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가는 겁니까?
시간은 쌀쌀한 겨울바람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강우가 박가보촌을 다녀온 지 3주라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사이 할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박가보촌에서 3주라는 시간을 보내시고서였다. 할아버지는 둘째 할아버지의 묘를 매일같이 지켰다고 했다.
‘건강은 괜찮으실까….’
가족 모두가 할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수십 년 만에 만난 둘째 할아버지의 묘에서 하루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다고 하셨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또 언제 만날지 몰랐으니 말이다. 그런 할아버지를 박종엽은 하루하루 정성스럽게 모셨다고 했다. 박종엽도 오랜만에 장인어른이 살아온 듯 행복한 하루하루였다고 했다.
‘유해를 한국으로 모셔갈 방법을 찾아봤지만…. 불가능했지.’
둘째 할아버지는 이미 한국에서 완벽히 지워진 인물이었다. 할아버지는 둘째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후손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까 봐 할아버지가 손을 써둔 것이었다. 또한, 박종엽과 박희라에게도 둘째 할아버지는 소중한 가족이었다. 두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한국으로 유해를 가져가겠다는 것은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이야 가까우니까 자주 오시면 되겠지만.’
할아버지의 연세가 많으시다는 게 걱정이었다. 짧은 비행이라도 몸에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해드리고 싶은 강우였다.
‘전용기라도 한 대 사야 하나?’
지금의 강우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생각을 마친 강우가 인터폰을 눌렀다. 곧장 연결되고 곽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회장님.-
“곽 비서, 전용기가 한 대 필요합니다. 한번 알아봐 주세요.”
-네, 회장님. 지금 즉시 알아보겠습니다.-
“부탁해요.”
간단한 지시를 끝낸 강우가 인터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집도 없이 여관을 전전하던 게 불과 몇 년 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전용기를 마치 자동차 사듯 알아보라고 말하는 자신이었다.
‘이런 게 격세지감이라고 하는 건가….’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큰돈을 벌고 처음으로 부리는 큰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위한 것이었으니 전혀 아깝지는 않았다. 이윽고 강우가 전화기를 들어 어디로인가 연락을 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덜컥 통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강우 오빠?-
“어, 나야. 집 정리는 끝나가?”
오늘은 박종엽과 박희라가 새집으로 이사를 하는 날이었다. 박종엽은 박가보촌에 있는 음식점을 정리하고 북경으로 올라온 상태였다.
-네, 그런데 집이 너무 넓고 좋아요. 정말 이런 곳에 우리가 살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살아도 돼.”
강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박종엽과 박희라가 이사하는 곳은 북경 중심부에 있는 왕푸징 상업지구에 있는 전원주택 단지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좋은 매물을 강우가 구매한 것이었다. 강우도 중국 아파트를 처분하고 이곳으로 짐을 옮기기로 했다.
‘어차피 우리는 중국에는 자주 없으니까. 고모부랑 희라가 살고 우리가 중국에 오면 같이 지내는 게 효율적이지.’
강우가 생각을 멈추고 말했다.
“카드 준 거로 집에 필요한 거 이것저것 쇼핑해. 고모부 모시고 가서 필요한 거 다 사.”
-네, 오빠.-
이제는 박희라도 거절하는 것을 포기한 듯싶었다.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말 잘 듣네.”
-그럼 오늘 퇴근하고 이쪽으로 바로 오는 거죠?-
“그래, 저녁 같이 먹자.”
-네, 오빠. 제가 맛있는 거 해 놓을게요.-
“너는 요리 잘하지?”
강우의 질문에 박희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요. 저는 아빠랑 달라요.-
“그래, 기대할게. 아 그리고 오후부터 집에 들어갈 가전들이 도착하기 시작할 거야. 그때는 집 비우지 말고 잘 받아줘.”
-네! 걱정하지 마세요.-
박희라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만족스러워했다. 나이 차이가 적게 나지만 여동생이라는 존재가 강우에게는 참 신선했다.
