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6화 (346/402)

잘살고 싶었어.

다음 날. 강우는 학교에 가서 강의를 모두 듣고 동양 무역에 출근했다.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가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동양 무역은 중국 사업 건으로 하루하루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 면접으로 뽑은 과장급 라인들의 능력이 엄청났다. 밀려드는 업무는 빠르게 처리되었다.

똑똑.

강우는 곧장 아버지가 있는 사장실로 향했다. 이나은과의 결혼 결심을 아버지에게 말하기 위해서였다. 어젯밤은 너무 늦게 돌아왔고, 오늘 아침에는 강우가 학교에 가느라 따로 떨어져 갔었다.

“누구세요?”

“아버지, 저예요.”

강우가 문을 열고 사장실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잔뜩 쌓여있는 서류를 처리하고 계셨다.

“학교 잘 갔다 왔어?”

아버지가 서류를 바라본 채로 물었다.

“네, 차 한잔 타드릴까요?”

“어, 좋지. 녹차로.”

강우가 사장실 한쪽에 있는 커피포트로 다가갔다. 커피포트의 버튼을 탈칵하고 올리고는 한쪽에 있는 찻잔에 녹차 팩을 뜯어 담았다. 자신의 몫으로는 작은 냉장고에 들어 있는 오렌지주스를 꺼내 따랐다.

삐이이익-

이윽고 커피포트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강우가 커피포트를 들어 찻잔에 물을 따랐다. 금세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며 녹차 특유의 향이 느껴졌다. 강우가 찻잔을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소파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으아~!”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강우의 반대편으로 앉았다. 아버지가 찻잔을 들어 후루룩 마셨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지 두 눈을 감고 부드럽게 웃었다. 강우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강우의 부름에 아버지가 두 눈을 뜨고 강우를 바라보았다. 부모의 직감으로 강우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이럴 때는 강우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전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 말해.”

“저…. 나은이에게 프러포즈했어요.”

강우의 말에 아버지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그래, 잘했어! 잘했어!”

생각보다 엄청난 아버지의 반응에 강우가 움찔했다. 아버지가 책상으로 가더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어디로인가 전화를 걸었다. 이내 상대방과 연결된 아버지가 크게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은 아버…. 아니 사돈! 드디어 애들이 결혼할 모양입니다.”

아버지가 전화를 건 것은 바로 이나은의 아버지였다. 이나은의 아버지 역시 갑자기 날아든 희소식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이 답답한 녀석들이 언제 우리에게 국수를 먹여주나 했더니. 잘 됐습니다. 우리 상견례 빨리 잡고 후다닥 보내 버립시다.-

“좋지요! 우리도 미룰 이유가 없지요. 그럼 봄이 가기 전에 만나는 거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두 아버지가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통화를 나누었다. 강우는 그런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치 강우와 이나은을 빼고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난리가 난 것이었다. 아버지와 이나은 아버지는 순식간에 상견례 약속까지 잡았다. 그리고 주말에는 이나은 가족을 집으로 초대까지 했다.

“좋지요! 이런 경사가 있으니 아주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봅시다.”

-좋습니다. 내 그날을 위해 오늘부터 금주하겠습니다.-

두 아버지의 폭풍과 같은 통화가 끝났다. 아버지가 통화를 끝내고는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죄송해요. 저희가 너무 결혼을 망설였나 보네요.”

아버지가 소파에 다시 앉으며 환하게 웃었다. 강우를 바라보는 표정에는 흐뭇함이 가득했다.

“아니다. 너희들이 아직 어리고 각자의 위치가 있으니 우리도 때를 기다릴 뿐이었지. 그런데 이렇게 빨리 결혼을 해준다고 하니 나도 나은 아버…. 아니 사돈도 기쁠 수밖에.”

벌써 호칭도 나은 아버지에서 사돈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결혼 날짜는 조금 천천히 잡는 게 어떨까 하는데요.”

“그건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시는 거로 하자꾸나.”

“아…. 그게 좋겠네요.”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망설이더니 어떻게 결심을 하게 된 거야?”

강우가 어젯밤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강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나은의 마음을 이해했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나은 역시 현재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연예계 최정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 않았던가. 강우를 옆에서 돕고 내조하겠다는 그 마음이 고맙고 미안했다.

“그래, 나은이가 큰 결심을 해주었구나. 정말 아빠가 며느리 복도 이렇게 타고났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나은이가 하는 일은 계속해야 한다. 그건 아빠하고 약속해 줄 수 있지?”

“네, 당연하죠. 저랑 결혼한다고 배우 생활 그만하게 할 생각은 없어요.”

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아버지의 말에 동감했다.

“너희들이 아직 어리다고는 하지만 결혼은 꼭 일찍 한다고 해서 나쁜 것은 없다. 결혼을 언제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서로에 대한 믿음과 이해가 얼마나 쌓여있느냐가 중요한 거니까. 너희 둘은 이미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매사에 서로 양보하고 이해해주니 결혼을 해도 잘살 거라고 믿는다.”

“네, 잘 살겠습니다.”

강우의 짧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에 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증손주까지 보시겠구나. 아주 기뻐하시겠어.”

“그…. 아버지.”

강우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응?”

“결혼식은 저희 신사옥 완공하고 나면 그곳에서 하고 싶습니다.”

강우의 말에 아버지가 탄성을 뱉어냈다. 동양 무역의 신사옥은 빠르게 지어지고 있었다. 대진 건설이 동양 무역의 신사옥 건설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양 무역의 늘어나는 규모와 위상을 위해서 하루빨리 신사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음…. 그럼 아주 빨리 식을 올리지는 못하겠구나.”

