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0화 (330/402)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

모락모락.

뜨거운 김을 뿜어내는 채소볶음과 잘 익은 돼지족발. 보기만 해도 매콤해 보이는 따듯한 국물까지. 강우의 앞쪽으로 먹음직한 한 상이 차려졌다.

“우리 가게에 메뉴가 다양하지는 못합니다. 그날그날 재료가 있는 것 위주로 만들고 있죠.”

박종엽이 손에 묻은 물기를 조리복에 닦으며 말했다. 강우가 박종엽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정성이 가득 담긴 상차림에는 딸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드세요.”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양은 한참 모자라겠지만 말이다. 강우가 수저를 들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내 멈칫했다.

‘음….’

솔직히 맛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강우의 맞은편으로 박종엽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강우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호감이 가득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사실 내가 요리에는 크게 소질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요리를 참 잘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나마 오랫동안 장사하면서 실력이 늘어난 게 이 정도입니다.”

“아닙니다. 맛있습니다.”

강우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러자 박종엽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원래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했죠. 대학도 이공대를 갔고 졸업을 하고는 정비일을 배우고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고향에 내려와 장사하며 지내는 지금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좋은 여자도 만나 결혼도 했고, 예쁜 딸도 낳았고, 말이죠.”

박종엽의 딸 자랑이 이어졌다.

“우리 희라가 말입니다. 어려서부터 얼마나 예뻤는지 모릅니다. 마을 사람들이 늘 인형 같다며 얼마나 만져대는지 내가 그만 만지라고 화를 내야 멈출 정도였죠. 크면서는 얼마나 똑똑하고 착한지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죠. 또 공부도 얼마나 잘했는지 희라가 북경대를 갔다고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그리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박종엽의 폭풍 같은 딸 자랑이었다. 강우가 문득 조금 전 만났던 여자아이의 말을 떠올렸다. 마을 사람들이 외지인이 드물어 늘 심심하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강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결코, 듣기 싫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제가 아직 나이가 어립니다.”

강우가 말을 편하게 하라 했지만, 박종엽은 고개를 저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무조건 편하게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우리 딸의 회장님이시기도 하고 말입니다.”

나중에 딸과의 관계가 공식화되면 그때는 편하게 하겠다는 말은 삼키는 박종엽이었다.

“아닙니다. 회장이라고 하지만 아직 어린 청년일 뿐입니다. 편하게 대해주셔야 제가 편합니다.”

“음…. 그럼 편하게 대하도록 하지.”

박종엽이 강우를 보며 참 겸손하고 바른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중국은 겸손한 사람을 좋게 보는 성향이 강했다. 그런 이유로 강우에 대한 박종엽의 호감도는 더욱 수직으로 상승했다.

“그래, 자네는 우리 희라를 어떻게 생각하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박종엽이 던진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강우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그게 희라 씨와 저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저는 한국에 결혼할 여자가 있습니다.”

박종엽의 얼굴이 순간 부끄러움에 물들었다. 혼자서 착각해 큰 실례를 했다고 생각했다.

“이거 미안하네. 내가 이상한 오해를….”

“아닙니다. 제가 무작정 찾아왔으니 그러실 만했습니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박종엽이 강우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이 먼 시골 마을까지 왜 찾아왔단 말인가.

“그럼, 희라는….”

“아…. 그게 말입니다.”

강우가 박희라와의 첫 만남부터 회장실에 찾아오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종엽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연예인? 희라가 연예인이 되겠다고 했다고?”

박종엽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우가 아차 싶었다. 박희라가 그 정도 자세한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은 모양이다. 박희라가 명문 중의 명문 북경대를 다니고 있었으니 연예인을 한다는 말에 놀랄만했다.

“아…. 그게 희라 씨가 사람을 찾기 위해 유명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방법이 연예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박종엽의 표정이 조금씩 슬퍼졌다. 딸이 그 정도까지 외할아버지의 가족을 찾는 것에 집착하는 줄은 몰랐다.

“하…. 그런 일이 있었군.”

박종엽이 긴 숨을 뱉어냈다. 박희라의 심정을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박종엽이었다. 박종엽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과거의 상처가 문득 무언가에 쓸린 듯 쓰리고 아팠다. 강우가 그런 박종엽을 보며 말했다.

“저는 희라 씨의 가족을 찾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랴오닝성에 온 김에 이렇게 아버님을 찾아뵙게 된 겁니다.”

“으음….”

박종엽이 침음성을 흘렸다. 세월에 무디어져 지나간 아픔을 들춰내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다.

“......”

“......”

고독이 흐르던 가게 안에 박종엽의 슬픈 감정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강우는 박종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박종엽이 강우를 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일단 식사를 마저 하게. 내 그동안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강우가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박종엽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의 어딘가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박종엽이 낡은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다시 주섬거리더니 성냥을 챙겼다. 박종엽이 담뱃갑과 성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건강을 위해 금연하라는 박희라의 당부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드르륵.

가게 문을 열고 박종엽이 밖으로 나갔다. 자리에 앉은 강우는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맛도 느껴지지 않고 입이 말라 연식 국물만 후루룩 마셨다. 잠시 후, 가게 밖으로 나갔던 박종엽이 돌아왔다.

“콜록….”

