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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13화 (13/223)

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3화

미래를 바꾸기 위해 (3)

내 눈이 주변을 훑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대전 내부.

나를 에워싼 기사들은 하나같이 적의를 내뿜으며 검을 겨누고 있었고, 불빛에 비친 왕실의 보검 에스테라가 반짝였다.

그리고 그 위에 당당하게 선 노년의 남성.

이곳은.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었던 배신의 전장이다.

“……환상?”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환상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점점 선명해지는 의식과 상처투성이인 몸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감각은. 지금이 현실이라고 일깨워 주는 것만 같았다.

“무슨 수작이지?”

“호오, 대단한 정신력이로고. 벌써 이 공간에 대해 간파하다니.”

정체를 간파당한 아수스 공작이 턱을 쓰다듬으며 다가왔다.

나는 귓가에서 왱왱 울리는 놈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말투는 집어치워라. 흑마법의 잔재 주제에.”

“그런 실례를, 이 모든 것은 자네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만.”

놈의 말 대로였다.

피로 물든 대전과 죽음을 앞둔 이 상황은, 내 정신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말투까지도 말이네.”

쯧-

나는 회귀 전의 일들이 떠올라 작게 혀를 찼다.

상정하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티팩트 주제에 환상을 심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던 참이었으니.

‘들었던 것보다 위험한 마력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놈은 보검 에스테라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살피기 시작했다.

“썩 좋은 검이로다. 이런 놈에게 들려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비꼬는 건가?”

“그렇게 느꼈다면, 알렌 에스테반. 자네의 한심함을 인정하는 꼴이 되겠지.”

멍청했기에 지켜 내지 못했다.

직설적으로 들릴 만큼 정말로 간단한 이야기였다.

“부정할 생각은 없다.”

“크흐흐. 참으로 마음에 드는 성격인고.”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

기억 속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기에 토악질이 올라온다.

놈이 천천히 자세를 숙여 눈을 맞춰 왔다.

“그러니 이 나를 찾아온 것이겠지. 힘이 필요할 테니까.”

“…….”

“이번에는 틀렸다고 할 참인가?”

답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미 내 모든 기억의 편린을 엿본 녀석으로서는 나를 흔들기 위해 저런 말을 하는 것일 테니.

나는 오히려 실실 쪼개고 있는 녀석의 면상에 마주 질문을 던졌다.

“내 육체를 탐하고 있구나.”

“물론.”

놈은 육체에 대한 욕망을 숨길 생각조차 없는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정확히는 서로 이득을 보자는 이야기임세.”

“건방지군.”

“이건 전혀 나쁜 이야기가 아니야.”

아수스 공작의 껍데기 위로 검은빛의 마력이 솟아올랐다.

놈이 직접적으로 정신세계에 침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네는 강력한 마력을 얻고, 나는 버려진 해골 따위가 아닌 새로운 육체를 얻는 것이지.”

“…….”

“손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단지, 지낼 수 있는 몸이 가지고 싶을 뿐이야. 그 주도권은 자네에게 있겠다만.”

그 짧은 순간에 무슨 계산이 섰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뜻은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아무런 조건 없이 힘을 주겠다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손만 뻗으면 막강한 힘을 주겠다고…….

“직접 보게나. 지금 자네의 모습은 어떻지?”

나는 시선을 낮춰 내 몸을 살폈다.

온통 상처투성이인 몸뚱이 위로 그려진 피 칠갑.

그야말로 패배자의 꼴이었다.

“그래서는 안 되지 않는가. 천하의 검왕이.”

“…….”

“하지만 나를 받아들인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야.”

환상이 일그러지더니, 새로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더 이상 고독하게 쓰러져 가지 않았고, 나열해 선 대신들의 눈빛에서는 강한 충성심이 엿보였다.

“어떠한가? 새로운 미래는.”

꿈에 그리던 이상적인 미래였다.

이미 마음속을 잠식하는 지독한 패배감은 전신을 물들인 지 오래였고, 이제는 힘을 갈망하는 한 줄기의 추악함만이 내게 남아 있었다.

“자, 이제 선택하게나.”

힘을 받아들이고 강자로 거듭나느냐, 이대로 패배자의 삶을 살아가느냐.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선택을 앞둔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하하, 하하하!”

그저 소리 높여 웃는 것밖에는 없었다.

