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화
과거로 돌아오다 (1)
“하악. 하악.”
가쁜 숨을 재빠르게 들이쉬며 자세를 다잡는다.
손에 쥔 칼날은 반쯤 부러져 제구실을 못 한 지 오래다.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는 이미 익숙해져 아무런 자극도 되지 못했다.
그때 대전에 널브러진 수많은 시체와 바닥을 흠뻑 적신 핏물 가운데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새하얀 은빛 갑주를 전신에 두른 기사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든든한 내 우군이라고 생각했던 왕실 수호 기사단이었다.
하나같이 칼을 꼬나 쥐고 있는 것이, 이미 적의로 가득 차 있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나타난 것은, 여러 귀족과 이 모든 사태의 원흉. 아수스 공작이었다.
짝짝짝-
“놀랍습니다. 설마 아직도 그 비루한 목숨을 연명하고 계시다니요?”
“……아수스.”
저도 모르게 가래 끓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온다.
중간중간 목을 타고 올라오는 비린 맛이, 현재 내 몸 상태를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았다.
아수스 공작이 노쇠한 백발을 쓸어 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하지만 천하의 검왕도 이 정도의 숫자는 당해 내지 못하는군요.”
검왕.
그것은 기사의 나라 에스테반의 지배자인 나. 알렌 에스테반을 칭하는 단어였다.
몰려드는 적국의 검사를 베어 넘기며, 놈들의 살점으로 실력을 쌓아 나갔다.
감히 대륙 그 누구도 나와 검격을 나누지 못했다.
에스테반의 검왕이라는 것은 그런 자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 없는 법.
심지어 그것이 독을 먹은 상태에서 몇 시간이나 수없이 많은 기사를 상대했다면 더욱 그러했다.
“푸흐흐. 제법 억울하신 모양입니다.”
“어째서…….”
“이해합니다. 설마 이렇게 반란을 일으킬 줄은 몰랐겠지요.”
처음엔 믿지 못했다.
선왕의 추천으로 자신의 밑에서 계속해서 보좌해 왔던 충신 중의 충신. 그런 그가 배신했다니?
허나 꼬리에 꼬리를 걸쳐서 나온 것들은 명확하게 한 가지를 가리켰다.
오랫동안 진행된 매국의 흔적들.
-허…….
심지어 녀석이 숨겨온 저택과 비밀 금고에서 나온 것들은 허탈하게까지 만들었으니…….
그렇게 분노로 바싹 마른 입을 달래기 위해 부하가 건넨 술을 마신 것이 화근이었다.
-무슨!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그 직후였다.
어느새 믿고 의지했던 부하의 품에서 나온 단검이 나를 겨누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날린 내 몸 위로 수없이 많은 암기들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급박하게 변한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찾아온 무력감은 내 몸을 둔하게 만들었다.
-놈이 독을 마셨다! 쳐라!
수하의 입에서 나온 비명에 가까운 외침에, 숱한 사선을 넘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긴장감이 몸을 잠식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배신자들을 피해 달아나려 애썼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상황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수의 기사를 베어 버렸는지는 기억도 나질 않는다.
백을 넘긴 시점에서는 세는 것을 포기했을 정도였으니까.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그 과정에서 내 몸에는 점점 작은 검상들이 아로새겨졌다.
비단 검상 뿐만이 아니다.
마치 칼로 도려낸 듯한 고통이 내 가슴속을 후벼 댄다.
이미 일백이 넘는 숫자를 베어 버린 지금에도 무뎌지지 않은 감정이었다.
뚝-
어깻죽지를 꿰뚫은 화살을 꺾었다.
핏물이 울컥 배어 나오는 어깨에서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화살을 꺾는 손바닥마저도 이미 넝마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 늙은이는 어디까지나 왕국을 위해, 돌아가신 선왕의 유지를 이어 가기 위해 이런 결단을 내린 것이니까요.”
어깨를 으쓱거린 아수스 공작이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메여 있던 검을 음미하듯 뽑아 들었다.
피눈물이 흘러 붉게 변해 버린 시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선왕이 죽은 뒤에 실종되었던 왕실의 보검. 에스테라였다.
그걸 대체 어떻게…….
차마 묻지 못하고 숨만 몰아쉬던 나에게 아수스 공작이 말했다.
“아, 혹시 선왕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습니까?”
“…….”
“그럴 리가요. 이 검은 제가 친히 선왕의 부탁으로 맡아 놓았습니다.”
약 올리듯 말하는 놈의 말속에 내재된 의미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급작스런 선왕의 죽음. 사라진 보검. 그리고 바로 지금 놈의 손에서 나타난 것까지.
