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집이 최고지.
덜컥.
한국 한남동에 있는 저택 대문이 열리고 강우가 모습을 나타냈다. 마당에서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강용이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형아!”
그와 동시에 장군이와 루피가 ‘멍멍!’ 짖으며 강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대형견 두 마리의 기습 공격에 강우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내 꼬리를 흔들며 몸을 마구 비벼대는 장군이와 루피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강우가 그렇게 반가운 모양이다.
“뭐야! 내가 먼저인데!”
강용이가 장군이와 루피를 밀쳐내며 강우에게 바짝 붙었다. 강우가 씩 웃으며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 있었나?”
“응, 형아!”
강용이가 씩씩하게 답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대문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빠는?”
“어, 아버지는 다음 주에 오실 거야.”
아버지는 북경에 남아 일을 마무리하고 들어오시기로 했다. 한국에 같이 들어온 진남규와 진남규의 어머니는 서울 시내의 호텔에 묵기로 했다. 강우가 가장 좋은 곳으로 호텔을 잡아주고 오는 길이었다.
“아빠 보고 싶은데….”
강용이가 살짝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강우의 양손을 확인했다.
“선물! 선물은?”
“어?”
강우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강우가 당황하자 강용이가 씩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형아가 집에 온 게 선물이지!”
“하하…. 녀석.”
강우가 손을 뻗자 강용이가 후다닥 집으로 도망쳤다. 강우는 마당에서 장군이와 루피를 조금 더 만져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강우의 손길에 장군이도 루피도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이윽고 강우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강우야, 잘 다녀왔니?”
거실에서 막내 할아버지가 강우를 반겨주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잘 지내셨어요?”
“그럼, 나야 잘 지내고 있었지. 그리고 형님께 소식 들었다. 정말 장하구나.”
막내 할아버지가 둘째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할아버지도 중국에 한번 가셔야죠.”
“당연하지. 다음에 형님 가실 때 같이 가기로 했다.”
막내 할아버지가 둘째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어릴 적 기억에 있는 둘째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에는 더 편하게 가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준비해 놓을게요.”
“그래? 고맙구나.”
막내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가족들의 불편한 점을 하나하나 신경 써주는 강우가 참 대견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할아버지가 나오셨다. 중국에서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수척한 모습이었다. 3주 동안 둘째 할아버지의 묘소를 지키며 마음고생 몸 고생을 하신 탓이었다.
“할아버지, 어디 편찮으세요?”
강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할아버지가 강우를 보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다. 조금 쉬면 돼.”
“혹시 모르니까 저랑 병원 한번 가세요.”
강우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할아버지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강우에게 다가와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맙구나. 내 손자.”
할아버지의 손길에는 강우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할아버지의 손길에 강우도 푸근한 기분을 느꼈다.
“할아버지, 오래오래 사세요.”
“허허…. 그래그래.”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막내 할아버지도 흐뭇한 표정으로 강우와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우당탕.
이 층에서 강용이가 급하게 뛰어 내려왔다. 강용이의 품에는 드라마 대본이 가득 들려있었다.
“형아, 이것 좀 봐.”
강용이가 강우에게 드라마 대본을 쓱 내밀었다. 잔뜩 상기된 강용이의 표정에 강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가 중국에 있는 동안 촬영된 대본들을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강우가 드라마 대본을 받았다.
“이야~ 우리 동생이 아주 대단한 작가님이 되어가네?”
강우가 드라마 대본 겉표지에 적힌 강용이의 이름을 보며 감탄했다. 주방에서 어머니가 부드럽게 웃으며 나왔다.
“아들 왔어?”
“다녀왔습니다.”
어머니가 강용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강용아, 형아 일단 좀 씻고 짐도 풀고 그러고 같이 보자고 해. 알겠지?”
“응, 엄마.”
어머니가 강우보고 어서 올라가 씻고 짐을 풀라고 했다. 강우가 계단을 올라가 2층으로 향했다. 강용이는 강우를 졸졸 따라 올라왔다.