아수스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실성하기라도 한 것이냐?”

“실성? 실성이라고?”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겠지.

……그래.

굳이 따지자면 나는 지금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가소롭군.”

“뭐라?”

“무슨 말을 지껄이는가, 두고 보려 했건만. 한심해서 더는 들어 줄 수가 없구나.”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아수스 공작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얼굴을 구겼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그래도 감히 나를 즐겁게 했으니, 그 정성을 봐서라도 고통스럽게 보내진 않겠다.”

“서, 설마! 정신지배가 통하지 않았다고?!”

“정신지배? 흐음…….”

몸을 잠식하던 패배감과 힘에 대한 갈망.

이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이상, 절대로 피해갈 수 없는 유혹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래서 뭐?”

믿었던 수하들의 검에 베이고, 마침내 심장을 찔린다.

눈을 감을 때면 일백 번이고 되새겼을 장면이었다.

그렇게 매일 반복되는 자괴감과 실의.

하지만 그러면서도 결코 패배감에 좌절하지 않았다.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후회했기에.

다시는 내 소중한 것들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기에.

패배감이야말로 내 존재를 증명하는 원동력이었으니, 저딴 수작쯤은 백번 천번이라도 웃어넘길 수 있다.

지금의 ‘나’는 악몽 속에서 무력하게 죽어 나가던 꼭두각시가 아니었으니까.

“고작 죽어 간 원혼 주제에 나를 집어삼키려 드는가?”

-젠장!

“어딜.”

황급히 도망치려던 아수스의 목을 조른다.

바닥으로 떨어진 보검에 비친 핏빛의 눈동자가 짐승처럼 빛나고 있었다.

비록 환상에 불과했지만, 무력하게 죽었던 자신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해 주지.”

-커, 커억!

머저리? 허수아비? 전쟁광?

가령 불완전하고 미숙했던 내 자신이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 순간.

나는 과거의 악몽과 맞서 당당하게 승리를 쟁취했다.

* * *

우우우웅!

공간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 육체는 창고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

그와 동시에 전신의 근육이 타오르는 느낌이 들며, 일신의 모든 기운이 폭발적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기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고 있던 둑이 터져 나간 기분.

파앗!

어느새 부정적인 마력의 덩어리는, 곧 하나의 검은 점이 되어 천천히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단지 몸속에 자리를 잡는다든가 하는 가벼운 현상이 아니었다.

“큭!”

한없이 미약했으나, 그 어떤 기운보다 맑고 강인한 자아.

그와 반대로 그 어떤 기운보다 추악하고 거대한 부정.

마침내 두 기운 사이의 간극이 사라진 후에 남아 있는 것은, 몸을 충만하게 감싸고 있는 오러뿐이었다.

주도권 싸움에서의 패배를 인정하고 온전히 내 일부가 되기를 택한 것이다.

후욱. 후욱.

가빠 오는 숨을 몰아쉬며 균형을 잡았다.

순간 검은색으로 변했던 눈이 천천히 붉은색으로 되돌아왔다.

그럼에도.

아파지는 머리와 별개로 몸 상태는 그 어느 때보다 훌륭했다.

“……가볍다.”

나는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신체의 내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혈관을 통해 자연스럽게 흐르는 오러는 더 이상 부족하지 않았고, 도리어 전신을 가득 채운 느낌이었다.

더할 나위 없는 성공이다.

부정적인 기운을 힘으로 온전히 흡수하여, 과거의 영광을 어느 정도 되찾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생각보다 험난한 길이었지만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무의식적으로 느껴지는 감각만으로도 알았다.

최소 열 배 이상의 오러량.

이제는 단순한 오러의 숙련도뿐만 아니라 그 힘조차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대륙 역사의 최연소 소드마스터가 서른 살이었던가?

이를 10년은 앞당긴 것이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된다고 할 정도의 성장 속도였다.

‘최소 삼 년이 걸릴 거라고 예상했건만…….’

요인으로는 시간을 앞당겨 은신처를 발견한 점을 꼽을 수 있었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아직 해골에 갇힌 기운들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뿐.

그 덕에 고생하기는 했다지만, 모든 기운을 흡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변수였다.

“이곳을 찾은 것은 옳은 판단이었구나.”

나는 한참이나 해골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성장에 대한 여운? 상황이 끝난 것에 대한 아쉬움? 마침내 악몽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

……어쩌면 셋 다.