아버지가 조금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신사옥 완공은 빨라야 내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네, 신사옥으로 이사 가는 것은 동양 무역에도 제게도 큰 의미가 있으니까요.”

“그렇지.”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양 무역의 신사옥은 단지 그룹의 본사 건물의 의미만이 아니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역경을 딛고 일어나 일구어낸 성공의 상징이자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신사옥 옆에 부속 건물로 지어질 독립운동 역사박물관도 큰 의미가 있었다.

“저는 새로 지어질 독립운동 역사박물관에서 결혼식을 하고 싶어요.”

“그래, 네 뜻이 그러하다면 아빠도 동의한다. 그럼 확실한 결혼식 날짜는 할아버지께서 여쭤보고 최대한 준비를 잘해서 나은이를 우리 가족으로 맞이하는 거로 하자.”

강우가 아버지를 향해 감사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는 늘 이렇게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인정해주었다. 아버지에게 받는 그런 신뢰가 강우에게는 큰 기쁨이자 원동력이었다.

“아버지, 이렇게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다….”

아버지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가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장미여관에서 마주 앉아 먹었던 회가 떠올랐다. 그날의 아버지는 삶의 무게에 짓눌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버지도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삶의 무게가 아닌 많은 책임감을 지고 있는 것이 달랐다. 몇 년 사이 많이 늘어난 주름과 살짝 보이는 흰머리를 보며 강우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버지, 오늘 아들이랑 술 한잔하실래요?”

“술? 아들이랑? 좋지!”

아버지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강우와 단둘이 시간을 가져본 것도 참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강우가 아버지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전에 처리할 일들이 좀 많네요.”

강우가 아버지 책상을 보며 말했다. 아버지가 책상 위에 잔뜩 쌓인 서류 더미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다 가장의 무게라고나 할까.”

강우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는 서류 더미의 반을 집어 들었다.

“그 무게 제가 덜어드릴게요. 앞으로도 계속이요.”

아버지가 강우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 * *

퇴근 시간이 되고 아버지와 강우는 근처의 고깃집으로 향했다. 역시 고기를 좋아하는 강우 가족다웠다.

드르륵.

문을 열자 고깃집 특유의 구수한 고기 냄새가 밀려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왁자지껄함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강우가 자리를 찾으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많은 직장인이 자리를 잡고 하루의 고단함을 술 한잔에 털어내고 있었다. 퇴근 후 붐비는 고깃집과 술집이야말로 직장인들의 애환이 묻어나는 곳이 아닐까 싶었다.

“어? 사장님!”

단골 고깃집의 사장이 아버지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두 명입니다.”

“네, 저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역시 단골이라 그런지 고깃집 사장이 좋은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아버지가 사장님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삼겹살이랑 목살 그리고 항정살도 주세요.”

“네, 사장님.”

고깃집 사장이 능숙하게 주문을 받았다. 역시나 오늘도 강우가 있으니 많은 양을 먹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시죠? 우리 아들 많이 먹는 거. 각 4인분씩 일단 주세요. 그리고 소주도 한 병 주시고요.”

“네, 사장님.”

주문을 받고 돌아가는 고깃집 사장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한 테이블에서 엄청난 양을 먹으니 그럴만했다. 그걸 떠나서 강우가 오는 날은 유난히 장사가 잘되기도 했다.

“아들, 많이 먹어.”

“네, 아버지. 아…. 가족들한테는 아직 말하지 않으셨죠?”

“있다가 집에 들어가서 이야기하려고.”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주문한 고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나왔다. 주변이 시선이 대번에 쏠렸다. 하지만 대부분 손님이 강우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가게를 자주 오는 사람들이라면 강우의 존재는 익숙했으니까 말이다.

“제가 구울게요.”

역시 고기는 강우가 구워야 맛있었다. 강우가 차분히 불판에 고기를 올려놓았다.

치이익-

언제 들어도 아름다운 소리에 강우가 씩 웃었다. 그사이 아버지는 소주병을 ‘따라락’ 뜯었다. 그리고 강우에게 내밀었다.

“아들, 한잔 받아라.”

“네, 아버지.”

강우가 잔을 들어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받았다.

“정말 축하한다 아들. 이제 조금 있으면 너도 한 여자의 남편이 되는구나.”

“감사합니다. 아버지 같은 남편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강우의 말에 아버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결혼했을 때를 떠올렸다.

“사실 말이야. 나는 그렇게 좋은 남편은 아니었던 거 같아.”

아버지가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아직 고기는 익지 않았기 때문에 밑반찬을 집어 먹었다. 강우도 고개를 돌리고 술을 털어 넣었다. 오늘따라 술이 달았다.

“엄마를 처음 만나고 결혼까지 정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 힘든 형편이었지만, 엄마랑 나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기에 결혼을 했지.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젊을 적 참 많은 고생을 하셨다. 강우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잘살고 싶었어. 엄마도 행복하게 해주고 너희들도 잘 키우고.”

“당연히 그렇게 해주셨어요. 엄마도 우리도 정말 행복했어요. 돈이 없었을 때도 지금도요. 우리는 항상 함께였고, 서로 의지하고 사랑했어요. 그만큼의 행복이 또 있겠어요?”

강우의 말에 아버지가 푸근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의 말은 늘 사람을 따듯하게 만들어주는 능력이 있었다. 참 고맙고 의지하는 아들이었다.

“그래, 고맙다. 아들. 우리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자.”

“네, 아버지.”

강우와 아버지가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렇게 두 부자의 술자리는 한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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