덜컥.
강우가 방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오는 방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매일매일 청소를 해준 것이었다. 강우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으아….”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며 온몸이 노곤해짐을 느꼈다. 강우가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집이 최고지.”
중국에도 집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 있는 집만큼 편안한 느낌은 아닌 것이 사실이었다. 강우가 잠시 익숙한 방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길었던 출장이 정말로 끝났구나 싶었다.
“형아?”
뒤를 이어 강용이가 방으로 들어왔다. 강용이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있었다.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온 강우를 위해 간단한 간식을 만들어 주신 모양이다. 강우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강우가 좋아하는 오렌지주스에 노릇하게 구워진 토스트가 있었다.
“씻고 올게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응. 빨리 와.”
강우가 씩 웃으며 욕실로 향했다. 이윽고 샤워를 마친 강우가 말끔해진 얼굴로 돌아왔다. 강용이는 책상에 앉아있었다. 책상 위로는 대본을 늘어놓은 상태였다. 강우가 픽하고 웃으며 강용이 옆에 앉았다.
“어디 보자. 우리 동생 실력이 얼마나 늘었나 볼까?”
“빨리!”
강용이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대본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야~ 이거 강용이가 혼자 다 한 거야?”
“응, 선생님이 이제 혼자 해도 된다고 했어.”
강우가 감탄하며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역시 재능을 타고난 강용이었다. 강 작가가 가르쳐주는 것을 금세 흡수해 버린 것이었다.
“이 대본 분량까지 전부 촬영한 거야?”
“응, 이번 달 중순부터 드라마 방영 시작한다고 했어.”
강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지금 시기의 드라마들은 촬영을 시작하고 방영까지의 시간이 극악에 가까웠다. 흔히 말하는 쪽대본이 난무했고, 그 덕분에 촬영장은 항상 고된 일정을 견뎌내야 했다. 하지만 강우와 대진 엔터는 달랐다. 촬영 일정을 최대한 넉넉히 잡았고, 방영하기로 한 방송사와도 협의를 끝냈다.
‘처음에는 방송국도 난색을 보였지만, 사전 촬영분을 본 후에 급해진 건 방송사였지.’
드라마의 엄청난 퀄리티와 재미에 시큰둥하던 방송사의 태도가 돌변했다. 다른 공중파에서 대진 엔터에 접촉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대진 엔터는 을이 아닌 갑의 처지에서 수월하게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강우는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방송계의 잘못된 악습도 바꾸어 나갈 생각이었다. 강우가 생각을 멈추고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그럼 내일 형이랑 촬영 현장에 같이 갈까?”
“진짜? 나야 좋지.”
강용이가 잔뜩 신난 표정을 지었다. 강용이는 드라마 촬영장에 나가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리고 촬영 현장의 사람들도 강용이가 오는 것을 좋아했다. 언제나 밝고 귀여운 강용이의 에너지가 촬영장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탓이었다.
“어디 계속 봐 볼까?”
강우와 강용이는 나란히 앉아서 대본을 읽어내려갔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붙어있었다. 이윽고 방문이 슬쩍 열리며 어머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나란히 앉아있는 강우와 강용이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형제간에 우애가 저리 깊으니 부모로서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들들~ 점심 먹을 시간이야.”
하지만 밥은 먹어야 했다. 어머니의 말에 강우와 강용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동시에 답했다.
“네, 엄마.”
“응, 엄마.”
어머니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 * *
그날 저녁 강우가 정원으로 나왔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와 강우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강우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후아….”
역시 한국의 공기는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우가 손에 들린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듯한 커피가 담겨있는 머그잔의 온기가 손을 타고 몸으로 퍼져나갔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정원 한쪽에 스윙 벤치가 놓여있었다. 강우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 좋네.’
강우가 중국에 가 있는 사이 정원은 더욱더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박선영과 박지영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있었다. 강우가 발로 땅을 밀어 의자를 앞뒤로 흔들었다. 따듯한 차 한 잔과 고즈넉한 정원의 분위기에 심신이 편안해졌다.
