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커다란 통유리 앞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은 아버지와 나은 어머니가 있었다. 양가 부모님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환하게 피어있었다. 통유리 너머에는 오늘 무사히 세상 빛을 본 새 생명이 있었다.
“하하! 이거 안사돈을 똑 닮았습니다.”
나은 아버지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요. 나은이를 닮아서 아주 예쁜데요.”
아버지와 나은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와 나은 어머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광복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간호사 품에 안겨 있는 광복이는 정말이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예뻤다.
“남자아이가 벌써 저렇게 예뻐도 되는 거예요?”
나은 어머니도 광복이를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예뻐요. 예전 강우 아기였을 때 생각도 나네요.”
“저도 나은이 아기였을 때 생각나요.”
이윽고 다른 가족들도 아기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우와! 내 조카님, 진짜 귀엽다!”
강용이는 유리에 착 달라붙어 광복이를 살폈다. 조카를 바라보는 강용이의 표정은 크게 상기되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이제 우리 강용이도 삼촌이구나?”
“사…. 삼촌이요?”
강용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삼촌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은 강용이에게 색다르게 다가왔다. 강용이가 다시 광복이를 바라보았다. 꼬물거리는 광복이를 보며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세상 최고의 삼촌이 되겠다고 말이다.
“할아버지, 저 광복이한테 정말 잘할 거에요. 제가 받은 사랑만큼 광복이에게 돌려줄 거예요.”
“허허~ 우리 집 막둥이가 이제 어른이 되려나 보다?”
할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강용이를 쓰다듬어주었다. 가족들 모두가 새로운 식구를 바라보며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광복이 역시 가족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방긋방긋 웃으며 보답을 해주었다. 광복이가 방긋 웃을 때마다 가족들이 감탄성을 뱉어내며 난리가 났다. 한편 산부인과 특실에 강우와 이나은이 있었다.
“강우야.”
이나은이 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겨있던 강우가 고개를 들어 이나은을 바라보았다.
“응?”
“광복이 나오던 순간 어땠어?”
강우의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광복이를 처음 만난 순간을 떠올렸다.
“머리에 종소리가 울렸어. 그리고 광복이를 처음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
“그랬구나. 나는 힘들어서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기억도 안 나.”
이나은의 말에 강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고생했어. 몸은 괜찮아?”
“응, 진짜 신기하게도 몸이 개운해.”
이나은이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크게 했다. 출산 후 수술을 마치고는 잠이 들어 지금까지 쉬었던 이나은이었다. 보통 출산 직후에 느껴지는 고통도 적은 모양이었다.
“어어~ 너무 막 움직이면 안 돼. 몸 상해. 지금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고 그랬어.”
“나 진짜 너무 멀쩡한데….”
이나은이 진짜라는 듯 몸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강우가 제지해 침대에 눕혔다. 강우와 이나은이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진짜 고생했어. 그리고 고마워.”
“우리 광복이한테 더 고맙지. 엄마 고생을 이리 안 시켰는데.”
임신과 출산이라는 긴 여정을 통해 강우와 이나은의 신뢰와 유대관계는 더욱더 깊어진 상태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똑똑.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특실로 들어왔다. 강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모님들을 맞이했다.
“강우야, 광복이 보고 왔다. 진짜 너무 잘생겼어.”
아버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싱긋 웃었다.
“강우야, 아빠는 할아버지가 됐는데 이렇게 좋은가 봐.”
“그럼, 좋지. 우리 집 장손인데.”
장인어른이 아버지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사돈, 입이 귀에 걸리셨습니다?”
“하하! 사돈도 기분 좋으시죠?”
“당연하죠. 우리 딸이 이렇게 무사히 순산했는데요. 우리 외손주가 엄마 고생도 안 시키고 어찌나 이쁜지.”
“그럼, 오늘 축하의 의미로 약주 한잔 어떠십니까?”
아버지의 제안에 장인어른의 입가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그거 좋은 생각이십니다!”
아버지와 장인어른이 보여주는 환상의 호흡에 어머니와 장모님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 아니던가.
“그래요. 오랜만에 두 분이 회포를 풀고 와요.”
어머니가 찬성했고.
“여보, 오늘은 마음껏 놀다 와요.”
