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괜찮아요.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자마자 중국으로 날아오셨다. 중국 비자는 갱신을 해놓았기 때문에 비행기만 타면 되는 일이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도 오셨다. 할아버지 혼자 중국을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치이익-
그 결과 집 안에는 맛있는 음식 향기로 가득했다. 어머니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상에 올라오는 음식의 퀄리티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음식을 준비했다. 옆에는 강우가 어머니의 조수를 자처했다.
“아들~ 거기 옆에 칼 좀.”
“네, 엄마.”
강우와 어머니는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강우가 재료를 손질하면 어머니가 곧 근사한 요리로 재탄생시켰다. 손발이 척척 맞는 강우와 어머니는 요리하며 정말 즐거워 보였다. 이렇게 작고 소소한 행복이야말로 강우가 추구하고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들, 엄마는 아직도 믿기지 않아.”
한참 요리를 하던 어머니가 강우를 향해 말했다. 강우가 재료를 칼질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희라를 처음 만났을 때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저도 처음 희라를 만났을 때 정말 놀랐어요. 왜인지 모르겠는데 너무 익숙한 느낌을 받았거든요.”
“오늘 보니까 정말 예쁘더라. 그리고 돌아가신 고모할머님들 많이 닮았어.”
외가 쪽 핏줄이라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했다. 박희라의 얼굴에는 돌아가신 고모할머님들의 얼굴이 많이 있었다.
“둘째 할아버지랑 고모는 어떻게 지낸 거야? 아빠한테 대충 이야기 듣기는 했는데 궁금해.”
강우는 어머니에게 둘째 할아버지와 고모인 박지영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강우의 이야기를 듣던 어머니가 눈시울을 붉혔다. 강우가 전해주는 이야기에는 진한 슬픔이 담겨있었다. 그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닌 기억으로 모든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랬구나…. 그렇게 힘들게….”
어머니가 앞치마를 들어 눈가를 훔쳤다. 강우가 어머니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래도 박가보촌 사람들이 잘 대해주어서 행복하게 사셨대요.”
“정말 고마운 분들이야.”
강우도 어머니와 같은 생각이었다. 둘째 할아버지 가족을 받아주고 보듬어준 박가보촌 사람들이었다. 단지 뿌리가 같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맞아요. 나중에는 고모님이 죽은 거로 위장하고 성만 바꾸고 살았는데 그 비밀도 다 지켜주었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대단해.”
박지영을 죽음으로 위장했다고는 하지만 어찌 외모까지 바꿀 수 있었겠는가. 한동안 숨어지내듯 가게에서만 지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박명구는 박지영을 아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사정을 이야기했다. 마을 사람들의 둘째 할아버지와 박지영의 사연에 안타까워하며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박지영은 목지영으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이번에 가보니까 정말 작은 마을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보답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요.”
“역시 우리 아들이야.”
어머니가 강우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받은 것이 있으면 항상 두 배 세 배로 돌려주는 강우가 참 장하고 예뻤다. 그리고 그런 능력과 여유가 있음에도 감사했다. 이윽고 요리가 완성되어갔다.
“이제 거의 다 돼간다고 말 좀 해줄래?”
어머니가 강우를 향해 말했다. 강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방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박종엽과 박희라가 앉아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어색함과 약간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맞은편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있었다.
“저기….”
말을 꺼내려던 강우도 흠칫하며 멈춰 섰다. 할아버지가 굳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계셨다. 할아버지의 손에는 강우도 보았던 바로 그 수첩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수첩을 모두 읽고 복받치는 감정을 애써 누르고 계시는 게 분명했다.
“형님은…. 형님은 편안히 눈을 감으셨는가?”
할아버지가 유창한 중국어로 박종엽에게 물었다. 박종엽이 머뭇거렸다. 강우는 그 이유를 알고있었다. 둘째 할아버지는 긴 도피 생활과 그날의 습격으로 입은 상처로 많이 힘들어하셨다. 그리고 상처가 악화하여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었다. 하지만 박종엽은 있는 그대로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네, 작은아버지.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하신 것 빼고는 편안히 돌아가셨습니다….”
박종엽의 말에 할아버지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박종엽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자신을 생각해 거짓말을 해주었다고 생각하고 넘겼다.
“그래…. 다행이군. 그리고 박가보촌 분들께도 정말 고맙고.”
“아닙니다. 장인어른과 아내는 박가보촌의 가족이었습니다.”
박종엽의 말에 할아버지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자네가 지영이와 결혼해서 잘 보살펴 주었다고 들었어. 정말 고마워.”
“아닙니다. 제가 한눈에 반해서 정말 많이 좋아했습니다.”
박종엽이 죽은 아내 목지영 아니 박지영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할아버지가 슬쩍 수첩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목지영이라….’
할아버지가 희미하게 웃었다. 둘째 할아버지도 죽은 누이들을 그리워하며 딸의 이름을 지영이라고 지은 것이었다. 둘째 할아버지도 죽은 가족을 평생 그리워한 것이었다.
‘형님…. 그렇게 그리워하실 가족을 왜 떠나신 겁니까.’
할아버지가 둘째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가슴 아파했다. 수첩의 마지막에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담은 둘째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고향에는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걸 할아버지도 잘 알았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서로를 그리워한 가족이 어디 나뿐이겠냐마는….’
할아버지는 둘째 할아버지가 북한군에 가담한 후 한동안 상심에 빠졌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할아버지는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 둘째 할아버지 소식을 수소문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둘째 할아버지의 소식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군.’
둘째 할아버지가 탈북했으니 이미 모든 기록이 지워진 것이었다. 특히 북한에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은 둘째 할아버지였다.
“으음….”
