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어린이집을 나오는 강우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아이들의 순수한 표정과 자신을 향한 호감에 강우는 정말 기분이 좋은 시간을 보냈다. 강우가 원장선생님들과 어린이집 선생님들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그럼,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원장선생님이 강우를 보며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정말 좋은 시간이었어요.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 많이 느꼈어요.”
“제가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한 것 같아서 아이들이 좋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에요.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어요. 이야기가 끝나고 나사도 한참이나 자기들끼리 이야기했어요.”
강우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원장선생님이 강우를 보며 말했다.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에 대해 가르치는 것. 그것이 어찌 보면 인성교육만큼 중요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다만 아이들은 어리기 때문에 신중하고 정확한 역사를 전달해주는 게 중요하겠죠. 섣불리 한쪽의 이야기만을 강요한다면 선입견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요.”
강우의 말에 원장선생님이 다시 한번 감탄성을 터트렸다.
“사장님은 교육자를 하셨어도 참 좋은 선생님이 되셨을 거 같아요.”
“아…. 감사합니다.”
강우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갔다.
“별관은 독립운동 역사박물관이 주제지만 한국사에 대한 다른 정보들도 함께 전시할 예정입니다. 역사의 단편만을 알아서는 제대로 된 이해가 있을 수 없으니까요. 제가 최 비서를 통해 지시해놓을 테니 원생들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방문해서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지원은 언제든지 말씀만 해주세요.”
“네, 사장님. 감사해요. 지금도 다른 어린이집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지원을 받고 있어요. 정말 이곳에 입소한 아이들은 행복한 아이들일 거예요.”
원장선생님의 칭찬에 강우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럼, 자주 오겠습니다.”
“나중에는 학부모로 만나 뵈어요.”
강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원장선생님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사이 최 비서의 연락을 받은 비서 한 명이 어린이집으로 도착했다. 최 비서가 딸과 점심을 같이 먹을 동안 강우를 수행할 비서였다.
“지금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성은 이제 막 20대 중반으로 윤씨 성을 가진 비서였다. 강우가 윤 비서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부탁해요. 윤 비서님.”
“네, 사장님.”
윤 비서가 조금 긴장한 표정과 행동을 보였다. 이번 사원 모집에 새로 뽑힌 윤 비서는 강우를 수행하는 것이 오늘 처음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젊은 천재를 모실 생각에 심장이 쿵쾅댔다. 윤 비서의 긴장감을 느낀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하고 사내 식당으로 가죠.”
“네, 사장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윤 비서가 앞장을 서고 강우가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을 맞이한 신사옥 내부는 많은 직원으로 붐비기 시작하고 있었다. 동양 그룹에서 자랑하는 사원복지 중 하나인 사내 식당을 이용하기 위한 인파였다. 이윽고 사내 식당 입구에 강우가 도착했다.
“넓게 짓는다고 지었는데도 사람이 몰리니까 대기 줄이 발생하는군요.”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강우가 말했다. 윤 비서가 움찔하며 입구로 다가가려다 멈춰 섰다. 그리고 직속 상사인 최 비서의 말을 떠올렸다.
‘대표님께서는 특권 의식을 정말 싫어하신다고 하셨지.’
다른 재벌가의 사람들이나 임원들과는 달리 강우는 특권 의식을 정말 싫어했다. 사소한 것일수록 다른 사람과 같은 기본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줄은 저쪽입니다.”
윤 비서가 줄의 맨 끝 쪽을 가리켰다. 강우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윤 비서와 함께 줄의 맨 끝 쪽으로 섰다. 강우를 알아본 직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 사장님이다.”
“여긴 어쩐 일이시지?”
새로 입사한 직원들은 아직 강우의 성향을 잘 몰랐다. 강우의 등장에 줄을 비켜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했다. 하지만 기존 동양 무역의 직원들을 이런 상황에 익숙해 보였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오늘 점심 맛있게 드세요.”
기존 직원들은 허물없이 강우를 대했다. 새로 들어온 직원들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도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주었다.
“다들 두 그릇 드세요. 아니 세 그릇 드세요.”
강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기존에 있던 직원들이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줄을 섰다. 그런 허물없는 모습에 신입 직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우와 지내다 보면 머지않아 이해하게 될 것들이었다. 이윽고 줄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들어갈 자리가 없던 게 아니라 아직 열지 않았던 거군요.”
“네, 사장님. 그런 것 같습니다.”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직장인들에게 금쪽같은 점심시간이었다. 물론, 동양 그룹의 점심시간이 다른 회사보다는 30분이나 더 있다고는 해도 말이다. 그런 점심시간을 줄 서는 것에 모두 보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강우와 윤 비서의 입장 차례가 되었다.
“사장님, 어서 오십시오.”
강우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총주방장이 입구에 나와 있었다. 강우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최 쉐프님, 오랜만에 봬요.”
“네, 사장님. 신혼여행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잘 쉬다가 왔습니다. 주방은 마음에 드십니까?”
강우와 최 쉐프가 악수하였다. 강우보다 한 뼘은 큰 키에 멀쑥하게 생긴 최 쉐프는 전직 유명 호텔 뷔페의 총주방장이었다.
“네, 사장님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인 게 제 인생 최고의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 쉐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나갔다. 사실 맨 처음 동양 그룹 사내 식당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을 때 미간을 찌푸릴 정도로 불쾌했었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호텔의 총주방장이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 하지만 스카우트 제의가 온 곳이 동양 그룹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들었다.