-아 참 오빠, 그리고 집에 희수도 막 도착했어요.-
“그래? 잘됐네.”
강우가 박가보촌에서 만났던 여자아이가 바로 박희수였다. 강우가 박희수를 떠올리며 씩 웃었다. 박가보촌에서 도시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반짝이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희수가 오빠 보고 싶다고 난리예요.-
“그래, 최대한 일찍 퇴근해볼게.”
강우는 박가보촌에서 박희수에게 북경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리고 오늘 박희수가 북경으로 놀러 온 것이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파이팅!-
“그래, 있다 보자.”
강우와 박희라의 통화가 끝났다. 강우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머리를 긁적였다. 문득 한국에 있는 강용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한국에 돌아갈 타이밍이긴 한데.’
중국에서 진행 중인 사업들은 이제 전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먼저 대진 엔터가 개최한 오디션 프로그램은 첫 방송을 시작한 상태였다. 각 대도시에서 열린 오디션에 엄청난 지원자가 몰렸고, 그중에서 많은 인재를 뽑을 수 있었다. 방송의 재미 역시 충분히 뽑아냈다는 내부의 평가도 있었다.
‘이 방송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방송국도 개국할 거고.’
강우는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 방송국을 개국하기로 한 상태였다. 상하이를 본거지로 한 방송국의 이름은 대진방송이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이철금 회장이 강우에게 직접 연락해 고맙다고 할 정도였다. 그렇게 일이 급하게 돌아가자 이재원은 아예 상하이에 눌러앉은 상태였다.
‘재원이 형이 있으니까 대진 엔터 쪽은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어.’
그다음은 남재식이 전력을 쏟아붓고 있는 튀니지 2의 중국 서비스 오픈이었다. 기술적인 작업은 전부 끝났고, 이제 오픈베타 서비스부터 시작해 정식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현재 중국에서 사전광고를 진행 중이었는데, 역시 엘프로 분장한 이나은 덕분에 폭발적인 관심을 받고 있었다.
‘나은이의 인지도는 이제 뭐….’
딱히 중국에 대표작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 정도였다. 중국 연예계에서 이나은을 초대하기 위해 난리가 날 정도였다. 중국에 오기도 전에 이나은의 중국 진출 성공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아직 한국에서 드라마 촬영 일정이 남아있었기에 중국행은 시간을 내서 잠깐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튀니지 2가 서비스 전부터 큰 관심을 받는 상황이니 분명 대성공을 거두겠지.’
강우와 남재식이 개발한 튀니지 2의 성공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JG 소프트를 세계적인 게임개발사로 발돋움시킬 것이었다. 자금도 충분했고, 기술력과 개발력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는 강우의 머리에 차고 넘쳤다. 강우가 가진 것을 시간에 맞춰 차근차근 풀어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강우가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씩 웃었다.
‘SJ 그룹의 중국 시장 진출도 이제 시작이고.’
대도시 중심부에 오픈한 광복 그룹의 대형할인점은 현재 폭발적인 손님 수를 자랑했다. 그리고 매장 안에서 판매되는 한국산 제품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었다. 한국에서 공수해온 초기 물량들이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말이다. 폭발적인 판매량에 깜짝 놀란 SJ 그룹이 부랴부랴 2차 분량을 보냈을 정도였다.
‘이제 프랜차이즈 외식 사업부만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면 SJ 그룹의 중국 진출도 안정적이겠군.’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우와 광복 그룹의 직원들 그리고 많은 조력자가 힘을 합쳐낸 결과는 정말 대단했다. 이외에도 많은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다.
‘멀티플렉스도 하나씩 지어야 하고 상하이 스타디움도 지어야 하고 대형마트 전용관에….’
장기적인 프로젝트도 넘쳐났다. 광복 그룹의 역량은 그 모든 프로젝트를 감당하기에 충분했다. 지금부터는 시간에 모든 것을 맡기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강우의 편이 확실했다. 강우가 인터폰을 다시 들었다.