장모님도 쿨하게 허락을 하셨다. 두 아내의 허락에 아버지와 장인어른이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는 그런 아버지들을 보며 씩 웃었다.
“광복이가 참 복덩이예요. 그렇죠?”
아버지와 장인어른이 멋쩍게 웃었다. 어머니가 강우를 향해 말했다.
“아들, 빨리 가서 광복이 얼굴 보고와. 조금 있으면 아기 면회 시간 끝이야.”
“네.”
강우가 이나은을 향해 갔다 온다고 말한 뒤 특실을 나섰다. 신생아 면회실 앞쪽으로는 다른 가족들도 와있는 상태였다. 아마 조금 전 분만실에서 비명을 지르던 여성의 아기인가도 싶었다. 강우가 나오자 강용이가 급하게 손짓을 했다.
“형아! 빨리 와봐. 지금 광복이 웃어.”
“그래?”
강우가 강용이를 향해 다가갔다. 강용이가 슬쩍 옆으로 비켜주었다. 강우가 통유리 앞에 섰다. 유리 너머로 광복이가 보였다. 강우가 아들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형아, 정말 예쁘고 신기하다. 그렇지?”
“응, 너무 예쁘다.”
강우와 강용이가 광복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우는 문득 강용이가 태어나던 날이 떠올랐다. 9살이나 차이 나는 덕분에 강우는 강용이가 태어나던 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작고 작았던 아기. 그 아기가 이제는 자신의 옆을 든든히 지켜주고 있었다.
“우리 강용이 참 고생 많았었는데….”
강우가 광복이를 보며 말했다. 강용이가 강우를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수많은 고생 속에서 언제나 힘이 되어주던 강우였다.
“아니야. 나는 그냥 아빠랑 엄마랑 형아 품에서 행복했어. 고생은 다른 가족들이 했지.”
“자식….”
강우가 코끝이 찡해짐을 느꼈다. 강용이가 강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형아, 나 정말 좋은 삼촌이 될 거야. 형아가 나한테 해준 만큼 광복이한테 더 잘할 거야. 우리 광복이는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행복하게 해줄 거야.”
“.....”
강우가 강용이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 훌쩍 커버린 강용이는 생각도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강우가 강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강용이는 강우에게 동생 그 이상의 의미였다. 어찌 보면 매 순간, 동생이 아닌 자식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 형아도 우리 강용이 더 아껴줄게.”
“응….”
강용이가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말은 안 했지만, 강우가 장가를 간 후 전과 같지 않은 관계에 외로웠던 강용이었다. 하지만 오늘 다시 느꼈다. 강우는 언제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을 말이다. 강우의 부드러운 표정에서 그리고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굵직한 목소리에서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형님, 형제간의 우애가 저리 깊으니 정말 보기 좋습니다.”
강우와 강용이를 지켜보던 막내 할아버지가 감탄하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강우와 강용이를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 정말 보기 좋아.”
가족 모두가 행복한 시간이었다. 광복이는 그야말로 박씨 집안의 슈퍼스타였다. 광복이의 손짓하나 발짓 하나 그리고 웃음 한 번에 모두가 웃고 즐거웠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광복이 아버님?”
누군가가 강우를 불렀다. 아이를 낳고 이제는 자신을 부르는 호칭도 변해있었다. 강우에서 아버지로 말이다. 그 부름에 강우의 기분이 또 울컥했다. 그렇게 아빠가 되는 과정은 감동과 감격의 연속이었다.
“네?”
강우가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간호사가 강우에게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저…. 병원에 기자분들이 찾아오셨어요.”
“기자요?”
강우가 실소를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 광복이가 태어난 지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벌써 소식을 듣고 기자들이 찾아온 것이었다.
“네, 지금 병원 로비에서 기다리고들 계세요.”
“알겠습니다. 소란스럽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강우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병원에는 분만을 앞둔 임산부들과 출산을 마치고 회복 중인 산모들이 있었다. 기자들이 몰려들어 시끄러워졌다고 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에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우리 병원 홍보된다고 원장선생님이 너무 좋아하세요.”
“감사합니다.”
강우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병원 로비로 내려갔다. 널찍한 병원 로비에는 취재진이 몰려있었다. 병원 측에서는 급하게 취재진을 위한 공간을 만든 것 같았다.
