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4화
과거로 돌아오다 (4)
“여기에서 잠시만 대기해 주시면 됩니다.”
사용인의 말에 조지 헤그메스는 뻣뻣한 고개를 애써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덜컥-
“휴우.”
사용인이 나가고 응접실의 문이 닫히자, 그는 참아 왔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왕궁이라는 이름이 주는 긴장감 탓일까? 아랫배가 슬슬 아파 오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익숙해 질 것 같지는 않았다.
“…….”
주변을 둘러봐도 온통 황금빛투성이다.
흔하게 굴러다니는 장식품들은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지금 자신이 앉아 있는 이 소파 역시도 살면서 앉아 본 그 어떤 의자들보다 월등히 좋았다.
단언컨대. 정말로 살면서 처음 본 광경이었다.
이는 그가 받은 고급 의상도 마찬가지였다.
“아오 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대체 무슨 이유로 그 잘난 1왕자 전하께서 나를 찾으시는 것일까.
시골에서 태어나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나를 말이다.
‘아니지. 양심상 평범한 인생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오히려 찔리는 것이 너무도 많았기에 짐작이 가질 않았다.
잡념 섞인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였다.
덜컥-
급작스럽게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은빛의 머리카락과 적색의 눈. 그리고 귀공자의 것과 같은 날렵한 몸.
하지만 그 미형의 외모는 도리어 감히 쳐다볼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풍겨 왔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제복은 왕궁의 분위기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때문에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1왕자라는 사실을 단박에 짐작할 수 있었다.
“어…….”
예를 표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 조지의 몸이 순간 굳어 버렸다.
분명히 사용인에게 왕실에 대한 예우를 배웠을 터다.
하지만 맹수의 그것과도 같은 적색의 눈을 마주하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리며 아무런 기억도 나질 않았다.
“그, 그게…….”
붉은빛의 눈은 분명 값비싼 보석보다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하지만 그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장에 흩뿌려진 굳은 피처럼 잔혹한 검붉은색이다.
도대체 사람의 눈이 어찌 그리 잔혹할 수 있단 말인가?
사자를 마주한 사슴이 이런 심정일까.
고작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그의 뇌리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배되었다.
이건 원초적인 공포였다.
‘젠장!’
왕족 모독이라는 단어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기절할 것만 같았기에.
조지는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끼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 * *
‘어리군.’
응접실에 있는 조지 헤그메스를 보자마자 처음 든 생각이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말은 아니었다.
비도르 남작이 알아 온 그의 나이는 지금의 나와 같았으니까.
다만. 그의 행동거지가 회귀 전 보았던 벼려진 느낌과는 사뭇 달랐기에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아직은 어수룩한 녀석의 모습.
동일 인물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였지만, 20년의 세월이면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간이니 당연한 걸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벌써부터 사기꾼의 냄새가 난다.’
놈이 에스테반 왕국에서 쫓겨나듯 도망친 이유.
그건 바로 귀족들에게 사기를 치다 걸렸기 때문이었다.
정말 통 크게도 조지 헤그메스는 자기가 살던 영지의 영주와 그 지인들의 뒤통수를 쳤다.
총 여덟 건의 대형 사기. 그것도 무려 천만 골드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일하던 상단의 금품들을 몰래 착복해 왔는가 하면, 예산을 임의로 수정해 여분의 돈을 횡령하기를 일삼았다.
사기 건이 아주 우연히 적발되지만 않았어도 피해 금액은 더욱 늘어났으리라.
여러 사정이 있었겠지만 에스테반 역사에 남을 사기꾼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마도 순식간에 적국의 수뇌부로 올라간 데에는 그러한 경험이 녹아들었겠지.’
평민 출신의 천재 사기꾼.
그런 놈을 내 아래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리스크가 있는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놈을 손에 쥐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자신이 있었다.
녀석이 도망간 이유는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없었다면 일을 추진하지 않았으리라.
긴말은 필요 없다.
“자리에 앉지.”
나는 제복 외투를 벗고 상석에 앉았다.
그러고는 함께 응접실로 들어온 비도르 남작에게 외투를 건넸다.