-네, 회장님!-
마침 부사장실에 있던 진남규가 바로 인터폰을 받았다.
“한국행 항공권 알아보세요. 여권도 준비하시고요.”
-드디어 가는 겁니까?-
진남규가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진남규는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행을 하기로 한 상태였다. 한국에 들러 독립유공자 유족 인정 절차도 마무리해야 했고, 관광도 할 예정이었다. 광복 그룹을 위해 치열하게 일을 해온 진남규를 위한 강우의 작은 선물이었다.
“네, 드디어 갑니다.”
-준비하겠습니다. 엄마도 정말 좋아하실 겁니다.-
강우와 진남규가 수화기 너머로 마주 웃었다. 통화를 마친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회장실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북경의 빌딩 숲이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웠다.
* * *
스르륵.
고급 세단이 왕푸징 상업지구의 전원주택 단지에 들어섰다. 고급 세단이 멈춰서고 강우가 내렸다. 운전기사가 내려서 강우를 배웅했다.
“들어가세요.”
강우의 말에 운전기사가 꾸벅 인사를 했다. 강우가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한국의 고급 주택 단지와는 다른 느낌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강우가 다시 전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작은 정원이 달린 고급 주택이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을 보니 아직 정리가 한창인듯했다.
스르륵.
강우가 정원으로 들어서자 고급 세단이 멀어져갔다. 강우가 정원에 서서 주변을 한참이나 둘러보았다. 둘째 할아버지와 박지영도 지금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했을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남은 가족인 박종엽과 박희라만이라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현관문에 도착한 강우가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종소리가 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문 너머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세요?”
박희라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큰 집으로 이사할 때의 설레는 기분을 강우도 잘 알고 있었다.
“어, 나야.”
“오빠!”
박희라가 벌컥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강우가 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은 물론이고 온몸에 먼지 자국이 가득한 박희라의 모습 때문이었다.
“얼굴은 왜 그런 거야?”
“아….”
박희라가 당황하며 얼굴을 만졌다. 그러자 먼지가 더 묻어났다. 박희라가 울상을 지었다.
“그게 집 창문이 열려있었는지 안에 먼지가 엄청 많았어요. 자…. 잠시만요. 씻고 나올게요.”
박희라가 화장실로 후다닥 달려갔다. 강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현재 북경 시내의 가장 큰 전력 공급원은 바로 석탄을 연료로 하는 화력발전소였다. 매해 겨울이 되면 난방 수요가 늘어나며 북경 시내는 뿌연 연기로 뒤덮이고는 했다. 강우가 미래의 기억을 떠올렸다.
‘미세먼지라…. 해결할 방법을 찾아봐야겠군.’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위진오가 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강우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막 이사를 끝낸 집 안은 아직 정리가 덜 끝나 있었다. 오후쯤에 도착했다던 가전제품도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상태였고, 가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 아들 왔어?”
집 거실에는 아버지와 박종엽이 축 늘어져 있었다. 종일 이사를 하느라 진을 뺀 모양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강우를 발견하고는 구세주를 만난 표정이었다.
“네, 고생들 하셨어요. 이제부터는 저한테 맡기고 좀 쉬세요.”
강우가 양복 상의를 벗고는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박종엽이 강우를 보며 두 손을 저었다.
“강우야, 이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으니까 사람을….”
말을 하던 박종엽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냉장고를 번쩍 들어서는 주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결코, 작은 크기가 아닌 냉장고였다. 성인 남성 혼자 들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냥 쉬고 계세요.”
강우가 씩 웃으며 멀어져 갔다. 박종엽이 옆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형님, 혹시 강우는 항우의 환생이 아닐까요?”
“뭐? 하하!”
아버지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보는 강우의 괴력에 놀랄만하다고 느꼈다. 박종엽이 강우를 보며 연신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