나는 한계까지 닥쳐 온몸을 추스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네가…… 감히…….”
“흐음. 섣부른 추측은 좋지 않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선왕의 부탁에 따라 잠시 맡아 두고 있었을 뿐이니까요.”
“…….”
“물론, 국왕인 당신에게 적당한 시기가 되면 돌려 드릴 예정이었습니다만, 그토록 전쟁에 미친 학살자가 되어서야 왕실의 보물을 돌려 드릴 수는 없었지요.”
내가 전쟁에 미친 학살자라고?
강대국으로 거듭나고자 했던 선왕의 유지라며,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며.
그렇게 왕국을 제국과의 전쟁으로 이끈 것은 네놈이지 않으냐?
하지만 이런 내 외침은 결코 입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후방에 서 있던 마법사들에게서 몸을 봉쇄당한 탓이었다.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아수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내 작은 목소리로.
주변에 서 있던 기사들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멍청한 꼭두각시 새끼. 자신을 죽인 원수를 신뢰하던 아들이라니. 네 아비가 하늘에서 울부짖고 있을 것이야.”
분노와 무력함 때문에 시야가 빙빙 돌았다.
“흐흐, 마지막 선물로 알려 줄까? 몇 년 전인가부터 찾아 대던 바로 그 서류, 예전 네놈의 집무실에 아직도 그대로 있지. 등잔 밑도 못 알아보던 꼴은 제법 우스웠다.”
숨을 쉴 때마다 검은 핏덩어리들이 토해지듯 튀어나왔다.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른다.
쿨럭-
핏물이 아수스의 하얀 제복에 묻어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놈은 개의치 않으며 웃을 뿐이었다.
“꼴에 고상한 척 거들먹거렸지만 이게 다 뭔가? 이렇게 추한 마지막이라니, 참으로 안타깝군.”
“끄으윽…….”
“연방 제국의 황제께서 보신다면 참으로 기뻐할 것이야.”
후회되었다.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진즉 알아챘어야 했다.
아니.
놈이 제국과 내통해 수상한 행보를 보인다는 사실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놈을 처단하기를 망설인 것은 어디까지나 선왕이었던 아버님의 오랜 친구였다는 사실과, 유서에 적힌 ‘그를 의지하라’라는 문장 때문이었다.
“국왕 자리는 잘 받아 가지. 머저리에게 잘 가라는 인사는 하지 않겠네만.”
모든 게 내 탓이다.
이런 녀석이라는 사실을 진작 인정하고 우유부단하게 행동하지만 않았어도.
놈이 눈치채기 전에 비리의 증거를 찾아내, 처단하기만 했어도.
내 눈과 귀로 왕국의 정세를 똑바로 파악하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전쟁에 미친 독재자라 불렀다.
그리고 이 가증스러운 아수스 공작은 오랜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구원한 성군이 되겠지.
나와 내 기사들의 피가 놈이 가질 부귀영화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최후의 힘을 다해 몸을 비틀어 놈에게 달려들었다.
“죽…… 여…… 버리…….”
푹!
“쯧. 마지막까지 추한지고.”
에스테라가 내 심장을 파고든다.
그제야 내 가슴을 후벼 파던 비수들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모든 감각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옳으리라.
털썩-
흙먼지가 휘날리며 시야가 가려진다.
차마 감지 못한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 순간까지도 녀석은 웃고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지옥이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죽여 버리겠다.
마지막 남은 의식의 끈을 붙잡고 절규했다.
부디 마지막으로 내게 복수를 할 기회를 달라고.
저 간악한 개새끼의 목을 쳐, 나를 위해 몸을 내던진 기사들에게 속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그렇게, 더 이상 주변에 휘둘리던 그때의 멍청한 행동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생전 믿지 않았던 신의 존재를 떠올리며 간절하게 빌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흩어지려던 정신이 똑바로 되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 * *
“……하여 전하께 어울리는 수행원 후보를 찾았습니다.”
익숙한 천장이 보인다.
눈을 어지럽히는 샹들리에. 찬란한 오색 빛깔의 보석이 장식되어 있는 기사의 조각상.
대략 20여 년 전.
내가 아직은 왕자였을 시기에 사용하던 집무실이었다.
언젠가 홧김에 내 손으로 부숴 버렸을 것이 분명한 조각상도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꿈인가?’
방금까지 있었던 일은 꿈이었나?
아니.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분명 죽었다.
너무 급박하게 돌아간 상황인 만큼 잘 기억나진 않지만,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을 만큼 각인되어서 아직까지도 피를 끓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는 사후세계?’
믿기지는 않지만, 그쪽이 가능성이 있었다.
