라.”
“네? 먹을 거요?”
강우가 카드를 내밀었다. 위이강이 카드를 받아서는 일 층으로 향했다. 강우가 위이강을 향해 말했다.
“많이 사와 아주 많이.”
“네.”
강우가 박희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럴 때면 뭐를 좀 먹어야 힘이 나서요.”
“네? 아…. 네.”
박희라가 강우를 보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위이강이 햄버거를 잔뜩 사서 돌아왔다. 강우가 박희라를 향해 다시 한번 양해를 구했다.
“금세 다 먹습니다.”
“괜찮아요. 천천히 드세요.”
강우의 폭풍 같은 식사가 시작됐다. 박희라가 멍한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몇 번 경험한 쌍둥이 남매도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강우는 순식간에 햄버거를 다 먹어 치웠다.
“아…. 좀 살겠네.”
강우의 말에 박희라가 킥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위이강이 테이블을 정리하며 물었다.
“형, 부족한 건 아니죠?”
“조금?”
강우의 말에 위이강과 위단향이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픽 웃었다.
“있다가 집에 가서 더 먹어야지.”
“하하….”
위이강이 헛웃음을 흘렸다. 강우가 박희라를 바라보았다.
‘분명 악수하는 순간 기억이 떠올랐어. 그렇다는 건….’
눈앞의 박희라가 분명 둘째 할아버지와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마침 성도 같은 박 씨가 아니던가.
“성함이 박희라 씨면…. 혹시 조선족이신가요?”
“네, 맞아요.”
박희라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자신을 조선족이라 밝히는 박희라는 망설임이 없었다. 아니 얼굴에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도 엿보였다.
“저랑 성이 같은 박 씨시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렇네요. 저도 반가워요.”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강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희라의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올지 긴장되고 궁금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박희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의 회사에서 엔터 사업부를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거기에 들어가려면 어떤 절차가 필요하죠?”
“네?”
강우가 왠지 모르게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물었다.
“입사하시고 싶은 건가요?”
박희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유명한 연예인이 되고 싶어요.”
“연예인…. 말입니까?”
강우가 박희라를 바라보았다. 늘씬한 키에 이나은 못지않은 미모를 가진 박희라였다.
“네, 저는 유명해져서 꼭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누구인지 물어도 될까요?”
강우의 질문에 박희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답했다.
“그건 제가 유명해지면 알려드릴게요.”
강우가 아쉬움을 삼켰다. 하지만 일단 곁에 두고 지켜보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강우가 품에서 명함을 꺼냈다.
“이 명함을 가지고 회사로 찾아오세요.”
박희라가 환하게 웃으며 명함을 받았다. 그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