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드디어 왔어요.
대진 플렉스 용산점의 개장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역대 최고이자 최대의 복합 멀티플렉스의 등장에 사람들은 크게 열광했다. 매장 개점 첫날 기록적인 방문자 수를 기록했고, 매출 역시 백화점과 대형마트 역사상 최고를 찍었다.
덜컥.
현관문을 열고 강우가 신문을 집어 들었다. 이른 아침 겨울바람이 집 안으로 마구 밀려들었다. 강우가 재빨리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고 따듯한 집 안의 공기에 강우의 표정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삐이이익-
주방 쪽에서는 강우가 올려놓은 주전자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강우가 머그잔을 두 개 꺼내서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찬장을 열어 유자차를 꺼냈다. 추운 겨울에는 오렌지 주스 대신 따듯한 유자차도 좋아하는 강우였다.
뻥-
유자차 뚜껑을 연 강우가 숟가락으로 한 움큼 떴다. 그리고 두 개의 머그잔에 차례로 담았다. 강우가 가스레인지에 다가가 불을 껐다. 주전자를 조심히 들어서 머그잔을 향해 기울였다.
치익- 치이익-
주전자의 좁은 목에서 뜨거운 물이 콸콸 흘러나왔다. 뽀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유자차의 새콤달콤한 냄새가 강우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강우가 티스푼으로 두 개의 머그잔을 휘휘 저었다. 강우가 머그잔 한 잔은 반대편에 놓았다. 그리고는 이나은이 잠들어 있는 안방을 바라보았다.
“여보! 차 준비됐어.”
강우의 목소리에 방 안에서 이나은의 잠기가 묻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지금 나가.”
강우가 거실 식탁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신문 1면에는 역시 대진 플렉스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었다.
-대진 플렉스. 다목적 쇼핑몰의 새 지평을 열다. 대한민국 최대 규모이자 아시아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대진 플렉스가 지난주 역사적인 첫 매장 개점을 했다. 개점 당일 수많은 축하 인사들이 몰려들었다. 대진 그룹의 위상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대진 그룹과 한 몸이나 다름없는 동양 그룹 박강우 사장도 참석했다….-
강우가 다른 신문도 읽어내려갔다. 신문마다 모두 며칠 전 있었던 대진 플렉스 용산점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강우의 얼굴로 만족스러운 표정이 번져나갔다. 그때, 안방 문이 열리고 이나은이 부스스한 얼굴로 나왔다. 강우가 벌떡 일어나 이나은을 부축했다.
“조심. 조심.”
이나은이 킥하고 웃으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가 엄청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진짜 조심해야 한다고.”
“응.”
강우가 이나은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만삭이 된 이나은의 배는 이제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나은이 강우의 부축을 받아서는 자리에 앉았다.
“뜨거워. 조금 식혀줄게.”
강우가 머그잔을 들어 ‘후~’ 하고 불어 식혔다. 유자차가 적당히 식자 강우가 이나은에게 머그잔을 건네주었다. 이나은이 싱긋 웃으며 후루룩 한 모금을 마셨다.
“아~ 좋다.”
“배 안 고파?”
“나는 괜찮은데 광복이가 엄청나게 배가 고픈가 봐.”
이나은이 배를 어루만지며 답했다. 강우가 씩 웃었다.
“자식, 아빠를 닮아서 엄청나게 먹네.”
“오늘도 우리 광복이의 맛있는 식사 부탁해요.”
이나은의 말에 강우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주말을 맞이해 시간도 많았고, 요리는 항상 즐거웠다. 유자차를 모두 마신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이나은이 턱을 괴고 강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른한 겨울 아침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해주는 강우의 모습에 행복함이 차올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제 회사에서 전화 왔다? 영화 반응이 너무 좋다고 하던데?”
대진 플렉스 용산점을 시작으로 전국에 영화 ‘광복’이 개봉했다. 영화 ‘광복’은 강용이가 시나리오를 쓰고 이나은이 주연을 맡은 바로 그 영화였다. 영화 ‘광복’은 개봉과 동시에 엄청난 화제를 불러모았다. 먼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순국 의사들의 스토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시사회에 참석했던 평론가들의 엄청난 호평도 기대감을 높였다. 그 관심과 호평은 영화관에 많은 관객이 발길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 이번에 용산점도 전 회차 매진이었다고는 하더라.”
