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게 행복이라니까?
쏴아아- 쏴아아-
겨울 바다의 거친 파도가 바닷가를 덮쳤다. 쓸려나가는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며 진한 여운을 남겼다. 강우는 진남규 모자와 진기주의 해후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어째서 이 작은 나라에는 이렇게나 많은 상처와 아픔이 남아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가 힘이 없어서겠지.’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과 국민은 그렇게 힘든 세월을 이겨내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이제는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그런 자랑스러운 나라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남은 상처를 치유해줄 사람은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점점 각박하게 변해가고 사람들은 타인의 상처에 무디어진다. 그리고 남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 상처를 주는 그런 사회로 변해가지.’
무엇이 문제였을까? 강우는 어렴풋이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돈…. 바로 그놈의 돈이 문제지.’
빈익빈 부익부.
시장경제는 점점 빈부의 격차를 벌려갔다. 사람들은 평생 일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빈부의 격차에 허탈해했고, 분노했다. 그 분노는 누군가에 대한 증오와 불편함으로 변해 사람과 사람 관계를 잠식해 나갔다.
‘한 명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은 아니야. 하지만 누군가 나선다면 그게 작은 씨앗이 될 수도 있겠지.’
지금, 이 순간. 강우의 마음속에 더 커다란 꿈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가족을 행복하게 하고 또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을 행복하게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유공자들과 가족들 그리고 사회 취약계층에게까지 손길을 넓히고 있는 강우였다.
‘내가 더 큰 사람이 된다. 돈도 더 벌겠어.’
그렇게 얻은 지위와 재력으로 강우는 선대부터 지금까지 사랑하는 조국을 바꾸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직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자신이 있었다.
‘돈? 그까짓 것 내가 다 쓸어 담아 주지. 그리고 나서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에게 베푸는 삶을 살겠어.’
강우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을 했다. 할아버지 역시 강우의 생각을 안다면 반드시 칭찬해주리라 생각했다. 수많은 애국지사분이 희생한 것은 개인의 명예와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내 주변의 사람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강우가 깊은 생각에 빠져있을 때였다. 강우의 뒤편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강우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진남규가 서있었다.
“회장님.”
진남규가 갈라진 목소리로 강우를 불렀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남규 형, 이제 조금 괜찮아요?”
“네, 덕분에요.”
진남규가 강우의 옆으로 나란히 섰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긴 숨을 뱉어냈다.
“사실 한국은 나랑은 아무런 인연이 없는 곳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만 아니었다면 애초에 유가족 등록을 위해 한국에 오지도 않았을 거고요.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일도 생각하지 않았겠죠.”
강우는 묵묵히 진남규의 말을 들어주었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조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기주 누나의 존재를 알고 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평생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인데 가족이라는 그 단어가 제 마음을 여기까지 이끌었습니다. 전부 회장님을 만나고 닮아가는 제가 변한 거겠죠.”
“가족은 끊어내려야 끊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게 어떤 사연이 있다고 해도 말이죠. 가족은 그런 거더라고요.”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진남규가 그런 강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 가족의 이야기를 아는 만큼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회장님, 이제 어찌해야 좋은 선택일까요?”
“선택은 남규 형,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겁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죠.”
강우의 말에 진남규가 침음성을 흘렸다. 처음 만난 진기주의 존재가 이렇게 가슴에 자리를 잡을 줄 정말 몰랐었다. 진남규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낡은 집에는 한국에서 살던 또 다른 가족들의 애환이 진하게 묻어있었다. 그리고 홀로 남아 힘들게 살아온 진기주의 슬픔도 묻어있었다.
“.......”
진남규가 고민에 빠졌다. 강우는 그런 진남규를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이윽고 진남규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회장님, 저랑 어머니가 한국에 살아도 되는 걸까요?”
강우가 씩 웃었다.
“당연하죠. 이 땅은 언제나 여러분에게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회사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한 사람이 없다고 흔들릴만한 회사도 아니고요. 한국에서 중국은 엄청 가깝거든요.”
말을 마친 강우가 또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조만간 법인 소유로 전용기도 하나 생길 예정입니다. 왔다 갔다 하는 데 불편함 없을 거예요.”
“전용기 말입니까?”
진남규가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강우의 스케일은 항상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강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 근처에도 호텔을 하나 지을 생각이에요. 아주 크고 멋지게 말이죠.”
진남규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전에 우리 기주 누님의 집부터 어떻게 좀 해야겠어요.”
“아…. 그건 제가….”
강우가 진남규의 말을 막았다.
“새집은 제가 주는 선물입니다. 남규 형 가족의 새 출발을 위해서요. 거절은 거절하겠습니다.”
진남규가 픽하고 웃었다. 강우가 이럴 때면 그냥 받아들이는 게 맞음을 잘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안으로 가요. 일단 오늘 저녁은 제주도에서 제일 맛있는 거로 먹죠. 온종일 운전했더니 배가 고프네요.”
“밥은 제가 사겠습니다.”