뭐가 되었든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제야 겨우 기틀을 쌓지 않았는가? 이대로 멈춰 있기에는 일렀다.

밖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남작을 위해서라도.

“결과적으로는 정말로 핑계대로 정화를 한 꼴인가.”

나는 피식 웃으며 눈을 빛냈다.

이로써 미래에 주변 마을들이 언데드들의 습격을 받는 일도 사라질 테고, 그로 인해 은신처가 발견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또다시 미래가 변한 것이다.

이 또한 운명이라는 것인가?

“가자.”

끼이익-

“전하!”

창고 문을 열고 나가자 하얗게 질린 남작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 호들갑이, 어쩐지 반가운 마음이 들어 살짝 웃어 보였다.

“괘, 괜찮으십니까? 금방 엄청난 진동이…….”

“멀쩡하니 호들갑 떨지 말도록. 그보다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딱 자른 내 질문에, 남작이 식은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대략 두 시간입니다.”

“흐음. 그렇게 많이 지났나?”

“그…… 죄송합니다. 전하께서는 왕궁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지만, 차마 이대로 갈 수는 없었습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서 30분이라는 이야기를 해 둔 것이었지만…….

은신처가 흔들릴 정도의 진동을 겪고도 나를 걱정해 자리를 유지한 것은, 아마 자각도 없이 벌인 행동이었으리라.

그런 점 때문에 내 사람으로 두고자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테지.

‘그나저나…….’

찰나에 스쳐 간 시련이었지만 두 시간이나 흘렀다는 것인가?

예상보다 시간을 너무 허비했다.

“볼일은 끝났으니 이만 돌아간다.”

나가는 방법은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문을 통한 공간이동이다.

늘어난 실력을 점검해야 하기도 하니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 발걸음을 잡아끄는 것은 등 뒤에서 들려온 남작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앗, 전하! 방금 저기에 무언가가 나타났습니다!”

“음?”

“석상의 아래쪽입니다!”

남작이 말한 방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보인 것은, 검은색의 보석이 박혀 있는 고풍스런 반지였다.

“이건?”

나는 천천히 다가가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반지를 주워 들었다.

그러자, 남작이 조금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반지를 힐끔 살폈다.

“미믹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아티팩트의 일종으로 보입니다.”

“흐음.”

“그……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소인이 워낙 아둔한 탓에…….”

미묘한 반응은 결코 물건의 정체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정말로 예상외의 수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음 차원의 마나라는 가시 속에 숨겨 둔 것인가.”

기하학적 문양이 음각된 몸통. 그 위로 시선을 사로잡는 검은 보석.

처음에는 확신하지 못했으나, 자세히 보니 내가 알던 그 물건이 맞는 것같아 보인다.

“좋군. 자네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넘어갔겠지. 잘했다.”

진심이 우러나온 말에 남작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입니다.”

내가 아는 그 물건이 맞다면, 이런 곳에서 사용한다 한들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

물건에는 각자에게 맞는 사용법과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는 법이니까.

나는 반지를 품속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우선은 왕궁으로 귀환하도록 하지.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는 것은 좋지 않을 테니.”

“알겠습니다.”

우우우우웅-

이제는 낯설지 않은 굉음과 함께 시야가 점멸했다.

석문을 여는 손길은,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했다.

……

잠시 후.

정신을 차리자, 우리는 처음 있었던 장소에 서 있었다.

“후우. 이 공간이동은 적응이 되질 않습니다.”

돌아온 공동묘지.

벌써 아침이 되었음에도 또다시 몰려든 안개 탓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보다 넓어진 감각은 수백 미터 넓이의 공동묘지가 손안에 들어온 듯 훤히 보였다.

“굳이 공간이동에 적응할 필요는 없겠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 이야기는 됐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칼집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남작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또 구울입니까?”

“아니. 이번에는 다른 손님들이 찾아온 모양이다.”

“그, 그렇다면 혹시 유령이라든가…….”

또다시 발병한 남작의 호들갑에 짧게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다행스럽게도 살아 있는 생명체다.”

“휴우. 그렇다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유령이 나을 뻔했군.”

적어도 유령이었다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 테니까.

나는 안개 속에서 살기를 숨기고 있는 승냥이들을 꿰뚫어 보면서 말했다.

“암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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