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검왕은 폭군이 되기로 했다 16화
감춰진 진실과 드러난 사실 (1)
테일러 비도르.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를 가진 남작가의 가주.
평범하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으나, 소탈하고 모나지 않은 성격으로 영지민들의 칭송이 자자한. 그저 그런 귀족이었다.
우연히 방문하게 된 왕궁에서 벌어진 일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어, 어서 오십시오. 에스테반에 방문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늦봄의 싸늘했던 바람이 지나간 어느 날.
카롯트 연방제국의 사절단은 의도라도 한 듯 약속한 시각에 맞춰 왕성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들을 맞은 것은, 1왕자의 보좌관인 비도르 남작이었다.
연방제국 특유의 붕 뜬 복식을 한 사절단의 대표가 악수를 청해 왔다.
“에슐라 백작이오.”
“비도르 남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하지.”
이 순간.
비도르 남작은 울고 싶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원인을 꼽으라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하필이면 고위급 귀족 살해 사건이 터질 시점에 왕성에 방문한 일?
아니. 그보다는 가만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1왕자의 눈에 띄게 된 일?
그게 아니라면…….
-이번 사절단의 안내역은 자네가 맡도록.
-……예?
사흘 전. 자신의 상관이 지나가던 말투로 불붙은 화약통을 건넨 그때를 꼽을 수 있었다.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의사와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째서 하필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자리는 자신 같은 일개 남작 따위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는 이런 답을 들었다.
-선뜻 나서는 자가 없더군.
-…….
-그래서 내가 사절단과의 독대를 조건으로 자네를 추천했지.
-으악!
어느새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 상관을 위해 부담스러운 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충신이 되어 있었다.
물론 거기에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은 잠시 묻어 두고.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으면서…….’
남작은 치밀어 오르는 불경함을 애써 감추며 준비된 대사를 읊조렸다.
“먼저 에스테반의 국왕 전하께서, 잠시나마 오랜 여독을 풀 수 있도록 쉴 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오오! 그런가?”
“원하시는 분께는 식사를 제공해 드릴 것이고, 그때그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잘 되었구먼. 마침 배가 출출하던 참이니 식사를 부탁해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그렇게 왕궁을 안내하며 진땀을 빼고 있는 비도르 남작.
남작은 결국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조지였다.
“거 바쁘게들 사시네.”
“쉿!”
남작이 식사에 열중하는 사절단 일행의 눈치를 보더니 펄쩍 뛰었다.
“행실을 바르게 하라고 하지 않았나! 자네는 언젠가 1왕자 전하의 보좌관이 될 사람일세!”
“……주변에는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어허! 비록 아직까지는 자네가 내 보좌관이라는 이름하에 교육받고 있다지만, 그 행동들은 나아가서 나를 임시 보좌관으로 두신 1왕자 전하의 명예까지 실추시키는 일일세!”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녀석은 결국 이어지는 비도르 남작의 잔소리에 몸서리치며 항복을 선언했다.
물론 나불거리는 그 입은 아직 살아 있는 채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음? 무엇을 말하는 건가?”
조지가 사절단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절단 일행 말입니다.”
“어허! 또 그런 망발을!”
또다시 펄쩍 뛰기 직전인 비도르 남작.
조지는 그의 잔소리가 이어지기 전에,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번에는 험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위화감?”
“무언가 행동들이 어색하다고 해야 하나…… 마치 짜인 것처럼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어서.”
“……흐음.”
사절단 일행은 정말로 배가 고팠는지 평범하게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사절단 일행을 보고 있는 내내, 조지의 마음속에서는 위화감이 떠나질 않았다.
아마 관심 있게 보지 않았다면 결코 느낄 수 없었을 아주 작은 위화감.
이는 천천히 조지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큰 의문의 파장을 남겼다.
“한데 그 정체를 모르겠단 말이죠.”
조지가 어깨를 으쓱하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관심이 사라진 것마냥 연신 하품을 해 대기 시작했다.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으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비도르 남작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전하께 직접 말씀드려 보겠네. 자네가 터무니없는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마음대로 하시죠.”