“멍멍!”
어느새 장군이와 루피도 강우의 양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강우는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하늘에 붉은 노을이 졌다.
‘이제 할아버지의 형제분들은 다 찾았고. 이제 남은 건….’
강우가 눈을 빛냈다. 이제는 돈도 많이 벌었고, 그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을 만큼의 힘도 길렀다.
그렇게 강우가 한가로움을 느끼던 때였다.
덜컹.
저택의 대문이 열리고 박선영과 박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강우 왔을까?”
“오늘 온다고 했으니까 왔겠지.”
“아~ 선물 사 왔으려나?”
“야! 무슨 또 선물을 바라.”
티격태격대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강우가 씩 웃었다. 이윽고 계단을 올라 정원에 들어온 두 사람이 강우를 발견했다.
“강우야!”
“야!”
두 사람이 강우를 향해 후다닥 달려왔다. 강우가 의자에 앉은 채로 손을 흔들었다.
“누나, 잘 지냈죠? 지영아, 미안한데 선물은 없다.”
강우의 말에 박선영이 킥하고 웃었다. 박지영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크리스마스도 중국에 있느라 그냥 지나갔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애냐? 크리스마스 선물은 무슨.”
강우와 박지영이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박선영이 그런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동갑내기 사촌 남매는 만날 때마다 이러기 일쑤였다. 평소 어른스럽기 그지없는 강우의 새로운 모습이기도 했다.
“밥은 먹었냐?”
박지영이 슬쩍 물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 먹었지.”
“우리 늦었지만 크리스마스 파티하는 건 어때? 이제 곧 새해이기도 하고.”
박지영의 말에 박선영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박지영! 할아버지 힘드신 거 알면서.”
“언니, 이럴 때일수록 더 즐겁게 지내야 하는 거라고. 사람이 슬프다고 우울해만 있으면 병나요. 병.”
박지영의 말은 그럴듯했다. 사실 둘째 할아버지의 일이 알려지고 집안 분위기가 조금 다운돼 있기는 해 보였다. 이럴 때 분위기 전환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그럼 오늘 밤에 간단하게 파티라도 하지 뭐.”
“아싸! 그럼 준비한다?”
박지영이 강우에게 손을 ‘척’ 하고 내밀었다. 강우가 픽하고 웃으며 품에서 카드를 꺼내 박지영에게 쥐여주었다. 박지영이 싱긋 웃었다.
“우리 집안의 장손이자 물주이신 박강우 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하…. 이럴 때만.”
강우가 실소를 흘렸다. 목적을 달성한 박지영이 박선영을 향해 자랑스럽게 카드를 쓱 내밀었다. 박선영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언니, 그럼 우리가 나설 차례인 거 같은데?”
“그래, 그럼 빨리 갔다 오자.”
박선영과 박지영이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강우가 씩 웃었다. 사실 박지영도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참 깊었다. 우울한 할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강우도 그런 박지영의 마음을 잘 알았다.
‘치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도 가족의 힘이라면 못 보듬을 게 없지. 다들 아무렇지 않은척하지만 분명 둘째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을 거야.’
박지영의 말대로 슬픔을 가만히 둔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 덩치를 키워가기 마련이었다. 파티라도 해서 그 기분을 풀 수 있다면 강우는 백 번이라도 더 할 수 있었다.
‘그럼 나도 슬슬 준비해볼까?’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 창고로 향했다. 창고에는 정원에 설치할 수 있는 천막부터 난방기구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강우는 하나씩 하나씩 파티 장소를 만들 물품을 정원으로 옮겼다.
촤라락.
먼저 추위를 막아줄 천막을 정원에 설치했다. 천막 안으로는 추위를 몰아내 줄 난방기구도 가져다 놓았다. 정원이 부산스러워지자 집에서 강용이가 뛰쳐나왔다.
“형아! 뭐 해?”
“어, 오늘 파티한다.”
강우의 말에 강용이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빠르게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엄마! 할아버지! 파티한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