“당연하죠. 설마 밥까지 사라고 할 생각이었어요?”
강우가 씩 웃으며 진남규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그리고 진기주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강우의 뒷모습을 보던 진남규가 뒤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진남규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 * *
한남동 저택의 거실에 온 가족이 모여있었다. 두 분 할아버지를 필두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 앞쪽으로는 강우와 강용이 그리고 박선영과 박지영이 있었다. 커다란 텔레비전 앞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한다!”
강용이가 화들짝 놀라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텔레비전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드라마 제목이 큼지막하게 떠올랐다. 오늘은 강용이가 쓴 드라마인 ‘가족애’의 첫 방영이 있는 날이었다.
“와…. 노래 좋네요.”
박선영이 감탄을 하며 말했다. 강우는 드라마를 만들며 특히 OST에도 신경을 썼다. 미래의 기억으로 OST가 가지는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우는 유명 가수와 작곡가를 섭외해 OST를 완성했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편수에 따라 차례대로 공개할 예정이었다. 또한, 강우는 대진 엔터를 통해 새로운 음원사이트를 런칭한 상태였다.
“방송 끝나고 나면 인디에도 올라갈 거에요.”
말을 마친 강우가 화면에 집중했다. 광고 시간이 지나가고 드라마가 시작됐다. 가족 모두가 숨을 죽이고 드라마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강우가 힐끗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잔뜩 긴장한 표정의 강용이는 텔레비전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식….’
강우가 씩 웃으며 다시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였지만, 강우 역시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드라마의 첫 화는 장미여관이 주 무대였다. 강우 가족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의 이야기였다. 드라마가 계속되자 가족들의 긴장이 조금씩 풀어졌다. 다들 준비된 과일과 간식을 먹으며 드라마를 즐겼다.
“와~ 강용아, 정말 대박이다.”
드라마가 끝나고 박지영이 강용이를 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드라마가 이어지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을지 모를 정도로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듣기만 했던 강우와 작은아버지의 이야기에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었다.
“정말? 재미있어?”
강용이가 눈을 빛내며 박지영에게 물었다. 박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들어주었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도 강용이를 보며 정말 재밌었다고 말해주었다. 박선영은 강용이를 꼭 껴안아 주었다. 어린 강용이가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을 이해하고 가슴이 아팠나 보다.
“우리 막내 정말 잘했어.”
어머니도 강용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버지는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날의 무기력함이 그리고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다시금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눈을 떴다.
“우리 아들들이 이렇게 잘 컸으니 아빠는 더는 바랄 게 없네.”
아버지가 강우와 강용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강우와 강용이가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향해 강우가 말했다.
“전부 아버지가 저희의 울타리가 되어 주신 덕분이에요.”
“아들….”
아버지가 눈시울을 붉혔다. 장성한 아들은 늘 이렇게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는데 가장 든든한 파트너였다. 아버지가 이번에는 막내 강용이를 바라보았다. 항상 어리고 귀여운 막내는 이제 작가라는 어엿한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막내가 이렇게 빨리 커버릴 줄 몰랐는데 말이야.”
“그래도 저는 항상 막내예요.”
강용이가 아버지를 향해 애교를 부렸다. 아버지는 또 좋아서 웃음을 터트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강우는 그 모습이 참 좋았다.
“자자! 이제 밤이 늦었구나. 어서들 자야지.”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막내 할아버지가 할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형님, 애들 얼굴을 보니까 오늘은 그냥 잘 거 같지 않은데요? 형님이랑 저랑 먼저 자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허허…. 그런가?”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방으로 들어가셨다. 막내 할아버지가 가족들을 보며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가족들이 일제히 일어나 두 분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이윽고 두 분 할아버지가 들어가시자 가족들이 다시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이럴 때는 야식이 빠질 수 없지.”
박지영이 먼저 말을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선영도 돕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리라면 빠질 수 없는 어머니와 큰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두 사람을 말렸다.
“오늘은 애들이 해주는 거 먹자고.”
강용이는 강우에게 다가와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는 강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형아. 고마워.”
“응? 뭐가?”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강용이가 씩 웃었다.
“형아가 내 형아인 게 고맙고. 우리 가족을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어줘서 고맙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지지해줘서 고마워.”
강용이의 말에 강우가 울컥하는 감정을 참으며 말했다.
“그래, 나도 고마워.”
“헤헤….”
도통 보기 힘든 강우의 약한 모습에 강용이가 혀를 삐죽 내밀었다. 이윽고 박선영과 박지영이 준비한 야식이 완성되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만든 것은 떡볶이였다.
“자자! 박지영표 떡볶이 대령이요.”
“야! 나도 거들었거든?”
“냄비에 물 담은 정도가 도운 거라면 나도 할 말 없지.”
“야! 박지영!”
박선영과 박지영이 티격태격하자 가족들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강우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첫 화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나머지 가족이 모인 즐거운 야식타임이 이어졌다. 강우는 가족들의 한가운데에서 정말 행복함을 느꼈다.
‘그래, 이게 행복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