정말로 위화감 따위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조지였다.
남작의 의도야 어쨌든,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관심사가 피어나고 있었기에.
“그나저나, 전하는 어디에 계십니까? 하루 종일 안 보이시던데.”
“나도 모르겠네. 이런 편지를 남기고 사라지셨다는 것밖에는…….”
“편지요?”
“후우. 자네도 행선지를 듣지 못했는가? 곧 회담이 시작될 텐데, 대체 어쩌시려고…….”
남작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쪽지를 꺼내, 조지에게 건네주었다.
……애초에 건네받을 필요도 없이 간단한 내용이었던지라, 쪽지를 읽어 나가는 조지의 표정이 황당하게 변했다.
-잠시 나갔다 온다.
그리고 그 감상은 간단했다.
“와우.”
* * *
“반갑다.”
대전 내부에 국왕의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절단의 대표인 에슐라 백작이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올렸다.
“뭇 기사들의 이정표이자 아스테반 왕국을 이끄시는 국왕 전하께 인사드리옵니다. 에슐라 백작이라 하옵니다.”
제국의 사절단이면 고개가 뻣뻣할 법도 하건만,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예다.
이 순간을 위해 따로 배워 두었겠지.
국왕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했다고 들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은 편안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군.”
“전하의 배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훈훈한 모습으로 시작된 대화였건만, 대전에 있는 귀족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후 나올 대화들은 두 나라 간의 관계를 완전히 어그러뜨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웃고 있는 국왕의 표정은 어쩐지 서늘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을 터이지만, 더 늦기 전에 본론으로 들어가지.”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 중 한 명이 조그마한 상자 하나를 가지고 왔다.
수행원이 움직일 때마다, 반쯤 열린 상자 사이로 얼핏 보이는 하얀 종이들.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무엇일지는 누구든지 쉽사리 예상할 수 있었다.
“아수스 놈의 방에서 나온 비리의 증거들이다.”
“흐음, 그렇군요. 저게 바로…….”
“연방제국 측에 보낸 항의문에 자세한 내용을 적어 두었다. 어떠한 내용인지는 자네도 알고 있을 터다.”
“그렇습니다.”
내란 음모와 국왕 암살을 꾀했던 아수스 백작.
아쉽게도 놈이 육성한 군사의 행방이나 숨겨 둔 재물들의 위치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지만, 녀석의 죄는 이미 낱낱이 밝혀진 뒤였고, 이는 연방제국과의 유착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 사절단을 보내온 것은, 이번 사태에 대한 연방제국의 ‘변명’을 가지고 왔다는 말이겠지?”
그래.
확실한 증거가 나온 이상,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는 변명에 불과했다.
본질을 꿰뚫는 국왕의 날카로운 질문에, 에슐라 백작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먼저, 이 자리에 계시지는 않지만. 1왕자께서 그의 비리를 밝혀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오노레오 자작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백작의 배국 사실은 우리 연방제국과는 하등 관계없는 일입니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잠잠했던 국왕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 말대로입니다.”
“하!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군.”
“현실적인 이야기지요. 연방제국에서는 에스테반과 사이가 틀어질 만한 일을 할 이유가 없을 뿐입니다.”
이런 외교적 문제를 인정하고 넘어갈 연방제국이 아니었다.
그 누가 타국의 내란 음모를 사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겠는가? 놈들이 오리발을 내미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놈들의 뻔뻔한 작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여. 황제 폐하께서는 이번 사태를 중대하게 받아들이시고, 에스테반 측에서 진실을 밝혀내는 것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뭐라?”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황제 폐하께서 보내오신 서신이 있습니다.”
에슐라 백작이 마치 초대장처럼 생긴 황금빛의 편지 한 장을 꺼내, 국왕에게 건넸다.
정말이지 요란하고 제국다운 형식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국왕이었으나, 사절단의 앞에서 언짢음을 표현할 만큼 표정 관리가 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흐음.”
편지를 읽어 나가는 국왕의 얼굴이 점차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에슐라 백작의 얼굴은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변해만 갔다.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그렇게 귀족들의 궁금증이 커져만 가던 그때, 국왕의 입이 열렸다.