“박강우 사장이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기자들의 사진기가 일제히 강우를 향했다. 강우가 재빨리 손을 들며 기자들의 소란을 잠재웠다.
“이곳은 갓 태어난 아기들과 출산을 앞둔 임산부들이 있는 곳입니다. 다들 정숙해 주세요.”
강우의 말에 기자들이 침묵을 유지했다. 다만 사진을 계속 찍으며 강우에게 질문할 기회를 엿보았다. 강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병원 관계자를 찾았다.
“아…. 여기 있습니다.”
오늘 취재를 위해 장소를 마련한 관계자가 강우를 향해 다가왔다. 강우가 관계자를 향해 말했다.
“오늘 저 때문에 피해를 보신 병원 방문자분들이 있다면 제가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나중에 명단을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병원 관계자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듣던 대로 강우는 예의가 바르고 사려가 깊다고 생각했다. 강우가 기자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제가 지목하는 분부터 질문을 받겠습니다.”
강우가 기자 한 명을 지목했다. 기자가 반색하며 질문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M 신문사에서 나왔습니다. 먼저 득남을 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강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기자의 축하에 답했다.
“이제 득남을 하셔서 아버지가 되셨는데요.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일단 아직은 얼떨떨합니다. 아빠가 된 지 아직 몇 시간 되지 않았거든요.”
강우의 짧은 말에 기자들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강우가 말을 이어갔다.
“일단 고생해준 제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펑- 퍼펑-
강우의 미소 짓는 얼굴을 기자들이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강우가 다음 기자를 지목했다.
“부인이신 이나은 씨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그리고 향후 연예계 복귀계획은요?”
“제 아내는 아주 건강합니다. 아이도 건강하고요. 연예계 복귀계획은….”
강우가 이나은의 말을 떠올렸다. 광복이가 어느 정도 크기 전까지는 오직 육아에 전념하고 싶다고 했었다. 강우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아내가 당분간은 육아에 집중하고 싶다고 합니다. 자세한 입장은 곧 소속사를 통해 발표할 예정입니다.”
“아이 이름은 생각해 놓으신 게 있으십니까?”
기자가 은근슬쩍 질문 하나를 더 끼워 넣었다. 강우가 씩하고 웃은 뒤 답을 했다.
“아들의 이름은 제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다고 합니다.”
기자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강우의 할아버지가 지어준다고 하니 어떤 이름일까 궁금했다. 분명 범상치는 않은 이름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강우가 기자들 사이에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한민족 신문-
기자의 팔에는 소속을 나타내는 표식 띠가 보였다. 바로 예전에 김광일 기자가 속해있었던 신문사였다. 강우가 한민족 신문 기자를 지목했다.
“안녕하십니까? 한민족 신문에서 나왔습니다. 현재 독립유공자 후손 중 상징적인 분이 바로 박강우 사장님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민족 신문 기자가 잠시 숨을 골랐다. 무언가 중요한 질문을 앞둔 듯 살짝 긴장돼 보이기도 했다.
“현재, 독립유공자의 혜택은 3대까지가 끝입니다. 박강우 사장님은 비교적 젊은 3대째. 즉 손자에 해당하십니다. 그래서 혜택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훨씬 이전에 서훈을 받은 윗세대의 경우 이미 3대를 넘겨 아무런 혜택도 못 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민족 신문 기자의 질문이 끝났다. 다른 기자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 기자들은 꿀꺽 침을 삼키며 강우를 바라보았다. 강우의 입에서 나올 대답이 앞으로 많은 영향을 끼칠 것임을 느꼈다.
“저는….”
강우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무언가 거대한 운명이 자신을 향해 점점 다가옴을 느꼈다. 솔직히 아빠가 되기 전까지 생각지 못했던 문제였다. 그렇다고 지금 광복이가 태어나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강우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문제는 비단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에 처우에 대한 문제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에 대한 대우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꼭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늘 그렇듯 남의 손에 맡길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앞장서서 많은 유공자분의 처우를 개선해보겠습니다.”
강우의 답에 기자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한민족 신문 기자가 다시 물었다.
“처우 개선을 위해서는 기업의 힘만으로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박강우 사장님 시대가 사장님을 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정계에 진출할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병원 관계자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병원 홍보를 위해 준비했던 플래카드와 홍보물이 민망해질 정도의 분위기였다. 강우가 한민족 신문 기자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