하지만 조지는 아직까지 멍하니 굳어 있을 뿐이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나? 조지 헤그메스.”
“예?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그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 얼굴 사이에 숨어 있는 사기꾼의 본능을 감추지는 못했다.
의도된 표정이었다.
‘내가 자기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군.’
방금까지 굳어 있던 주제에 태세변환이 정말로 빠르다.
저렇게 유약한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내게 여린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기려는 모양이다.
이미 모두 간파당했지만 말이다.
아무 의미도 없는 눈치싸움.
자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나는 조지 헤그메스의 인적 사항이 적힌 문서를 읽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왜 불렀는지 알겠나?”
“죄, 죄송합니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쯧.
나는 짧게 혀를 차며 미간을 좁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게는 유능한 보좌관이 필요하다.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채워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
“하여 내가 너를 보좌관의 후보로 선택했다.”
“……예?”
이번에는 진심으로 경악한 듯. 놈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를 말씀이십니까?”
“그래.”
“소, 소인은 시골에서 태어나 배운 것 하나 없는 놈입니다.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예상치도 못한 제안에 녀석의 눈알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머리를 굴리는 것이 괘씸했다.
“시류를 읽어 유행을 선도하는 눈. 시골 지부의 매출을 단기간에 세 배나 올린 능력. 마지막으로 왕자 앞에서도 겸손함을 유지하는 모습까지. 이래도 내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냐?”
“그, 그런 것이 아닙니다!”
“1왕자의 보좌관이 되는 것은 평민인 너에게도 큰 명예일 것이다. 물론 그에 맞게끔 큰돈도 따라오겠지.”
조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고는 눈매를 좁히며 생각에 빠졌다.
아마도 보좌관이 되는 미래와 되지 않는 미래를 저울질하고 있으리라.
‘이미 돈은 상관없다 이건가.’
보통의 평민이었다면 고개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1왕자의 보좌관이 된다는 것은 곧 인생의 역전을 뜻하는 것과도 같았으니까.
평민인 주제에 이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예상대로 녀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거절의 의사를 표하는 것마저도 허락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히 1왕자 전하의 보좌관으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디 결정을 재고하여 주십시오.”
“오호.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죄송합니다.”
하는 수 없지.
나는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조지를 노려보는 비도르 남작에게 손짓을 했다.
이내 독대하겠다는 내 의사를 알아들은 비도르 남작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응접실을 나섰다.
그럼 이제부터 본론의 시작이었다.
“조지 헤그메스.”
“예 전하.”
“이런 제안을 거절하다니, 상단의 예산을 너무 많이 챙겨서 배가 부른 모양이야.”
“예?”
잘못 들은 것일까? 놈의 표정이 의문스럽게 변했다.
나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네놈의 일 처리 능력을 높게 쳐, 보좌관으로 임명하려 했건만…… 이렇게 수틀리다니 안타까울 일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듣자 하니 어머니의 불치병 때문에 횡령을 했다지?”
일순 포커페이스가 깨지며 놈의 진정한 표정이 드러났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 어떻게 그걸?”
“평생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대 에스테반 왕국의 눈으로부터?”
“…….”
“신전에서 판매하는 회복용 성수는 비싸다고 들었는데 그 돈을 갚으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군.”
그러고는 일부러 강조하듯 뒷말을 이었다.
“네놈이 감옥에 가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이야.”
조지의 얼굴이 답지 않게 당황으로 번졌다. 설마 들켰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다.
정보부에게 들켰다는 말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렇게 쉽사리 들킬 정도였다면 보좌관으로 뽑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당히 채찍질했으니 이제 당근을 줄 차례였다.
“그러나 백성을 위하는 것은 무릇 왕자의 숙명이다. 만일 내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성수 따위가 아닌 치료제를 만들어 줄 것을 약속하지.”
“……치료제?”
“네 어머니의 불치병을 온전히 낫게 해 줄 치료제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가족을 볼모로 잡는 것은 취향이 아니라서. 다만, 그 경우에는 지금까지 횡령한 돈을 모두 상회에 갚아야 하겠지만.”
우뚝-
놈의 몸이 굳어 버렸다.