“이 내용이. 황제 폐하의, 그리고 연방제국의 뜻이라고 봐도 되겠는가?”
“그렇습니다.”
“지원…… 그래. 지원이라…….”
국왕이 서신을 내려놓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언뜻 보기에는 상황을 납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런 국왕의 눈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정확히 에슐라 백작을 향해 있었다.
“말이 좋아서 지원이고, 사실상 합의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결국 이번 사태를 돈으로 묻겠다는 뜻이 아닌가?”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 틀렸다고는 못 하는 모양이군.”
국왕이 서신의 내용을 상기하며 치를 떨었다.
서신에는 애초에 아무런 변명도 적혀 있지 않았으며, 오직 원하는 지원을 협의하라는 말 밖에는 없었다.
꼬리 자르기와 같은 진부한 수단조차 없던 것이다.
명백한 증거가 나온 작금의 상황과는 별개로 연방제국의 대응은 옳았다.
애초에 아수스를 통해 에스테반을 좀먹으려 했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결국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정해진 승자는 연방제국이었고.
그래서 국왕은 물러설 수 없었다.
이번 일에서 물러서면 제국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재차 비슷한 일을 행할 것이다.
거기에, 그 화살이 에스테반으로 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렇기에 인정할 수 없다는 의사를 표현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꽤 좋은 제안이 아닙니까.”
“……1왕자?”
대전의 문을 열고 나타난 1왕자가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국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크흠! 알렌 에스테반, 어디 있다가 지금 나타난 것이지?”
“잠시 확인할 것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확인이라고?”
이내, 있어야 했던 자리에 선 1왕자가 살포시 웃었다.
“자, 다시 시작하시지요.”
큰 이질감 없이 대화에 끼어들었다지만 장내의 분위기는 더욱 경직되어만 갔다.
어째서 하필 이런 타이밍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와 더불어 국왕의 머릿속도 복잡해진 것은 당연했다.
‘무슨 생각이냐.’
1왕자가 들어오며 했던 좋은 제안이라는 그 말.
그는 이번 ‘합의’를 긍정적으로. 아니, 그보다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누구보다 이번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었던 것이 1왕자 본인일 터인데.
“그래, 그렇다면 좋은 제안이라고 한 의도는 무엇이더냐?”
더욱 낮아진 목소리.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1왕자의 입이 열렸다.
“간단합니다. 그냥 그게 옳은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들어 볼 가치도 없군.”
정보부처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의 모습과는 다르게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이는 대답.
최근 보여 준 모습 탓인지 과대평가를 했던 모양일까?
국왕의 마음속으로 실망이란 감정이 생겨났다.
……아니.
잠깐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놈들의 죄를 밝혀낸 것도, 항의서를 보내라 조언한 것도. 모두 1왕자가 해낸 일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고작 몇 푼의 지원 따위에 한발 물러서라고?
그것도 사절단이 온 지금, 이 순간에?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1왕자의 눈이 국왕과 마주했다.
그는, 1왕자의 눈은 평온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계산대로라고 말하는 듯이…….
“…….”
그렇게 한참을 생각에 빠져 있던 국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을 밝혀낸 것은 네 공이었지. 그렇다면 너는 무슨 지원을 받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느냐?”
“그 전에, 어느 범위의 지원까지 가능한가에 대한 확답을 듣고 싶습니다. 에슐라 백작이라 했나?”
“예, 1왕자 전하.”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에슐라 백작이 답했다.
“지원의 범위는 유형의 것이든 무형의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제게 협상의 전권을 위임하셨습니다.”
“설령 그것이 진실을 알아내는 것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해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1왕자가 대전에 걸려 있던 대륙지도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에스테반과 연방제국을 사이에 둔 작은 땅에 닿아 있었다.
“……저기는.”
“에스테반의 옛 영토. 갈데르드 평야입니다.”
20킬로미터 남짓의 작디작은 평야.
1왕자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우리는 이번 사태에 대한 ‘지원’으로 땅을 받도록 합시다.”