오랜만에 피운 담배 때문일까 마른기침한 박종엽이 가게 문을 닫았다. 강우가 박종엽을 바라보았다. 담배 한 개비에 조금의 슬픔을 덜어냈을까. 박종엽의 얼굴은 좀 전보다 편해 보였다. 박종엽이 강우의 맞은편으로 다시 앉았다.

“희라는 제 어미를 참 좋아했지.”

박종엽의 첫마디는 목지영에 관한 이야기였다. 강우가 수저를 내려놓고 박종엽의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박종엽이 그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아내인 목지영은 시내에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네. 그때가 희라가 열 살 때쯤이었나….”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강우가 진심을 담아 박종엽을 위로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이야 세월이 지난들 잊히겠는가. 그저 가슴에 묻고 산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많이 힘들었지…. 나도 희라도…….”

박종엽이 숨을 가다듬었다.

“그래, 희라가 찾는 가족이 누구의 가족인지는 알고 있다고 했지?”

“네, 희라 씨 외할아버지의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박종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가 재빨리 질문을 보탰다.

“희라 씨의 어머니 가족도 제가 찾아드릴 수 있습니다.”

“......”

박종엽이 강우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무언가 말 못 할 사연이 있다고 강우는 직감했다.

“희라 씨는 외할아버지의 수첩에 담긴 이야기를 유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꼭 가족을 찾아 외할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희라 씨는 분명 어머니의 가족도 찾고 싶을 거로 생각합니다. 제가 찾아드리겠습니다.”

강우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박종엽이 감탄성을 뱉어냈다. 눈앞 젊은이의 말에는 사람에게 믿음을 가지게 하는 힘이 있었다.

“아닐세. 그럴 것 없어. 희라의 엄마는 고아였으니…. 아마 가족은 찾을 수 없을걸세. 그냥 내 장인의 가족을 찾아주기만 해도 충분하네.”

박종엽은 말을 아끼는 듯 보였다. 더 몰아붙일 수도 없는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첩의 내용은 저도 보았습니다. 수첩에 적힌 건 분명 한글이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희라 씨의 외할아버지께서 조선인이었다는 게 되겠죠. 맞습니까?”

“맞네. 우리처럼 조선인이셨지.”

박종엽의 말에는 조선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박가보촌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고 조선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이었다. 중국에서 한족으로 편입을 했을 때도 다시 청원을 넣어 조선족으로 변경했을 정도였다.

“그러면 박재립 어르신은 이곳 박가보촌 출신이셨던 겁니까?”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강우는 모른 척 물었다. 박종엽이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아닐세. 내 장인어른은 외지인일세.”

박종엽이 박재립이 마을에 들어온 사연을 말하기 시작했다. 역시 강우가 기억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강우가 박종엽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럼 박재립 어르신의 친딸인 박지영이라는 분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강우의 말에 박종엽의 얼굴이 크게 흔들렸다. 박종엽이 떨리는 손을 부여잡으며 입을 열었다.

“장인어른의 친딸분은 죽었네.”

박종엽의 말과 동시에 강우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 * *

음식점 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가득했다. 주방 쪽에서는 박명구와 박종엽이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가게의 한쪽에서 박재립이 쓰러진 박지영을 부축하고 있었다.

“지영아! 얘야 정신 차려라.”

박재립이 울 듯이 딸을 불렀다. 하지만 박지영은 미동도 없었다. 박지영의 옷에 잔뜩 묻은 피가 박지영에게 변고가 생겼음을 알려주었다.

“이보게. 일단 빨리 안으로….”

정신을 차린 박명구가 박재립에게 다가왔다. 박종엽도 정신을 차리고는 다가왔다. 그리고 박지영을 보며 눈물을 쏟았다.

“제가 못나서…. 제가….”

박종엽이 가게의 한쪽을 바라보았다. 가게는 풍비박산이 나 있었고, 한쪽에는 세 명의 남성이 피를 흘린 채 차가운 시체로 변해있었다. 조금 전 세 명의 남자에게서 박지영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박종엽이었다.

“어르신…. 일단 가게 문을….”

박재립의 말에 박명구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적지 않은 소란이 있었으니 분명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들었을 수도 있었다. 박명구가 가게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안이 보이지 않게 모든 창문을 가렸다.

“자네…. 어떻게….”

박명구가 박재립을 보며 조금 섬뜩함을 느꼈다. 가게로 들어선 박재립과 세 명의 남성은 마주치자마자 싸움을 벌였다. 아니 박재립이 망설임 없이 세 명의 남성을 때려죽였다고 봐야 했다. 그야말로 장사 같은 힘에 기계 같은 살인기술이었다. 중년이 넘은 박재립에게서 그런 힘이 나오리라 생각한 적이 없을 만큼 말이다.

“일단 정리를 끝내고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발….”

박재립이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박지영을 먼저 살펴야 할 때였다. 박명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엽아, 너는 빨리 가게를 정리해라. 나는 지영이를 치료할 의원을….”

“아닙니다. 간단한 치료는 제가 하겠습니다. 절대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됩니다.”

박재립이 의원을 부르려는 박명구를 말렸다. 이윽고 박재립이 박지영을 부축해 가게 뒤쪽으로 붙어있는 박명구의 집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큰 상처는 아닙니다. 다만 딸아이가 매우 놀란 모양입니다….”

박지영의 상태를 살핀 박재립이 안도의 숨을 뱉어냈다. 박명구도 다행이라는 듯 굳었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

박재립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자신과 딸의 앞날이 다시금 암울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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