정말로 사후세계가 존재했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종교를 믿는 것인데…….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그 순간, 앞쪽에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겹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1왕자 전하?”
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거기에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아수스 공작이 보였다.
정확히는 주름이 적고 아직까진 드문드문 금발을 유지하고 있는, ‘백작’이었던 시절의 아수스였다.
“듣고 계시는지요?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어. 그래 계속해 봐.”
큰일을 겪은 탓일까? 성격이 냉정하게 변해 버린 것만 같았다.
아수스 공작. 아니, 백작은 잠시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보고서를 들고 말을 이었다.
“수행원 후보는 아카데미의 수석 졸업생으로…….”
듣기에도 역겨운 아수스 백작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주변을 둘러본다.
투박하지만 아직은 여린 내 손.
추억이 물신 느껴지는 인테리어들.
20년은 젊어진 듯한 저 개새끼까지.
확실하다.
지금 이 공간은 20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장소였다.
단언컨대, 지금 상황은 놈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보다도 황당한 상황이었다.
방금까지 있었던 일이 꿈이라고 해도 황당하고, 사후세계라고 하면 더욱 그러했다.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상황의 실마리를 잡은 것이 눈앞에 보이는 저 아수스 백작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다리를 꼬며 말했다.
“혹시 그 수행원 이름이 니외르드 리처드인가?”
“……예? 어떻게 아셨습니까?”
“오호라.”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니외르드 리처드는 네놈이. 아니, 자네가 후원하는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겠고?”
“으음. 그렇습니다. 혹 제가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던가요?”
“그럴 리가.”
재미있는 상황이다.
이러면 제3의 가설에 힘이 실리게 된다.
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계속 말해 봐.”
“예 알겠습니다. 니외르드는 헤르그 자작의 수행을 하기도 했으며…….”
자작의 추천장을 받고 황궁에 들어왔겠지.
“지금은 헤르그 자작의 추천으로 왕궁 행정부에 소속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3년간의 실무를 통해 능력을 입증했겠고.
“또한 3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 능력을 입증하였으며…….”
앞으로 놈이 할 말들이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더 들어 볼 것도 없다.
니외르드 리처드는 20년 전. 놈이 내게 추천해 줬던 수행원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이를 수락했지.’
지금 생각해 보면 니외르드 리처드는, 아수스 백작이 나를 감시하기 위해 달아 놓은 눈이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내 행적 하나하나 샅샅이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그걸 알고도 묵인해 준 전의 나는 병신이라도 되는 것일까?
헛웃음이 나오면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적어도 ‘이젠’ 아니니까.
‘재미있네.’
정말로 어이없게도, 나는 과거로 돌아와 버린 모양이었다.
그것도 20년이라는 긴 시간이나 말이다.
대체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할까?
하물며 원인도 짐작 가지 않는다.
인제 와서 실감이 나질 않는다던가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아수스 백작.”
“하여, 니외르드 리처드는…… 예? 예 전하.”
“자네는 2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뜬금없는 내 질문에 아수스 백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 그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갑자기 그런 것을 여쭤보시는 연유가 무엇이십니까?”
“말해.”
“흐음. 그렇다면 저는 국왕 전하께 기사 서약을 받고 싶습니다.”
아, 기사 서약을 포기하고 가문을 이었다고 하던가?
이제 와서 기사 서약을 받고 싶다니. 딴에는 내게 잘 보이려고 저런 말을 하는 모양이다.
퍽 감동적이다.
뭐, 예전의 나였다면 분명 왕실을 생각하는 저런 말에 감동받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그래?”
나는 벽에 장식되어 있던 예식용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아수스 백작 앞으로 다가가서 어깨 위로 올려 두었다.
“그, 그건 설마?”
왕실의 예우.
어깨에 한 번. 머리에 한 번 가져다 댐으로써, 왕실 명예 기사로의 임명을 하게 된다.
국왕. 혹은 왕의 자리에 오를 사람만이 단 한 번 가능하다는 숭고한 의식.
그리고 이는, 귀족에게 있어서 그 어떤 작위보다도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아수스 백작의 표정이 밝게 변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는 감격에 겨워 있는 백작에게 답해 주었다.
“그럼. 감사해야지.”
서걱-
“꺄아악!”
아수스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주인 잃은 놈의 몸뚱어리에서 피 분수가 터져 나와 집무실을 붉게 물들였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의 입에서 우렁찬 비명이 튀어나왔다.
익숙한 피비린내로 가득 찬 집무실 안.
나는 아직까지도 환한 표정으로 굴러다니는 아수스 백작의 머리를 발로 차며 중얼거렸다.
“잘 뒤졌다. 씹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