“정말? 잘 됐다.”
이나은이 안도의 숨을 뱉어냈다. 이번 영화는 당분간 이나은의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는 영화였다. 이나은은 광복이를 낳으면 한동안 육아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러니 이번 영화에 대한 애착이 컸다.
“그럼, 우리 여보가 고생하면서 찍은 영화인데 당연히 대박이 나지. 평론가들도 그렇고 관람객들도 여보 연기 많이 칭찬하더라.”
“이게 전부 우리 복덩이 광복이 덕분이지.”
이나은이 불룩 튀어나온 배를 사랑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쓰다듬었다. 맨 처음 이나은의 임신 소식이 알려지자 대진 엔터가 발칵 뒤집혔었다. 축하의 의미도 있었고, 영화 촬영에 대한 걱정의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주변 관계자들의 걱정은 금세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강우의 예상대로 광복이는 이나은에게 강한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럼, 우리 광복이가 엄마한테 힘도 주고 지켜준 거지.”
“그러니까. 미나한테 물어보니까. 임신하고 엄청 힘들다고 하던데. 나는 왜 이렇게 힘이 넘치는지 모르겠어.”
이나은의 말에 강우가 말없이 웃었다. 배 속의 광복이가 자신처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광복이의 도움으로 이나은은 영화 촬영을 훌륭히 끝마쳤다. 마지막 장면 촬영이 끝나고는 이나은을 향한 촬영 현장의 찬사가 쏟아졌을 정도였다.
“시작부터 반응이 좋으니까. 관람객 수 신기록 세울지 지켜보자고.”
“으…. 생각만 해도 떨린다.”
이나은이 기대감을 잔뜩 드러냈다. 대화를 마친 강우가 요리를 시작했다. 강우가 오늘 만들 요리는 이나은이 전날부터 먹고 싶다고 했던 짜장라면이었다. 임신한 후 인스턴스 음식은 절대로 먹지 않던 이나은이었다. 하지만 출산을 앞두고 꼭 먹고 싶다던 게 짜장라면이었다.
푹-
강우가 짜장라면 봉지를 뜯어 끓는 물에 면을 넣었다. 그리고 건더기 스프도 넣었다. 나무젓가락으로 휘휘 저어주던 강우가 불을 끄고 물을 적당히 덜어냈다. 마지막으로 짜장 스프와 올리브유를 넣은 강우가 잘 섞어주었다.
“와~ 냄새 좋다.”
“덜어줄게.”
강우가 짜장라면을 그릇에 정갈히 담아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어머니가 담가준 깍두기도 꺼냈다. 이나은이 꿀꺽 침을 삼켰다. 다급히 젓가락을 든 이나은이 눈을 반짝였다.
“빨리빨리.”
“알겠어.”
강우가 웃음을 터트리며 그릇을 이나은 앞에 놓아주었다. 이나은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경건한 자세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잘 먹을게.”
“어, 많이 먹어.”
강우의 말이 신호탄이었다.
후루룩- 후루룩-
이나은이 짜장라면을 마구 흡입하기 시작했다. 양 볼 가득 짜장라면을 머금은 이나은이 깍두기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아삭아삭 깍두기가 입안에서 씹히며 새콤 짭짤한 맛이 입안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흐음….”
이나은이 신음성을 뱉어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임신 기간 내내 광복이를 위해 좋은 것만 먹던 이나은이었다. 평소 좋아하던 커피도 마다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좋아?”
“응, 너무 맛있어. 고마워.”
“아니야. 우리 광복이 튼튼해서 마음껏 먹어도 된다니까.”
“안 돼. 몸에 안 좋은 건. 이것도 오늘만 먹는 거야. 영화 개봉 소식에 기분이 너무 좋아서.”
강우가 이나은을 보며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좋아하는 음식을 참아낼 정도로 어머니라는 존재는 정말 위대했다. 강우가 후딱 짜장라면 한 그릇을 해치웠다. 그렇게 아침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이 차례로 씻고 나갈 채비를 했다.
