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언제가 되건 밝혀지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와 딸아이는 탈북을 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가게에 찾아온 사람들은 아마 북한 인민군 소속 추격부대원들일 겁니다.”
“으음….”
박명구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멍한 침음성을 흘렸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탈출한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런데 추격대까지 붙을 정도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범상치 않은 사연을 가졌으리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더 심상치 않은 사연인 듯했다.
“죄송합니다. 이제 추격대를 죽였으니 당분간은 이곳을 찾아올 사람은 없을 겁니다. 딸아이가 회복하는 대로 마을을 떠나겠습니다.”
박재립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곳에서 지내며 한동안 참 행복하고 따듯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다시 정처 없이 떠돌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긴 어디를 간단 말인가. 여긴 엄연히 중국 땅일세. 북한 놈들이 아무리 간이 크다고 한들 더는 일을 벌이지 못할 테지. 그러지 말고 그냥 여기서 지내세.”
뜻밖의 말에 박재립이 고개를 들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가 들어 주름진 박명구의 얼굴에는 어느새 담담한 용기가 느껴졌다.
“어르신….”
“자네도 지영이도 이미 내 가족일세.”
박명구의 말에 박재립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박명구가 말을 이어갔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으이. 어차피 자네야 남자니까 위험에 대처할 수 있다고는 쳐도 지영이는 다르지 않겠는가?”
“.....”
박재립이 고개를 푹 숙였다. 길고 긴 도피 생활 끝에 이제야 안정을 찾았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일로 다시 정처 없이 떠돌아야 하나 싶었다. 자신과 딸을 받아주고 지금껏 친절하게 대해준 박명구 부자와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자네가 걱정하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매정한 사람들은 아닐세. 자네와 지영이는 이미 우리 마을의 가족이야.”
“어르신….”
박재립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가족을 잃고 공허했던 세월의 가슴 한쪽이 따듯하게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일단 저 나쁜 놈들의 시체를 수습하세. 그리고 지영이는….”
박명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지영도 죽은 거로 하는 게 어떤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박재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네야 어차피 또 저놈들의 추격을 받는다고 해도 걱정이 없을 것 같아. 하지만 지영이는 다르지 않은가? 오늘도 자네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종엽이가 아니었다면 더 큰 일이 났을 겁니다.”
세 명의 남성이 박지영을 끌고 가려 하자 박종엽이 나섰다. 일반인에 불과한 박종엽은 금세 제압당해 쓰러졌지만, 끝까지 매달렸다. 박재립이 도착할 때까지 박종엽이 시간을 끌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뻔한 것이다.
“그래, 그러니 지영이는 죽은 거로 하세. 그리고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는 거지. 그게 지영이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네.”
“그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박명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은 넓었고, 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많았다. 사람의 신분을 새로 만드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가능하네. 다만…. 자네가 괜찮겠는가?”
박지영이 새로운 신분을 얻는다면 박재립과는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박재립이 침음성을 흘렸다.
“딸아이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 * *
강우가 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박종엽을 바라보았다. 박종엽은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강우가 박종엽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거짓말을 하면 티가 확연히 나는 성격인 듯했다.
“장인 어르신의 친딸분은 어떻게 돌아가신 겁니까?”
“.....”
박종엽이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런 박종엽을 강우가 안심시키듯 말했다.
“저는 희라 씨를 돕기로 했습니다. 제게는 비밀이 없이 모든 걸 말해주셔야 합니다. 오늘 들은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기억을 통해 확신했지만, 강우는 마지막으로 박종엽의 입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늘 그랬듯이 신중하고 신중해야 할 일이었다. 박종엽이 잠시 망설이더니 결심을 내린 듯했다. 강우라면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사실…. 내 장인어른은 탈북자일세 친딸과 함께 북한을 탈출해 이곳까지 도망쳐 오셨지. 왜 이곳이 목적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아마 이곳이 박 씨들이 모여 살았고, 조선족 마을인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네.”
박종엽의 입에서 박재립과 박지영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을에 정착하고 살아간 이야기들이었다. 비밀로 간직하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자 정말 막힘없이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래 간직한 비밀은 간직한 사람에게는 커다란 짐이고 고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인어른을 찾아 북한에서 추격자들이 마을에 왔네.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를 않는군.”
박종엽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살아생전 사람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박종엽이 그날의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그날 아버지와 장인어른은 내 아내의 죽음을 위장하고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게 하기로 했네. 마을에서는 장례식도 치러졌고, 아내는 목지영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살아갔지.”
“그럼 두 분은 아예 남남처럼 사신 겁니까?”
강우의 말에 박종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은 그랬지. 장인어른은 마을에서 떨어진 시내로 나가 그곳에서 사셨고, 아내는 나와 결혼해 이곳에서 살았지.”
“그랬군요….”
강우가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 딸의 안전을 위해 인연을 끊고 홀로 지내셨어야 할 둘째 할아버지를 떠올리니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아버지와 떨어져 신분마저 숨긴 채 살아야 했던 박지영의 삶도 참 기구하다 생각했다.
“그 이야기는 희라 씨도 모르는 거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박종엽이 눈을 감으며 회한에 찬 숨을 뱉어냈다. 강우도 그런 박종엽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혹시 모를 위험 탓에 부녀간의 인연을 끊은 둘째 할아버지와 박지영이었다.
“그럼 장인어른께서 따님을 다시 양녀로 들인 이유는….”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나와 아내 사이에 희라가 생겼지. 그때 나는 생각했네. 더는 천륜을 어길 수는 없다고 하지만 이미 아내는 목지영이라는 신분으로 안전하게 살고 있었지. 그래서 장인어른의 양녀로 들이기로 한 것이었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양녀로 들이며 박지영의 안전도 챙기고 부녀로서의 연결고리도 되살린 것이었다. 그만큼 강우가 기억 속에서 보았던 날의 충격이 컸던 것이었다.