무슨 의도일까? 정말로 아무런 조건 없이 치료제를 주겠다는 건가? 놈의 눈빛에 담긴 의문.
물론 진심이었다.
놈이 이적한 또 다른 원인 중 하나인 어미의 죽음.
그것과 놈에게 횡령의 이유를 지우는 것으로, 카롯트 연방제국의 참모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겸사겸사 놈을 영입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테고.’
나를 당황케 했던 그 재능이 참을 수 없이 탐이 나기에.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여유롭게 웃으며 계약서 한 장을 꺼냈다.
“나를 따르겠다고 하면 섭섭하지 않은 대우를 해 주지. 물론 보좌관 이상의 업무를 해내야 할 것이다.”
친히 조지의 앞으로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녀석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계약서를 받아 냈다.
1. 조지 헤그메스는 1왕자의 그림자가 된다.
2. 1왕자는 그 대가로 횡령한 상단의 돈을 대신 갚아 준다. 추가로 연간 100만 골드의 연봉을 약속한다.
3. 이 계약은 서명을 하는 즉시 효력이 발생한다.
4. 단, 계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더라도 1왕자는 조지의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할 치료제를 제공한다.
단 네 줄 뿐인 계약서.
그 안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 역시도 간단했다.
너와 네 가족에게 풍족한 미래를 주겠다.
“치, 치료…… 어머니를…….”
그 순간, 손에 든 주머니가 테이블 위로 허물어지며 눈에 담기도 어지러울 정도의 금화가 쏟아져 내렸다.
서민 가족이 평생 동안 모아도 구경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금액.
나는 테이블을 가득 채운 금화들을 무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선금이다. 이 돈은 네 가족들을 수도로 데려오는 데에 보태도록.”
“저를…… 어떻게 믿으시려는 겁니까? 저는 이미 다니던 상회에서까지 횡령했던 몸입니다. 제가 전하를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당돌하다.
피어난 희망에 명백히 환희하면서도 이런 상황에서마저 내 의중을 떠서 눈치싸움을 하려 들다니.
‘하지만 그뿐이다.’
경험 없는 사기꾼은 결코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때는 비로소 내 눈이 잘못되었다고 하겠다.”
이대로 고향에 돌아가 평범한 삶을 살거나 1왕자의 보좌관이 되거나.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조지는 핑핑 도는 머리를 진정시키며 만년필을 쥐었다.
“좋군.”
놈이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보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걸로 확실한 인재를 확보해 내는 데에 성공했다.
회귀하고 나서의 첫 수확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내 사람이 된 것을 환영한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아직은 허울 좋은 충성일 뿐이다.
하지만. 비록 사기꾼이라 하더라도 가족에 대한 마음만은 진심인 녀석이다.
어머니의 건강한 모습을 보게 된다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심을 보일 테지.
나는 놈이 작성한 계약서를 뺏어 들어 품에 넣은 뒤,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비도르 남작을 불러냈다.
덜컥-
“1왕자 전하. 부르셨습니까?”
“놈이 보좌관을 하기로 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음.”
아니, 아까는 안 하겠다고 했으면서?
비도르 남작의 시선이 그렇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죽을 맛인 조지 헤그메스가 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놈을 데려가서 지낼 방을 알려 주어라. 그리고 당분간은 나를 따라다니며 보좌관이 해야 할 일을 모두 일러 주도록.”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 보라.”
기약 없는 연장근무에 울상이 된 비도르 남작이 조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녀석은 말 그대로 끌려가다시피 움직였다.
덜컥-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응접실에 홀로 남게 되었다.
차가운 정적이 마음에 들었기에 조금만 더 이대로 있기로 했다.
나는 발걸음을 옮겨서 창문 쪽으로 다가섰다.
“이제 한 걸음.”
어긋났던 미래를 바꾸기 위한 몸부림이 마침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똑똑똑-
“전하. 국왕 전하의 호출이 있었사옵니다.”
문을 두드리는 시녀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시간은 벌써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마침 잘 되었군.
이제 곧 자숙도 끝날 시기였으니,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였다.
“지금 출발하지.”
하지만 역시 누군가에게 불려 다니는 것은 아직도 익숙해지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