“여보, 아까 신문 가지고 들어올 때 보니까 엄청 춥더라. 오늘 따듯하게 입어.”
“응.”
이나은이 커다란 오리털 점퍼를 꺼내 입었다. 만삭에 배가 불룩한 것만 빼면 아직 임신 전의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이나은이었다. 피부도 윤기를 더해가고 있었고, 머리카락도 더욱 풍성해졌다. 다른 임산부들과는 정말이지 다른 현상이었다.
‘의사 선생님도 너무 건강하다며 놀랄 정도였지.’
산부인과를 갈 때마다 담당 주치의가 매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강우가 이나은에게 목도리와 털모자도 씌워주었다. 완전무장 상태의 이나은을 보며 강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이 정도면 추위 걱정은 없고.”
“어차피 차 타고 갈 건데. 나 너무 둔해 보이는 거 아니야?”
강우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세상에서 가장 늘씬하고 예쁜 임산부가 바로 우리 여보일 걸?”
“아휴~ 참.”
이나은이 강우의 가슴을 주먹으로 ‘퍽’하고 쳤다. 강해진 이나은의 힘에 강우가 움찔하며 비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는 멋쩍게 웃었다. 이나은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출산을 앞두고 이나은의 힘은 더 강해져 있었다.
딩동- 딩동-
그때, 누군가가 벨을 눌렀다. 강우가 인터폰으로 다가가 상대방을 확인했다. 자그마한 사각의 화면 속에 이재원과 미나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강우가 씩 웃으며 현관문을 향해 다가갔다.
덜컥.
문이 열리고 이재원과 미나가 황급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 밖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으으…. 춥다 추워.”
“오빠, 안녕하세요.”
이재원은 춥다며 엄살을 부렸고, 미나는 씩씩하게 강우를 향해 인사했다. 강우가 미나를 보며 반갑게 웃었다.
“그래, 오는데 불편하지는 않았어?”
“네, 산책 겸 걸어왔어요.”
이재원과 미나의 신혼집은 강우의 신혼집에서 가까웠다. 강우의 시선이 미나의 배를 향했다. 미나의 배 역시 이나은만큼 불러있었다. 이재원과 미나의 출산일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보는 척도 안 하냐?”
“어제 봤잖아요.”
“아! 맞다.”
이재원이 볼을 긁적였다. 강우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도 준비 끝났어요. 바로 나가죠.”
“오늘은 강우, 네 차로 움직이자.”
“좋죠.”
강우와 이나은 그리고 이재원과 미나 부부가 현관문을 사이좋게 나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출산을 앞둔 두 부부가 아기용품을 사기 위해 나선 날이었다.
“시동을 좀 걸어놓을 걸 그랬나.”
강우가 운전석에 앉으며 말했다. 추운 겨울 차 안은 냉장고처럼 차가웠다. 시트에 앉는 순간 온몸에 한기가 돌 정도였다. 운전대도 마치 얼음 봉을 만지듯 찼다. 강우가 시동을 걸자 엔진이 힘찬 기지개를 켰다. 이재원이 조수석에 앉았다.
“안전띠 전부 매세요.”
이재원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나은과 미나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이나은과 미나가 알겠다고 답하며 안전띠를 맸다. 미나가 메고 온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언니, 우리 간식 먹어요. 내가 고구마 말려왔어요.”
“와! 대박.”
이나은과 미나가 수다를 떨며 간식을 나눠 먹기 시작했다. 강우는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주말 아침 거리에는 차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오늘 두 신혼부부의 목적지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부우웅-
잠시 후, 강우가 모는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뒷좌석에 있던 이나은과 미나가 탄성을 뱉어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거대한 무역센터에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현수막을 바라보는 이나은과 미나의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언니, 드디어 왔어요.”
“그래, 오늘 안에 있는 거 다 둘러보고 가자.”
이나은과 미나가 손을 마주 잡고 전투력을 불살랐다.
-부모를 위한 모든 것. 베이비페어.-
초보 부모에게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하게 해준다는 곳. 오늘 두 신혼부부의 목적지는 바로 무역센터에서 펼쳐지는 아기용품 박람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