“그 이후로는 아무 일 없었던 겁니까? 더는 북한에서 장인어른을 찾지 않은 겁니까?”
“왜 없었겠는가. 그 이후로도 장인어른은 몇 번의 위기를 넘겼네.”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꼭 제거해야 할 만큼 둘째 할아버지의 위치가 높았던 모양이었다. 미래 기억 속에서도 북한은 탈출한 고위 공직자를 제거하려는 시도한 적이 많았으니까 말이다.
“그럼 제가 희라 씨 외할아버지의 가족을 찾아낸다면 결국, 사모님의 사연도 밝혀지게 되겠군요.”
“그래, 그래서 나는 희라가 가족을 찾는 것을 걱정했네. 생각해보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배신감이 크겠는가….”
박종엽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본의 아닌 거짓말이었고,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부모 된 마음으로 박희라가 어떤 충격도 받게 하기는 싫은 것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언제가 되건 밝혀지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지…. 이제 자네가 나선다면 그렇게 되겠지.”
박종엽이 희미하게 웃었다. 강우가 박종엽을 보며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것이 확실해졌고, 마지막 확인도 끝났다. 더는 진실을 말할 것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강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 친할아버지의 성함은 박재봉이십니다. 제 할아버지는 쌍둥이셨습니다. 위로 쌍둥이 형님이 계셨는데 그분의 성함은 박재립이었습니다.”
“자….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박종엽이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강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두 분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해방 직후 할아버지의 형님께서는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남한의 상황에 강한 불만을 품으셨습니다. 그렇게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할아버지의 형님께서는 북한군에 가담하셨습니다.”
“맙소사….”
박종엽이 탄식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북한으로 가신 둘째 할아버지의 소식은 지금까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남한에 남아있는 할아버지께서는 늘 둘째 할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소식을 알고 싶어 하셨습니다.”
박종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하니 벌렸다. 강우가 박종엽을 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정착한 두 분은 제 둘째 할아버지와 고모님이십니다.”
“말도 안 돼….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박종엽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운명의 끌림처럼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강우의 존재가 꿈인가 싶었다. 강우가 박종엽을 향해 다시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러니 희라 씨의 아버님은 제 고모부가 되십니다. 그리고 희라 씨는…. 희라는 제 사촌 동생이 되겠고요.”
“고…. 고모부….”
박종엽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대기업 총수가 찾아와 친척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잠깐만 기다려 주게.”
박종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방 쪽을 넘어 안쪽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혼자 남은 강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날의 사건이 벌어졌던 위치로 향했다.
‘으음….’
그날의 잔상이 번쩍이며 강우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강우가 크게 심호흡한 뒤 고개를 흔들었다. 잔상이 먼지처럼 흩어져버렸다. 이윽고 박종엽이 돌아왔다.
“이게 살아생전 찍은 내 장인어른의 사진일세.”
박종엽이 강우를 향해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그곳에는 둘째 할아버지와 박지영이 나란히 서있었다. 강우가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늘 품에 넣고 다니는 할아버지의 사진을 꺼냈다.
“이게 제 할아버지의 사진입니다.”
박종엽이 두 장의 사진을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는 침음성을 흘렸다.
“똑 닮으셨군….”
“쌍둥이이시니까요.”
박종엽이 품었던 일말의 의심마저 이 사진으로 날아가 버렸다. 박종엽이 강우를 바라보며 회한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박재립과 박지영이기에 만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강우가 박종엽을 보며 슬픈 눈빛을 지었다.
“두 분의 묘소를 찾아뵙고 싶습니다.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래, 당연히 인사를 드려야겠지. 잠시 기다리게.”
박종엽이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간단한 먹을 것을 챙기고 술병까지 챙겼다.
“내 아내가 장인어른의 묘소를 찾을 때면 꼭 이렇게 음식과 술을 준비하고는 했지. 나를 따라오게.”
“네, 고모부.”
고모부라 부르는 강우의 말에 박종엽이 멈칫했다. 새로 생긴 가족이라는 존재는 아직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 생각했다. 강우와 박종엽은 마을의 외곽으로 향했다. 마을을 조금 벗어나 낮은 산길을 따라 걸었다.
“강우야, 여기다.”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눈 박종엽은 어느새 강우를 편하게 부르고 있었다. 강우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양지바른 곳에 두 개의 봉분이 나란히 있었다. 강우가 봉분으로 다가갔다.
-고 박재립-
-고 목지영-
두 개의 묘비에는 둘째 할아버지와 고모님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박종엽이 가지고 온 음식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장인어른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가족이 찾아왔습니다. 보고 계십니까?”
음식을 준비하는 박종엽의 손길은 차분했다. 강우는 두 손을 모으고 묘 앞에 섰다. 박종엽이 준비해온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강우에게 내밀었다. 강우가 술을 받아 둘째 할아버지의 묘에 한 차례 돌린 후 뿌렸다.
“부인, 이 아이가 우리의 조카라고 하는군. 이렇게 대단하고 올바른 청년이 장인어른과 부인의 핏줄이라는군.”
강우가 술잔을 받아 고모님의 묘에도 뿌렸다. 강우가 두 분의 묘에 공손히 절을 올렸다.
“남은 가족들은 이제 제가 챙기겠습니다. 할아버지, 고모님 하늘에서 편히 쉬세요.”
강우의 말에 박종엽이 눈시울을 붉혔다. 한참이나 절을 하고 있던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박종엽을 보며 말했다.
“고모부, 저랑 같이 북경에 가셔야겠어요.”
“그래, 희라에게 가자.”
박종엽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