할아버지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밀려드는 회한이 차올랐지만, 언제까지 슬퍼할 수는 없었다. 세월은 흘렀고, 눈앞에는 둘째 할아버지의 핏줄이 있었다. 이제라도 모든 사실을 알았으니 이제 가슴에 묻기로 했다. 할아버지가 박희라를 바라보았다. 박희라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희라는 내 누이들을 참 닮았구나.”
“제가요?”
박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종엽이 박희라를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희라가 사실 저를 하나도 안 닮고 제 아내를 많이 닮았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박종엽의 말에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박종엽의 시도가 성공한 것이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아버지도 빠르게 한몫 거들었다.
“둘째아버지의 외모가 아버지를 닮아서 출중하셨지 않습니까. 당연한 거죠.”
“이놈아…. 내가 형님을 닮은 거지.”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작게 나무랐다. 하지만 표정은 이미 한층 밝아져 계셨다.
박희라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처음 만나는 가족들의 칭찬과 관심에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내 할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할아버지를 보니까 외할아버지가 떠올라요. 앞으로 저를 손녀처럼 생각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럼 그럼. 당연하지. 형님의 손녀니 내 손녀다.”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버지도 박희라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면 나는 이제 네 외삼촌이 되는 거겠구나. 앞으로 잘 부탁한다 희라야.”
“네, 외삼촌.”
박희라가 환하게 웃었다. 외할아버지의 염원도 풀고 새로이 가족까지 생겼으니 너무 좋았다. 강우 가족이 재벌이고 돈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지금 집 안에 퍼지는 따듯한 온기와 가족 간의 정이 정말 진하게 느껴졌다.
“저…. 식사를 하러 오시라는데요.”
한참이나 멀뚱히 서 있던 강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자자. 그럼 우리 맛있는 밥을 먹으러 가자꾸나. 우리 어멈 음식솜씨가 아주 끝내줘.”
할아버지를 필두로 모두가 주방으로 들어섰다. 식탁 위에는 어느새 근사한 한식 상차림이 펼쳐져 있었다. 처음 보는 한식에 박종엽도 박희라도 입을 벌린 채 감탄성을 뱉어냈다.
“우와…. 이걸 전부 혼자 만드신 겁니까?”
박종엽이 조금 서툰 한국어로 말했다. 박가보촌에 뿌리를 내린 조선인들은 대부분 한글을 사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박명구와 박종엽은 그중에서도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편에 속했다. 그리고 둘째 할아버지와 박지영의 영향으로 한국어를 더 사용하기도 한 탓이었다.
“네, 저 요리하는 거 엄청나게 좋아해요. 빨리 앉아서 드셔보세요. 식으면 맛없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박종엽이 어머니를 보며 정말 고맙다고 했다. 자신과 박희라를 위해 장을 보고 요리한 어머니의 정성에 감동했다. 이렇게 누군가가 해주는 밥상을 받아본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요리하시는 분이라.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어머니의 말에 박희라가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았다. 강우도 슬쩍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박종엽의 음식솜씨야 이미 겪어본 것이었다.
“하하…. 제가 음식점을 하기는 하지만 요리는 잘못 합니다.”
“맞아요.”
박희라가 빠르게 맞장구를 쳤다. 박종엽이 박희라를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박희라가 싱긋 웃으며 박종엽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빨리 드세요.”
“그래, 알겠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식사가 시작됐다. 어머니의 음식을 한 입 먹은 박종엽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와…. 이거 정말….”
박종엽에 이어 박희라도 감탄을 뱉어냈다. 어머니의 요리는 정말 맛있고 새로운 맛이었다.
“숙모님 정말 맛있어요.”
어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가족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하고 살뜰히 챙기는 것. 그것이 어머니가 생각하는 가족을 위한 방식이었다.
“맛있게들 드세요.”
어머니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버지가 슬쩍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이런 날에 술이 빠질 수는 없는데….”
“그럼요. 간단하게 한잔해요.”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아버지의 바람을 승낙했다. 아버지가 환하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제가 저번에 선물받은 좋은 술이 있습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아버지가 날 듯이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와 박희라가 씩 웃었다. 박종엽은 꿀꺽 침을 삼켰다. 혼자 가게를 운영하며 술을 멀리한 지가 벌써 몇 년째였다. 하지만 남자치고 술을 싫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군다나 오늘같이 좋은 날과 식탁 위의 진수성찬이 있는 날이었다.
“자자! 가지고 왔습니다.”
아버지가 주방에서 술잔을 꺼내다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여보도 한잔하지?”
“네, 좋아요.”
평소 술을 좋아하지는 않는 어머니였지만, 오늘만큼은 동참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잔을 전부 놓아주고는 술병을 뜯었다. 향긋하고 알싸한 술 냄새가 금세 주방에 차올랐다. 아버지가 가지고 온 술은 위진오가 선물한 정말 좋은 술이었다.
“제가 한 잔씩 따르겠습니다. 강우랑 희라도 한잔해.”
아버지의 말에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희라는 조금 부끄러운 듯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아버지가 박희라를 보며 물었다.
“희라는 술을 잘 못하는 건가?”
아버지의 말에 박종엽이 슬쩍 모른 척 밥을 먹었다. 박희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잘은 아니고 조금 마셔요….”
“그래, 그럼 외삼촌이 주는 술 한잔 받아야지.”
그렇게 잠시 후, 한 잔 두 잔 술을 받던 박종엽이 만취해버렸다. 아버지도 불콰한 얼굴로 술병을 들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박희라가 술잔을 내밀고 있었다.
“어어…. 희라야 그만….”
“저 괜찮아요.”
아버지의 만류에도 박희라는 싱긋 웃을 뿐이었다. 너무나도 멀쩡한 박희라의 모습에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술이 센 것도 내 형님을 똑 닮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