“힘든 결정이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런 조건을 거절할 요리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최 쉐프는 강우라는 존재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담당자를 만나보았다. 그렇게 담당자를 만난 최 쉐프는 계약 내용과 사내 식당의 시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는 설명을 들을수록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네, 사장님.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좋은 재료와 요리 시설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고 시간도 전보다 넉넉해서 요리 연구를 할 시간도 많아지고요.”
“다행이네요. 팀원들은 전부 지낼만하다고 하시나요?”
강우는 최 쉐프는 물론이고 밑에 있는 팀원들까지 모두 후한 대우를 약속하고 데려왔다. 팀원들을 대우해주는 계약조건이 결정적으로 최 쉐프의 마음을 움직였다.
“네, 다들 너무 좋아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장님.”
강우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듣자 하니 직원들이 음식이 너무 맛있다고 좋아하더군요. 앞으로도 직원들을 위해 정성스러운 요리 부탁드려요.”
최 쉐프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한민국 최고의 식단으로 직원분들의 건강을 책임지겠습니다.”
웃음을 멈춘 최 쉐프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식사 시간을 앞두고 강우를 너무 오래 붙잡아 놓고 있었나 싶은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강우가 최 쉐프의 안내를 받아 사내 식당으로 들어섰다. 강우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나갔다. 사내 식당은 한눈에 보아도 일반 식당이라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실내장식도 정말 잘됐네요.”
“네, 호텔 뷔페라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사내 식당에 이렇게 신경을 쓰는 회사가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려나 모르겠습니다.”
최 쉐프의 얼굴에는 자신의 주방과 식당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강우는 안내를 받아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식당은 아시안 요리와 서양 요리 그리고 디저트와 한식 요리 파트로 나뉘어 있습니다.”
최 쉐프는 차분히 메뉴의 구성과 내부 구조를 설명해 주었다. 같이 따라온 윤 비서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강우를 안내하기 위해 최 비서의 연락을 받는 순간부터 달달 외우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최 쉐프의 설명보다 꼼꼼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설명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 이제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업무 보세요.”
“네, 그럼 즐거운 식사 되십시오. 음식은 정말 맛있을 겁니다.”
최 쉐프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후 주방으로 돌아갔다. 강우가 윤 비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럼 식사를 시작해 볼까요?”
“네, 사장님.”
윤 비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엄청난 대식가로 알려진 강우였다. 처음 보게 될 강우의 식성이 궁금하기도 했고, 왠지 모르게 긴장도 됐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최 쉐프의 호언장담은 사실이었다.
“오…. 진짜 메뉴가 다양하네요.”
“맛도 정말 일품입니다. 직원들이 한 달 사이에 살이 엄청나게 쪘다고 난리들입니다.”
너무 맛있는 사내 식당은 직원들에게는 무료였다. 더군다나 저녁까지 같이 운영을 하는 사내 식당이었다. 직원들은 일부러 사내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갈 정도였다. 주말에는 역사박물관을 찾아온 관람객들에게 개방도 했다. 관람객들은 적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사내 식당을 이용할 수 있었다.
“건강 센터 등록을 의무화해야겠군요.”
강우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신사옥에는 직원들을 위한 휴식공간도 정말 잘 준비되어 있었다. 그중 건강 센터도 직원들을 위해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윤 비서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로 전 직원이 강제 운동을 하게 되나 싶었다.
“사…. 사장님.”
하지만 윤 비서는 아직 강우를 잘 몰랐나 보다. 강우가 픽 웃으며 윤 비서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농담입니다. 농담.”
강우가 음식을 계속해서 담았다. 윤 비서가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강우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는 이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우는 정말 여러 번이나 음식을 날랐다.
“제가 좀 많이 먹어서요….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드세요.”
강우의 앞쪽으로 접시들이 잔뜩 놓였다. 수북이 쌓인 음식들의 양은 정말 혼자 먹을 양은 아닌 듯싶었다.
“네, 사장님. 식사 맛있게 드십시오.”
강우의 식사가 시작됐다. 식사가 이어질수록 윤 비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강우의 앞에 잔뜩 놓여있던 접시들이 순식간에 하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식사가 이어지던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강우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강우가 핸드폰을 열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수화기에서 최 비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우는 차분히 최 비서의 보고를 들었다. 보고를 듣는 내내 강우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보고를 모두 받은 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 준비 부탁드립니다.”
-네, 사장님.-
최 비서와의 통화가 끝났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 비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긴장한 표정이었다. 강우가 윤 비서를 향해 말했다.
“윤 비서는 마저 식사하세요. 저는 최 비서님이랑 같이 다녀오면 됩니다.”
“네, 사장님.”
윤 비서는 강우의 지시를 단번에 받아드렸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어주고는 식당에서 벗어났다. 아직 배를 다 채우지는 못해 살짝 아쉬웠지만, 지금은 그보다 급한 일이 생겼다. 이윽고 신사옥 로비에 도착한 강우를 최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바로 출발하면 되는 겁니까?”
“네, 기다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강우와 최 비서가 신사옥 로비를 벗어났다. 대기하고 있던 고급 세단에 강우와 최 비서가 올라탔다.
“출발하세요.”
“네, 사장님.”
정 기사가 고급 세단을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강우는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사장님, 이제 곧 도착입니다.”
잠시 후, 최 비서의 말에 강우가 눈을 떴다. 멀리 푸른색 지붕이 시야에 들어왔다. 강우가 눈을 빛냈다. 오랜만에 방문하는 청와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